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일본 건축가가 한국에 남긴 퀴즈 같은 건물 2009/06/11

딸기21 2019. 12. 3. 21:41

# 뭐냐, 이 당황스러운 건물은
 
서울 홍대 주차장 골목에 독특한, 그래서 이 동네서 나름 유명한 건물이 하나 있다.
일명 `두부 한 모 빌딩'.
네모 상자 모양 시멘트 빌딩이다.
희한하게 건물 외벽으로는 창문 하나 없고, 안쪽으로 중간 공간을 내서 창문을 다는 것이 디자인의 컨셉이었던 모양이다.
 
한국 현대건축의 경연장이랄 수도 있는 파주 출판도시에도 이와 비슷한 빌딩이 있다.
건물 껍데기에 아무런 장식은 커녕 디자인적 요소를 넣지 않은 것이 디자인인 건물이다.
이 건물, 동녘출판사 사옥이다.
 

파주 동녘출판사 건물. 왼쪽 같은 색깔 시멘트 건물은 안그라픽스건물이다.


파주 출판도시에서 이 동녘 건물이 있는 부근은 주변 건물들도 모두 시멘트 빛으로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건축 코디네이션이었다. 바로 옆 안그라픽스건물이며 앞 뒤 건물들이 모두 콘크리트의 물성을 강조하는 디자인들이다.

하지만 시멘트 자체로 승부한 주변 건물들 중에서도 이 건물처럼 미니멀함을 추구한 건물은 없다. 모든 것을 덜어내 재료 자체와 최소한의 형태만 남은 건물이다.

 

옆에서 본 모습. 시멘트 그 자체만을 추구한 듯한 과감한 결정이 인상적이다. 그 결과가 어떻든 간이 큰 건축가만 가능한 결정일 것이다.


동녘출판사는 건축 전문 출판사이기도 한데, 그 건물 역시 무지하게 건축적이라고 하겠다.
작가는 일본의 세계적 유명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다.
 
최근에야 이 건물을 비로소 보게되었다. 파주에 들른 김에 한바퀴 돌아보고 왔다.
시멘트란 소재가 건축가에겐 정말 수많은 질문과 과제를 던지는 소재일텐데,
세지마는 시멘트 그 자체 속에 풍덩 뛰어드는 듯한 방법을 골랐다.
 
오로지 시멘트뿐, 그리고 최소화한 창문들뿐.
건물 내부에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반전을 주는 것도 아니다. 건물의 내부도 외부와 똑 같다. 다양한 것들이 어우러지는 교향곡이 아니라 오로지 맨살 콘크리트만의 독주곡같은 건물이다. 개인적으로는 역시 과격한 천장의 처리가 인상적이었다.

 

허탈할 정도로 단순한 입구. 설마 정문 맞나 싶어 건물을 한바퀴 돌아야했을 정도다.


분명 실험적이고, 그런 디자인 방향이란 건축가라면 한 번 시도해볼 법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세다. 진정 추상성만 남은 듯한 건물이다.
건물이란게 살다보면 의외로 무감각해지는 것이라 해도 이건 좀 지나치게 세다.

 

저 건물을 좋아할 사람은 싫어할 사람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저 건물을 보고 사람들이 떠올릴 법한 단어는 아마도 무미건조가 아닐까. 만약 내게 건물을 고를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저런 스타일은 거의 최후에 고를 것 같다.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작가가 그걸 몰랐을리 없기 때문이다.
 
세지마가 누구인가? 이런 독특한 건물로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건축가 아닌가.

어둡고 칙칙한 거리에 새하얀 상자처럼 등장한 이 건물, 그 서늘한 듯 시원하며 간단한듯 복잡한 느낌이 얼마나 새로웠던가.

 



물론 그의 건물들은 극도로 단순했으며, 또한 극단적인 네모 상자모양이긴했다. 바로 이 건물처럼 말이다.
 


그래도 좋았다. 특히 아래 사진의 파출소 건물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비록 가보진 못했지만, 사진만으로도 세지마란 건축가를 좋아하기에 충분했다.

도쿄 초부 파출소 건물. 상큼하지 않은가? 이렇게 단순하게 하는 용기는 디자이너로서 쉽지 않다. 뻔뻔할 정도로 단순한데 그러면서도 과하지 않고, 아무것도 넣지 않은 것 같은데 가득찬 느낌이다.


그러니 세지마란 건축가의 작품이 출판도시에 들어설 때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다. 그리고 저 동녘 건물이 선보였다.
예상 이상이든 아니면 예상 이하든 사람 놀라게 만드는 건물이었다. 논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했다.
파주 출판도시는 특히 전체 컨셉을 전축 위원회에서 정하고, 개별 건물을 설계하는 건축가들은 그 큰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세지마의 안은 건축가가 전체 건축 컨셉에 저항하는 듯한 디자인을 선보인 것이어서 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누가 내게 저 건물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당황하게 되는 건물이예요."
직접 마주하니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무척.
니들 내가 내는 문제 한번 풀어볼래, 라고 째려보는 스핑크스같은 건물이랄까. 문제는 그 질문이 뭔지를 모르겠다는 거다.

 


건축이란 참 어려운 거다. 그냥 사람 사는 집의 하나려니 하면 더 없이 간단한 것인데, 건축적 의미가 들어가면 아무리 들여다봐도 잘 모를 부분들이 있다.

이 건물이 묘했던 점은 마치 상상력이란 것을 일체 거부하고 그 어떤 근본적인 고갱이만 시도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렇게 여러가지 가늠하기 전에 도대체 이 건물에 대해 뭐라 평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게 뭐야, 라고 하기엔 뭔가 있어보이는 듯도 하고
뭔가 있어, 하기엔 좀 어처구니 없어보이고...
분명한 것은 이렇게 과격한 건물은 드물다는 것.

세지마에게 이 궁금함을 물어볼 기회가 올지 모르겠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들.


동녘 뒷쪽 효형출판 건물. 책을 꽂은 서가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서현 교수 작품.

 


동녘출판사의 짝패인 안그라픽스 건물. 거의 같은 노출콘크리트 건물인데, 표면에 철심이 튀어나와 그림자가 장식 효과를 만들어낸다.  동녘 건물에서 내려다본 이 건물 딸림 별관의 독특한 천장 모습.

 


이 두 시멘트 덩어리가 건물 사이 골목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