건축과 사귀기

[삼삼한 전통건축] 경복궁 속 숨은 미스터리 궁궐 2009/05/30

딸기21 2019. 8. 7. 16:23

경복궁 북쪽에 숨어있는 ‘궁궐 속의 궁’ 건청궁


오랫동안 가보고 싶어했던 곳 중 하나가 건청궁이다.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궁, 
궁안의 궁, 경복궁 속 별궁,
궁궐인데도 일반 살림집으로 지은 궁,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켜진 궁, 
그리고 명성황후가 살해된 궁, 바로 그 건청궁 말이다.
 
이 궁이 올해 1월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지은 것은 2006년이었으나 인터넷 예약 방문만 하루 3회씩 받다가 이제야 문을 활짝 열었다. 빨리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고만 있던 이곳을 오늘에야 드디어 갔다.


직접 본 건청궁의 느낌은 사진으로만 보며 생각했던 예상과 매우 달랐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을 직접 보는 것 자체가 편치 않았다. 너무나 잔인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내막을 다시 한번 떠올려야 하는 탓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건청궁을 봐야하고, 을미사변을 기억해야 할 일이다. 그 것이 이 비운의 궁을 다시 복원한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슬픈 역사의 현장임에도 건청궁은 아름다웠다. 


향원정을 봤으면 그 뒤를 보라 

 
경복궁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경회루와 향원정이다. 경회루의 웅장하고 시원한 자태를 즐긴 뒤 계속 경복궁을 거닐며 올라가면 절로 사진을 찍게 만드는 멋진 건물 향원정이 나타난다. 연못 위에 떠있는 향원정, 그 뒤로 보이는 북악산(백악산)이 만들어내는 경치는 가히 경복궁 최고의 장면이다.
 


경복궁을 찾는 방문객들은 대부분 이 향원정에서 나들이를 마치기 쉽다. 이 뒤로 더이상 눈길을 끄는 화려한 건물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분이다. 그러나 몇 걸음만 뒤로 가자. 경복궁의 가장 내밀하고 깊숙한 곳, 그 곳에 건청궁이 있다. 사진 향원정 오른족으로 보이는 나무색깔 건물이다. 
 


다른 궁궐 건물들과 달리 건청궁은 단청을 안해서 오히려 역으로 튄다. 왜 백골집(단청을 안한 집을 부르는 말)으로 지었을까?


원래 조선시대 일반 살림집은 단청을 못했다. 궁궐 등에서만 단청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가 바로 궁궐 아닌가. 왜 이집만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은 이 건물이 궁궐이되 일반 사대부 집처럼 짓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건청궁은 원래 고종 임금의 거처였다. 고종이 1873년 거처로 지은 ‘궁내궁(宮內宮)’이다. 고종은 소박한 사대부집의 정취를 위해 이 집을 궁궐 건물이 아니라 일반 살림집으로 지었다.
 
이렇게 궁궐 안에 임금이 소박한 척(?)하며 서민스러운 집을 짓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바로 옆 창덕궁에 소박하게 양반집으로 지은 연경당이 있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사치로 유명했던 마리 앙트와네트도 베르사이유 궁전 안에 일부러 소박한 별장을 지어서 가서 놀고는 했다.
 


그러나 우리의 고종 임금은 단순히 펜션처럼 쓰려고 이 집을 지은 것이 아니었다. 주 목적은 왕과 왕비가 여유를 즐기기 위한 곳이긴 했어도 고종은 이곳을 자기 정치적 독립성을 상징하는 곳으로 삼으려 했다. 권력을 장악한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 정치를 벌이는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려했던 것이다. 
 
집의 구조는 왕의 공간인 ‘장안당’, 왕비의 공간인 ‘곤녕합’,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와 책창고로 쓰는 ‘관문각’을 지었다. 양반집의 사랑채-안채-서재 구성 그대로다. 


그 이름을 보자.

임금은 하늘이다. 그래서 이 궁의 이름은 ‘푸른 하늘’, 곧 건청궁이다. 왕비는 땅이다. 땅이 안녕하라고 왕비의 거처 이름은 ‘곤녕합’이다. 그 안에서 오래 오래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임금의 건물은 ‘장안당’으로 정했다. 이 좋은 뜻을 담아 아름답게 지은 이 건물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마당이 나온다. 왼쪽이 왕의 공간 장안당이다. 그리고 들어온 방향쪽으로 작은 문이 있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아담하고 멋진 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곳이 바로 을미사변의 현장이었던 곤녕합이다.
 


작전명: 여우사냥 -1895년 10월8일 조선 역사 최악의 사건이 벌어지다


1895년 10월8일 새벽,일본의 낭인들이 몰래 경복궁에 들어온다. 근정전 담을 타고 넘은 이 날도적들은 건청궁까지 단숨에 달려 바로 이 곳 곤녕합으로 뛰어들어왔다. 
 


칼을 들이대는 불한당들에게 궁녀들은 왕비가 없다고 거짓말을 하며 둘러댔다. 마침 일이 터진 것을 알게된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이 현장에 뛰어들어 궁녀들과 일본인 사이에서 항복한다는 의미로 팔을 들어 만행을 제지하려 했다. 그러자 한 일본인이 칼을 휘둘러 그의 두 팔을 그자리에서 잘라버렸다. 


그리고 곤녕합 옆으로 이어지는 옥호루, 바로 저 위 사진에 나오는 건물에 숨어있던 왕비를 찾아냈다. 한 일본인이 왕비를 넘어뜨리고 발로 짓밟은 뒤 칼로 왕비의 가슴을 그대로 찍어버렸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여걸은 마흔다섯이란 나이에 이렇게 뜻밖의 처참하고 치욕스런 죽음을 당한다.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왕비의 주검을 건청군 바로 뒤 언덕 녹산으로 끌고갔다. 그리고 기름을 뿌리고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다른 나라 왕비를 이런 식으로 죽이는 일은 실로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만행이었다. 

이게 바로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이란 건조한 한자말로는 저 사건의 처참함과 처절함과 끔찍함과 역사적 수치심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한국 역사상 가장 수모스러운 사건이 벌어졌던 저 곤녕합 건물은 결코 한국인들이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 일본이 저질럿던 추학한 짓거리는 여기서도 그치지 않는다. 한 나라의 국모를 난도질해 죽이고 불태운 이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 처벌을 받지 않고 석방된다. 그 이유가 기막히다. “왕비를 살해한 것은 인정되나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 사건을 뭉개버리려던 일본은 국제사회의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자 각본상의 재판을 했고 저따위 판결을 내렸다.
명성황후의 시해는 단순히 물리적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저 판결로 국모를 두번 죽인 것까지다. 그리고 여기서도 그치지 않는다. 일본은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고, 그래서 그 진상이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왕비를 죽인 것, 죽인 자들을 풀어 모멸한 것, 그런 역사를 숨긴 것, 이 모두가 을미사변이다.

당시 이 사건을 이끈 이는 미우라 고로라는 작자로, 일본군 중장으로 조선공사로 와서 이 짓을 저질렀다. 그를 불러들인 이가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둘은 미우라 고로에게 ‘여우사냥’ 작전을 지시했다. 여우가 바로 왕비 민씨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 일본을 경계하며 친러시아 정책을 펴던 왕비를 제거해야만 조선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본 일본이 의도적으로 살해 작전을 짠 것이다.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한 의문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시해 장소가 어디냐는 것이다.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을미사변 두 달 뒤 당시 일본 영사가 본국에 제출한 보고서를 근거로 시해 장소가 옥호루 안이 아니라 그 앞마당이라고 새로운 견해를 제기했다.
 
어차피 시해당한 것, 실내가 아니라 바깥에서 죽은 것이 무슨 차이냐 싶겠지만 사건 성격이 훨씬 더 극악해지고 명확해지는 변화가 올 수 있다. 실내가 아니라 공개된 외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왕비를 죽였다는 것은 일본의 주장대로 암살이 아니라 궁궐을 점령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왕비가 능욕을 당했을 것이란 추정도 계속 떠돌고 있지만 여전히 밝혀진 바는 없다. 만약 왕국모가 능욕을 당했다면 그건 정말 치욕스런 일이다. 


이렇게 살해장소며 능욕여부 등 여러가지 의문들이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제가 주모자를 풀어주고 궁궐까지 없애며 흔적을 지운 탓이다. 이 민족의 치욕 미스터리를 풀어 일본에게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


시해의 현장을 없애라 - 철저하게 파괴된 건청궁이 복원되기까지


부인이 죽은 궁을 떠나 고종은 러시아대사관에 들어간다. 아관파천이다. 건청궁은 버려진 궁궐이 된다.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의 현장을 지워버린다. 1909년 건청궁은 지어진지 불과 30여년 만에 철거되고, 그 자리에 일본은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건립했다. 이 미술관은 광복 뒤 한국전통공예미술관으로 쓰였다. 1998년 마침내 철거됐고, 이후 한동안 이곳은 빈터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6년 건청궁 복원 공사가 끝난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07년 10월부터 하루 3번 제한관람을 해오다가 마침내 올해 1월24일부터 이 건청궁이 완전 개방됐다. 그러니 이 비운의 건물은 이렇게 오래 잊혀졌다가 최근에야 복원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의 현장이어서일까. 유독 옥호루 창문은 그 안을 들여다보고파서 사람들이 뚫어놓은 구멍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온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건청궁은 또한 ‘한국 전기의 발상지’다. 그 사실 역시 아주 작은 표지석만 남겨놔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미국에서 전등이란 것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고종에게 알렸고, 고종은 1887년 에디슨 전기회사에 공사를 맡겨 경복궁 향원정에 발전기를 설치하고 이 건청궁에 처음으로 전등을 달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전등이 불을 밝힌 것이었고, 이는 당시 일본이나 중국보다도 오히려 2년이나 빨랐다고 한다.

아픈 역사와 함께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겨야할 건물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지만, 건청궁은 아름답다. 그리고 다르다. 그래서 더욱 볼만한 곳이다.

명성황후의 건물 곤녕합 뒤에 있는 이건 뭘까?
 


바로 굴뚝이다. 우리 전통 한옥 건물의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가 바로 굴뚝인데, 경복궁은 이런 예쁜 굴뚝들이 잔뜩 모여있는 ‘굴뚝 문화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다.

경복궁 굴뚝의 간판스타는 뭐니뭐니해도 자경전 십장생 굴뚝이다. 하도 예뻐 보물 810호로 지정된 굴뚝계의 지존이다.
 


경복궁에서 저 자경전 굴뚝과 함께 봐둘만한 굴뚝으로는 수정전 굴뚝을 빼놓을 수 없다.
 


거의 건물만큼 높은 쌍동이 굴뚝이 건물 뒤에 우뚝 솟아있다. 저렇게 굴뚝이 높은 것은 굴뚝이 높을 수록 불길을 더 세게 할 수 있어서다. 우리 굴뚝은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지고, 북쪽으로 갈수록 높아진다. 그래도 저렇게 높은 굴뚝은 쉽게 보기 어렵다.

다시 건청궁을 보자. 건청궁은 그 입구 디자인의 핵심이 굴뚝일 정도다. 뭐가 굴뚝인지 이젠 쉽게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저 전면부 벽돌 기둥이 이어져 지붕 위로 튀어나온 것들이 모두 굴뚝이다. 굴뚝이 전통 건축에서 얼마나 중요한 디자인 요소인지 잘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자, 그러면 이제 왕의 공간인 장안당으로 넘어가보자. 이 건청궁의 중심 공간이다.
 


장안당은 정말 잘 생긴 건물이다. 사랑채 건물의 위용과 멋이 절로 느껴진다. 특히 지붕선이 화려해서 웅장하면서도 날아갈듯 호방한 우리 기와집 건물의 매력을 흠뻑 느껴볼 수 있다.
 


아직까지 나무 색이 밝아 다른 건물들과 느낌이 좀 다르지만 그래도 그 위용은 대단하다. 저 지붕이 멋진 건물은 장안당에 이어지는 누각인 추수부용루다. 
 
그러면 이제 양반집 저택의 3대 요소인 사랑채(장안당)와 안채(곤녕합) 다음의 서재를 볼 차례다. 건청궁에서 서재에 해당하는 건물의 이름은 관문각이다.
 


관문각은 정말 긴 건물이다. 그리고 딱 보면 이 건물이 책을 보관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저렇게 나무 판으로 창문 없이 막아놓은 건물은 대부분 책을 보관하는 건물이라고 보면 된다. 저 관문각까지 보면 건청궁 구경은 끝이다.

앞서 말했듯, 이 건청궁과 바로 옆 태원전, 함화당과 집경당 등은 모두 올해 1월 새로 개방된 경복궁의 중요한 전각들이다. 그러니까 아직 싱싱하고 따끈한 곳들이 경복궁 북쪽에 잔뜩 있다는 이야기다.
 

경복궁 배치도. 향원정 뒤 빨간 테두리 친 곳이 건청궁이다. 그 왼쪽 너른 숲 뒤 있는 건물들이 태원전과 함화당, 집경당이다.  


 

경복궁 관람, 이젠 코스를 바꿔보시면 어떨까요?

 
경복궁에 가기로 했다면 이 새로운 볼거리들을 찾아 관람 코스를 한번 바꿔보길 권한다.
  
보통 경복궁 관람은 광화문 옆 동십자각 쪽에서 들어와 쭉 위로 올라가 향원정까지 돌아보고 다시 들어온 쪽으로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지 말고 향원정에서 바로 뒤 건청궁과 태원전, 함화당 등을 보고 아예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으로 한번 가보면 어떨까.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은 개방된 지 제법 되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어서 그 자체로 볼 만한 구경거리다. 정 반대로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에 들어와 태원전과 집경당, 건청궁부터 보고 광화문쪽으로 내려가는 것도 가능하다. 신무문쪽에도 매표소가 따로 있어 출입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광화문쪽에서 신무문으로 가는 코스를 먼저 해보기를 권한다. 신무문 밖으로 나가면 또다른 산책 코스가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건청궁을 떠나 신무문으로 향해보자. 저 멀리 신무문이 보인다.


이 것이 바로 경복궁의 북문, 조선시대에도 항상 문을 여닫는 것이 엄격하게 관리되어 거의 닫혀있었던 비밀의 문 신무문이다. 
 


이제 신무문에 이르렀으니 뒤돌아 경복궁에 작별 인사를 하자.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자. 신무문을 상징하는 동물이 보일 것이다. 동양사상에서 북쪽을 상징하는 동물은 현무, 거북이다. 북문인 신무문이니 당연히 거북이를 그려놓았다.
 
그리고 경복궁을 나와 앞을 보면, 이 코스의 장점인 새로운 볼거리와 만날 수 있다. 
 


이 신무문은 청와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이 앞쪽에 길이 뚫렸고, 그래서 오랫동안 닫혀있었던 금단의 문 신무문도 이렇게 시민들이 드나드는 경복궁의 새 출입구로 바뀌었다. 그래서 청와대 앞길을 천천히 구경한 뒤 이 신무문으로 와서 들어가도 된다. 

그런데 이 신무문 코스의 장점인 저 추가적 볼거리인 청와대는 요즘에는 ‘못볼거리’가 되어버려 많은 분들께 심리적 부작용을 일으킬까 걱정된다. 기껏 아름다운 경복궁 잘 보고, 슬픈 건청궁에서 역사를 배우고,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이 신무문으로 나왔는데 하필 청와대가 눈 앞에 펼쳐져서 좋았던 기분 잡치게 하느냐는 항의를 받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이 코스를 잡을 때는 이 부작용을 반드시 숙지하시고 가시기를. 열받지만 청와대 앞을 지나겠다고 정하면 통의동 길로 내려가는 길이 산책하기 딱 좋아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