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삼삼한 전통건축] 청와대 앞 ‘왕따문’에서 전두환의 기억을 떠올리다 2009/05/27

딸기21 2019. 7. 2. 18:17

빛나리 대통령 또 나간단다, 깃발 흔들어라
 
지금에야 이런 풍경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고 들어오면 대통령 지나가는 길가에 중고등학생들이 줄지어서서 깃발을 흔들었다. 외국 대통령이 한국에 오면 훨씬 더 많은 동원되어 ‘환영하는 척’을 해야 했다.
 
청와대 주변에 있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유독 많이 겪어야 했던 군사독재 시절의 풍경이다. 동원 당하는 학생들로선 짜증 제대로였던 이 짓거리는 70년대 박정희 시대보다 80년대 전두환 시대에 더 극성스러웠다. 사람 죽여가며 쿠데타로 집권한 정통성 빵점짜리 정권이니 자격지심에 오히려 더 대통령 권위 세우기를 좋아했고, 또 그래서 외국 국가원수들을 참 자주도 불러들였다. 여기에 세계 외교판에서 북한과 경쟁을 심하게 벌이던 때여서 더욱 그랬다. 
덕분에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원수들이 자주 한국에 왔고, 당시 청와대 옆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던 나는 무척이나 자주 깃발을 흔들러 다녔다는 이야기.
 

여전히 꿋꿋하게 폼잡고 다니는 땡전 전두환. 별호는 29만원. 29만원 밖에 없는 살림에 돈 들여가며 노무현 전대통령 빈소에 돈들여 화환을 보냈건만 우매한 민중들이 감히 화환을 짓밟았다고 속으로 노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중학교 구역은 주로 종로1가 농협 건물 앞이거나 또는 통의동 길이었다. 경복궁을 마주 봤을 때 왼쪽, 그러니까 경복궁 서쪽 담장길이다. 요즘에는 진명길이라 부르던데, 이곳에 있던 진명여중고가 옮겨갔는데 이름은 그대로 남은 모양이다.
 
그러면 지겹고 짜증나는 깃발 흔들기 나가는 척 하고 시내에서 도망가면 되잖겠냐, 그러겠지만 당연히 출석을 불러서 도망도 못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들도 무척 귀찮으셨을 듯하다. 결국 우리 남자 중학생들의 유일한 낙은 깃발 흔들러 나가면 진명 여학생들을 훔쳐보는 것 뿐이었다.

이쯤에서 깃발을 흔들었다. 경복궁의 장중한 돌담이 매력적인 이 길은 요즘 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뜨고 있다. 국가 중심의 상징적 거리라 보도블록과 꽃을 심은 폼새부터 다르다. 


좌우지간 그래서 통의동 쯤에서 깃발을 열심히 흔들었는데, 이 통의동 길이 지금이야 삼청동의 뒤를 이어 떠오르는 문화 향기 물씬나는 데이트 코스로 각광 받지만 당시는 정말 다니는 사람이라곤 없는 무서운 길이었다. 몇 십미터 간격으로 경호원들이 줄지어 서서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지키고 있는 길이어서 이 길로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깃발을 흔들러 갈 때에나 가보는 이 길에서 처음으로 영추문을 보게 되었다. 바로 이 문이다.
 


사람들은 경복궁의 문이라고 하면 광화문부터 떠올린다. 아니, 광화문만 떠올리게 된다. 당연하다. 광화문이 정문이니까.
그러나 경복궁에는 제법 문이 많다. 광화문 안에도 큰 문들이 있다. 근정문과 사정문이 있다. 그리고 경복궁 같은 궁궐들은 원래 문에 4개는 만든다. 동서남북으로 해서 남쪽이 정문이고 나머지 3개 작은 문들이 있다. 동쪽은 건춘문, 서쪽은 이 영추문, 그리고 북쪽은 신무문이다. 이 세문은 모두 규모와 생김새가 비슷하다.
 
얼마전 모처럼 이 영추문 길을 걸었다. 얼마만에 본 영추문인가. 이 길을 얼마만에 걷는 것인가. 잠시 상념에 빠졌다. 어린 시절 살았고 학교를 다녔던 동네이건만 나이 들어 멀리 떠난 뒤로는 살기에 바빠 잊고 살았다. 저 영추문의 존재조차도 잊었다. 
 


다시 본 영추문은 여전했다. 듬직해보였다. 광화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단순한 문이지만, 뜯어보면 자알 생겼다. 담장과 그대로 이어지면서 중간에 우뚝 솟은 간결하고 힘있는 기법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운치가 있다.
 
그 이름은 또 어떤가? 영추, 가을을 맞는 문이다. 
영추문과 커플을 이루는 문이 반대편 건춘문이다. 건춘, 봄이 시작하는 문이다. 이 문이다.


궁궐 건물들은 그 이름들이 시적이다. 경복궁의 이 동문과 서문을 보라. 봄을 세우고, 가을을 맞는 이름이 대구를 이룬다. 물론 오행사상에 따라 지은 것이긴 하다. 동서남북이 봄여름가을겨울과 짝을 이루니 서문에 가을 추자가 들어간 거다. 그래도 정말 서정적이지 않은가.
 
저 영추문과 건춘문은 현판만 없다면 쌍동이처럼 닮아서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사진만 봐도 구분하는 법이 있다. 영추문은 보안관리상 문을 거의 여는 법이 없다. 건춘문이 있는 경복궁 동쪽 담장길은 경복궁을 드나드는 방문객들이 대부분 이쪽으로 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한 길이다. 삼청동길 가는 사람들도 이 문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건춘문도 시민들과 제법 친숙한 편이다. 
 
하지만 영추문은 그렇지 못했다. 조선시대 문무 백관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문이었지만, 이후 이 문은 ‘잊혀진 문’이 되어버리고 만다. 

영추문 위 누각 부분. 옆으로 경회루가 살짝 보인다. 

  
그럼 북문인 신무문은? 이 문은 임금이 어쩌다 지나다닐 때만 여는 엄격하게 통제되는 문이었다. 문 바깥에 청와대가 들어선 뒤로는 완전히 닫힌 문이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청와대 앞에 광장이 조성되고 관광코스로 이 부근이 개방되면서 신무문도 사람들과 다시 만났다. 청와대쪽에 경복궁 매표소가 생겨 이 문쪽으로도 경복궁으로 들어올 수 있다. 광화문으로 경복궁에 들어가 신무문으로 효자동쪽으로 나가는 관람이 가능해진 것이다.
 
신무문도 열렸는데 우리의 이 영추문은 여전히 닫혀있다. 경복궁의 네 문 가운데 유일하다. 
뭐 꼭 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만 닫혀서 있는 모습이,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좀 아쉽다. 물론 그 덕에 이 길이 이리도 호젓하고 분위기 있어 좋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저 영추문을 왕따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히 경복궁 4문 중에서 저 문만 닫혀 있어서만은 아니다. 저 문의 기구한 팔자와 운명에 얽힌 또다른 이유가 있다.

잠깐 설명하자면, 경복궁 4개 문 중에서 고종 때 대원군이 중건했을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는 문은 절반뿐인 건춘문과 신무문이다. 광화문과 영추문은 원래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광화문을 보자. 광화문의 역사는 그 자체로 치욕과 불운, 그리고 문화재 수난의 역사다. 그래서 우리는 광화문의 역사를 꼭 알아야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하며 광화문도 웅장하게 세웠지만 광화문의 영화는 아주 잠깐이었다. 나라가 망하면서 조선을 강탈한 일본은 경복궁을 무자비하게 헐어버리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어 경복궁을 가로막았다. 이 때 총독부 건물 짓는다며 광화문을 동쪽으로 밀어버렸다.


자리에서 밀려난 것도 서러운데 한국전쟁때는 돌 문 위의 나무 누각 부분이 불타버리고 만다. 이 처참해진 광화문이 제 자리로 돌아간 것은 1960년대가 되어서였다.
 
그런데 이 당시 광화문 복원이 이후 두고두고 문화재계의 비판과 욕을 먹은 졸속 문화재 복원의 대명사가 된다. 누각 부분을 나무로 안짓고 어처구니 없이 콘크리트로 지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번 광화문 복원공사를 위해 해체된 콘크리트 광화문의 부재들. 


나무가 없었을까? 그럴 리 없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우리나라도 시멘트를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그 자랑스러운 발전을 널리 알리자고 콘크리트 복원을 원했던 것이다. 군사 독재는 그 모든 것이 재앙이었지만 문화와 문화재에 관해서는 더욱 심했다. 고가도로 지어야 한다고 독립문을 옮기면서 안에 들어가는 벽돌을 원래 돌벽돌이 아니라 빨강벽돌로 한 것도 있지만 이 광화문 복원에 견주면 그건 만행도 아닌 수준이다.


좌우지간 이 때 콘크리트로 황당 복원했고, 그 김에 현판도 덩달아 바뀌었다. 박정희 친필 현판이 이 때 걸린다.
 
당시 복원은 또다른 문제도 남겼다. 광화문을 원래 자리로 옮겼지만 그 때까지 남아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에 각도를 맞추는 바람에 경복궁의 중심축과 5도 가량 비뚤어져 버렸다.


일제가 지은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안에 세웠지만 그 각도를 경복궁 중심축에 맞추지 않고 남산에 지은 일본 신사 조선신궁에 맞췄다. 그 선에 맞춰 광화문도 비뚤어졌으니, 비판이 없을리 없었다. 그러나 친일파출신 군사독재 정권이 그런 것에 신경이나 쓸 리 없었고, 결국 군사독재까 끝난 뒤에 시작된 이번 광화문 및 경복궁 복원에서 광화문은 제 각도로 돌아가며, 그 건물도 나무로 법식에 맞게 지어지게 됐다. 지금 하는 공사가 바로 이 공사다.
 


그러면 영추문은 또 무슨 팔자가 있는 것일까?
영추문은 1920년대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경성에 전차가 다니게 되면서 영추문 쪽에 전찻길을 놨는데, 이걸 너무 문에 가깝게 공사하는 바람에 무너졌다고 한다. 황당 그 자체다. 그리고 박정희 때에 이 영추문도 광화문처럼 콘크리트 건물로 재건됐다. 역시 돌 윗부분을 나무가 아니라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것이다. 광화문은 그나마 간판 건물이어서 복원이라도 되고 있지만 이 영추문은 유명하지도 않으니 복원한다는 계획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개발독재기 황당 문화재 복원의 상처를 홀로 간직하고 남아있는 문이 바로 영추문인 것이다.
 

영추문 붕괴 당시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사진. 순종이 승하해 무너졌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저 영추문은 비록 잘 생기고 웅장하지만 제대로 된 전통 건축물은 아니다. 그 시대의 야만이 남긴 숨은 상처다. 그래서 저 통의동 길을 거닐며 바라보게 되는 영추문은 반갑지만 안타깝고 슬퍼 보인다. 


서울 통의동길은 문화지대로 인기 높아지면서 20세기 이후 처음으로 활기를 갖게 됐다. 권력의 중심부 경호원과 사복 경찰이 삼엄하게 경비하던 길은 시민들이 즐겨찾는 나들이 코스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영추문은 제대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고 있다. 


저 길을 걷게 되면 예쁘고 운치있는 분위기를 흠뻑 즐기되, 헛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비운의 문에 대해서도 기억해두자. 그리고 학생들을 동원해 깃발을 흔들어야만 했던 전두환도.


그런데 그 전두환은 사라졌는데 서울 도심 경찰버스는 돌아왔다. 요즘 들어 역사가 거꾸로 가나 헷갈리게 된다. 영추문 근처 청와대 사시는 분은 바뀌었는데, 왜 경복궁 부근에선 전두환 시절의 냄새가 솔솔 풍기는 듯 할까?
 

뱀다리1-신무문은 자금성에도 있다
 
경복궁 북문 신무문처럼 자금성의 북문도 이름이 신무문이다. 한자도 같다. 그럼 정문은? 우리 경복궁은 광화문이지만 자금성은 오문이다. 동서쪽 문은 동화문, 서화문이다. 영추문, 건춘문만한 시적 뉘앙스는 없다. 경복궁이 크기는 작아도 문 이름의 운치는 더 나은 듯하다.
 
뱀다리2-외국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온나라가 쉰 적도 있었다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힘들 정도로 난리법석을 치렀던 국빈 맞이 해프닝이 있었다.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 방한 때의 일이다. 지금이야 미국을 비판적으로 보지만 당시만해도 미국은 은인의 나라, 아버지 같은 나라, 섬겨야할 나라로 온국민이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위대한 미국 대통령이 오신다니 실로 거국적인 환영행사를 기획한다.


정부가 짠 환영인원은 학생 100만, 시민 155만, 공무원 20만 등 모두 275만명이었다고 당시 기록은 전하고 있다. 김포공항부터 청와대까지 사람으로 길을 만든 셈이다. 존슨은 월요일에 한국에 왔는데, 이날 오후는 학교 관청 은행 회사를 모두 임시 휴무하기로 국무회의에서 정했다고 한다. 275만명! 집계는 없지만 최소 200만명은 환영인파로 동원됐던 것은 분명하다고 당시 서울시 관계자는 훗날 기록했다. 1966년 서울의 총 인구가 350만명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도 놀랄 만한 역사를 지닌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뱀다리3-정취 좋은 영추문길, 정처없이 그냥 거닐어 보자
 
영추문 앞 통의동길은 도심에서 잠깐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평일에는 사람도 없어 더욱 좋다. 청와대 가는 길이어서 신경써서 길을 꾸몄고, 좋은 카페와 식당도 제법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