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숨어있는 첨단 거대산업 면도기의 2007/03/10

딸기21 2018. 6. 6. 19:56

단돈 100달러로 주식투자를 시작해 40조원의 재산을 모은 사나이, 세계 최고의 ‘투자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일생 동안 가장 성공했던 투자는 어떤 업종에 투자한 것이었을까? 

힌트 하나. 금융주나 기술주가 아니라 제조업체의 주식이었다. 결정적 힌트 하나 더. 버핏은 이런 말을 한 바 있다. 매일 밤 사이 전세계 남성들의 수염이 자랄 것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고. 


버핏이 최고의 수익을 거둔 업종은 바로 ‘면도기’였다. 세계 최대의 면도기업체인 질레트에 투자했던 것이다. 버핏의 투자철학인 이른바 ‘가치투자’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질레트 투자건이다. 가치투자란 1~2년 사이의 시세차익을 노리지 않고 기업의 본질적 가치를 중시해 우량기업의 주식을 사서 끝까지 보유하는 투자방식이다.


버핏은 1989년 6억달러를 쏟아부어 질레트 주식의 10%를 사들였다. 이후 버핏은 한번도 이 주식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고 절대 안팔았다. 그리고 2005년 10월, 세계최대의 생활용품업체인 프록터앤갬블(피앤지·P&G)가 질레트를 인수하면서 질레트 주식가치는 크게 올랐고 버핏은 대박을 터뜨렸다. 2006년 3월4일 버핏이 운영하는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는 지난해 피앤지가 질레트를 인수하면서 얻은 순이익만 무려 32억5000만달러(우리돈 3조원 이상)이라고 실적을 발표했다. 17년 동안 믿음으로 투자한 뚝심이 가져다 준 보상이다. 



어떻게 면도기가 이런 대박을 터뜨리게 해주었을까? 버핏은 왜 첨단 반도체 업체나 고수익 펀드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흔한 일상용품인 면도기업체에 투자했던 것일까? 그 비밀은 면도기란 상품의 특성, 그리고 면도기 산업의 특성 속에 있다.


면도기는, 일반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산업적으로 기술개발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첨단제품이다. 그리고 예상 이상으로 제품개발과 마케팅에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기 때문에 새로운 경쟁자가 시장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아 두세개 기업이 독점하는 황금시장이다. 버핏은 이런 본질을 꿰뚫어본 것이다.


필립스 전자제품 중 최고 효자


면도기는 습식과 건식 두가지로 나뉜다. 습식은 면도용 거품을 묻혀 수염을 깎는 날면도기들이고, 건식은 쉽게 말해 전기면도기들이다. 건식보다는 습식 면도가 더 일반적이어서, 세계 남성들의 70%가 습식면도를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공통점은 이 두 방식 모두 세계적으로 2~3개 ‘공룡기업’들이 사실상 독점 지배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아침밥은 못먹어도 수염은 깎고 출근해야 하는 전세계 20억명 이상의 성인 남성들이 바로 이들 면도기 공룡들의 노다지가 된다. 습식 시장은 질레트와 쉬크가 양분하고 있고, 건식에서는 필립스와 브라운 그리고 일본 파나소닉이 3파전을 벌이고 있다. 질레트는 습식 시장에서는 확고부동한 최강이고, 건식 전기면도기 시장에서는 ‘브라운’브랜드로 최강 필립스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면도기는 숨어있는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건식을 보자. 전기면도기는 생활소형가전이지만 실제 수익성은 대형 백색가전제품들보다 훨씬 낫다. 전기면도기는 크기 대비 가격이 아주 비싼 전자제품이다. 선두업체 필립스가 최근 선보인 최고급 신제품은 소비자가격이 처음으로 40만원선을 넘어섰다. 브라운의 신제품 ‘360도 컴플리트’도 30만원대 중후반이다. 30만원대면 드럼세탁기가 아닌 일반세탁기 10㎏급보다도 비싸다. 부가가치는? 수출용 컨테이너를 각각 조그만 전기면도기와 큼직한 세탁기로 채워 판다고 가정해보라. 어떤 것이 남는 장사인지를. 1위 필립스의 경우 면도기의 이익률은 비밀이지만 반도체부터 토스터기까지 필립스가 파는 전자제품 가운데 ‘가장 수익성 높은 것 가운데 하나’라고만 밝힌다.


습식 날면도기도 수익성이 만만치 않다. 면도기 자체는 몇천원, 가장 비싸야 1만원 정도지만 이후 날을 추가로 팔 수가 있다. 면도방식을 바꾸거나 다른 업체것으로 바꾸지 않는한 소모품 판매가 수익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다른 제품들과 달리 한번 메이저가 되면 이런 고수익이 유지되는 것이야말로 면도기 시장이 황금시장인 이유다. 이는 면도기가 소비자들의 충성도가 가장 높은 제품이기 때문이다.


날면도기 소모품 덕 안정수익


한번 면도방식을 고르고 나면 남성들이 습식에서 건식으로 또는 그 반대로 면도방식을 바꾸는 경우는 매우 적다. 전기면도기를 쓰는 경우에도 제조업체를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한번 한 회사 제품에 익숙해지면 계속 그 회사를 찾는다. 첫번째 이유는 면도방식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일반적으로 면도방식을 바꾸거나 면도기를 다른 회사것으로 바꿀 경우 피부가 새 면도방식에 익숙해지는데는 3주 이상 걸린다. 두번째 이유는 면도기가 개인적 유대가 강한 제품이기 때문이다. 전자제품 가운데 유일하게 매일 자기 살갗에 직접 대는 제품이 전기면도기이다. 그만큼 개인적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물건이고, 그래서 더욱 맘에 드는 회사 제품을 선호하게 된다. 전자업계에서는 전자제품 가운데 가장 충성도가 강한 전자제품으로 전기면도기를 꼽는다.


이같은 특성 때문에 메이저들은 엄청난 투자와 마케팅으로 조금이라도 더 충성도 높은 소비자를 늘이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특히 습식 면도기 시장에서 질레트와 쉬크가 벌이는 ‘면도날 숫자 경쟁’은 유명하다.


1901년 미국의 회사원 질레트가 얼굴을 베지 않는 안전면도기를 개발해 질레트란 기업을 세운 이래 습식 면도기는 오랫동안 외날이었다. 이후 70년대에 이르러서야 2날로 바뀌었고, 99년 질레트가 최초의 3중날 면도기 ‘마하3’를 개발해 대히트를 치면서 3날 시대가 열렸다. 지금까지도 질레트의 주력인 마하3는 제품 개발에 10년, 연구개발과 마케팅에 모두 7억5000만달러(7000억원 가량)을 쏟아부어 만들어낸 ‘블록버스터’다. 그러나 4날 면도기는 쉬크가 앞섰다. 2003년 쉬크가 최초의 4중날 면도기 ‘쿼트로’를 선보이면서 면도날 전쟁에 불을 붙였다. 다음은 당연히 5날 차례. 질레트는 다시 지난해 5중날 면도기인 ‘퓨전’을 개발해 올해 초 미국시장에 출시했다.


투자비용이 막대한 탓에 이 시장에 후발주자가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건식이든 습식이든 면도기 시장은 글로벌기업인 필립스·브라운·파나소닉과 질레트·쉬크가 고급제품을 석권해버렸고, 현지 업체들은 나머지 저가나 1회용 면도기 시장을 간신히 나눠먹는 구조가 됐다. 이런 구도 속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건식에서는 조아스전자가, 습식에서는 도루코가 꿋꿋이 살아남아 버티고 있다.


면도기 산업은 면도기가 ‘남성용품 시장’에서 다른 남성용 미용상품 소비로 유도하는 진입상품이 된다는 점에서 최근들어 그 산업적 가치가 점점 커지고 있다. 1400억달러에 이르는 전세계 미용성 소비재 시장에서 남성용 소비재의 비중은 160억달러로 아직 14% 정도지만, 그 성장세는 무척 가파르다. ‘여성에 대한 모든 것을 아는 기업’으로 평가받는 피앤지가 ‘남성에 대한 모든 것을 아는’ 질레트를 인수한 것이 그런 이유에서였다.


건식+습식 새제품 ‘영토 확장’


21세기로 들어서면서 면도기는 새로운 진화를 모색하고 있다. 면도기란 것이 만들어진 지난 20세기 100여년 동안 건식과 습식이란 두 가지 방식은 철저하게 양분되어 따로 존재했는데, 이제 그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필립스가 지난 1998년 생활용품업체 니베아와 손잡고 출시한 ‘쿨 스킨’은 전기면도기면서도 면도할 때 면도용 크림을 피부에 발라주어 습식면도 효과를 내는 제품이다. 처음에는 이색상품 정도였지만 점점 판매가 늘면서 일부 국가에서는 전체 필립스 전기면도기 판매량의 20%선까지 올라갔다. 습식에서는 건식 전기면도기처럼 전기로 진동하는 면도기가 등장했다. 질레트가 올해 국내에서도 출시한 ‘M3 파워’는 처음으로 진동 모터를 내장해 건식면도기처럼 면도하는 습식 면도기다. 습식에서는 건식같은, 건식에서는 습식같은 면도기를 내놓으며 서로를 닮아가고 있는 셈이다. 과연 반건반습 제3의 면도방식이 출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