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극장의 세계3-극장에 숨어있는 문화코드 읽기2 2007/03/19

딸기21 2018. 6. 6. 20:22

여기 베를린 시민들이 가장 자랑하고 사랑하는 극장이 있습니다.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전용극장인 베를린필하모닉콘서트홀(1956년 착공해 1963년 완공)입니다.


건축가 극장으로 혁명을 일으키다


베를린필하모닉콘서트홀은 그 겉모습만으로는 엄청나게 사람들을 매혹시키지는 않습니다. ‘어딘가 독특하고 무언가 있어보이는 건물’ 정도라는 느낌일겁니다. 



이 건물의 진정한 의미는 그 내부 공간에 담겨있습니다. 이 극장의 무대는 세계 극장건축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 사례’로 꼽힙니다. 왜 그럴까요? 자, 한번 무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극장은 특이하게도 무대가 공간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무대 주변을 객석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떠올리는 극장의 좌석배치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무대가 건물 맨 뒤쪽에 있고, 그 무대 앞으로 객석이 점점 높아지는 식이 전혀 아닙니다. 왜 이렇게 무대를 배치했을까요?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한스 샤로운(또는 샤룬이라고도 표기합니다)이란 사람입니다. 샤로운은 사람들이 음악을 듣게 될 때의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거리에서 어떤 악사가 연주를 시작했다고 합시다. 자연스럽게 그 악사의 주변을 동그랗게 사람들이 둘러싸고 음악을 듣게 됩니다. 바로 이 모습을 그대로 콘서트홀의 무대와 객석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인간이 음악을 듣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란 것이죠. 


샤로운이 이 아이디어를 냈을 때 반대가 만만찮았다고 합니다. 워낙 파격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가 채택되도록 지지한 사람이 바로 베를린필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습니다. 카라얀은 이런 배치가 음향적으로도 우수하며 관객들이 쉬지 않고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옹호했습니다. 가장 권위적인 지휘자로 꼽히는 카라얀이 이처럼 개방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점도 이색적입니다. 


이 샤로운의 무대 배치가 새로운 것은 물론 기존 극장의 좌석배치가 정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극장의 배치는 현대사회에 이룩한 ‘민주화’의 가치와도 연결된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값이 달랐던 시절, 모든 것은 계급대로였습니다. 민주정치가 자리잡은 20세기 이전에도 극장 자체야 귀족부터 시민계급까지 여러 계급이 이용하는 곳이었지만 그 자리배치는 철저하게 계급적이었습니다. 무대 가장 앞에는 당연히 왕이나 귀족같은 지배계급의 자리였고, 그 다음에는 순서대로 앉았습니다. 이런 관행은 20세기 들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신 티켓값에 따라 그 순위가 정해지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연주자들이 나오는 무대와의 거리는 그 사람의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를린필 콘서트홀은 무대를 둘러싸게 좌석을 배치함으로써 그동안 지위와 재력이 높을 수록 무대와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던 위계적 구조에 저항했고, 결국 보다 민주적으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실제 베를린필 콘서트홀은 어떤 좌석도 무대로부터 거리가 가시거리 한계인 32미터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든 극장이 이처럼 시민 지향적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극장은 그 속성상 정치적인 건물이 되기 쉽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은 언제나 스스로를 기념합니다. 거대한 기념탑을 만들고, 기념 건축물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런 기념 건축물로 극장을 선호합니다. 문화와 예술이란 그럴듯한 명분에 건축적으로 과감한 시도가 가능한 극장 건물의 속성이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자국이나 지역을 대표할 극장이니만큼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불러 설계경기를 시키고 작품을 고릅니다.


건축가는 왜 세계적 명작을 스스로 버려야 했나


그런데 이런 대형 극장의 설계자가 된다는 것은 건축가 개인에겐 대단한 일입니다만 대신 단점도 있습니다. 건축주가 국가가 되면 간섭이 심해지기 쉬워 예술성 추구에 애를 먹기도 합니다. 정치적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국가대표급 극장들의 숙명입니다. 그런 속성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 극장 건축물의 대명사격인 시드니오페라하우스입니다.


현대건축의 명작이지만 정작 건축가에겐 평생의 한으로 남은 시드니오페라하우스. 극장 하나가 도시와 국가 이미지를 높였다는 평을 듣는다.


시드니오페라하우스는 건축이, 특히 극장이 도시 전체 이미지를 향상시킨 사례입니다. 이 건물이 들어선 곳은 베넬롱곶인데, 오스트레일리아에 백인이 처음 이주한 곳이라고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 정부는 1956년 국제 설계경기로 이 건물을 지을 건축가를 뽑기로 합니다. 세계에서 233명이 몰렸는데 우승자는 38살 덴마크 건축가 외른 우드손이란 건축가였습니다.


시드니오페라하우스는 베를린필 홀과 거의 비슷한 1956년부터 프로젝트가 시작됐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독특한 모양새가 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이 건물은 누구나 한번 보면 그 모습을 잊지 않을만큼 구조가 독특한데, 이 생김새가 연상시키는 것이 워낙 많아서 저마다 서로 다른 것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가장 흔하게 꼽는 비유가 하얀 조가비 껍질들이 겹치는 것이란 표현이고, 그 다음은 귤 껍질을 까놓은 모양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넘실거리는 파도의 모습, 또는 하얀 구름, 요트의 하얀 돛이란 비유도 있구요. 


제가 들어본 가장 엽기적인 비유는 “거대한 하얀 공룡이 짝짓기를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이 정작 건축가 우드손에겐 그렇게 행복한 건물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극적인 건물이었다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입니다. 자기 자식같은 분신인 이 건물 준공식에 우드손은 없었습니다. 그는 이 건물을 사진으로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건물을 짓는 도중 현장을 떠나면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세계 건축사에 길이 남는 명작을 남기면서 정작 그 주역은 자기의 분신같은 대표 건축물과 인연을 끊은 셈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 시드니오페라하우스는 원래 계획은 총 공사비 350만달러, 공사기간 2년으로 계획했던 건물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이 들어설 곳의 토대 문제로 공사기간이 하염없이 늘어났습니다. 여기에 부대 시설과 진입부의 문제들을 놓고 건축가와 건축주 사이에 논쟁이 붙었습니다. 문제는 점점 기간이 늘어나면서 공사비도 눈덩이 구르듯 불어났고, 그래서 예산의 압박이 거세진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맞서 우드손은 자기 원래의 구상을 지키려고 버텼습니다. 너무 짓는데 오래 걸린다는 비판이 나오면 “노트르담성당은 짓는데 100년 넘게 걸렸다”고 반박했고, 왜 주차장은 설계 안했냐고 지적하면 “파르테논 신전에도 주차장은 없었다”고 맞받아쳤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건축비가 최초 350만 달러에서 결국 5700만 달러까지 늘어났습니다.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주정부쪽에서는 내부 시설에 들이는 돈을 줄이자는 변경안을 내놓았습니다. 우드손은 이 제안을 거부했고, 결국 건물 건축에 들어간지 10년째이던 1966년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떠날 때 우드손이 다시는 안 돌아오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좌우지간 이 건물은 현대건축의 명작 반열에 올랐고 1995년에는 유네스코 선정 세계 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됐습니다. 지은 지 겨우 22년 된 건물이란 점을 감안하면 이 건물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건물이 건축가에게 세계적 명성과 영광을 가져다 준 동시에 참을 수 없는 회한과 분노, 증오도 함께 가져다 주었다는 점은 옆에서 구경꾼처럼 접하는 우리에겐 사실 무척이나 흥미롭기도 합니다. 


포르투의 자랑 카사 다 무지카


좌우지간 이 시드니오페라하우스가 보여주듯 “훌륭한 극장 건축 하나, 열 문화재 안부럽다”는 경허은 이후 많은 도시들에게 전파됩니다. 그래서 요즘도 세계 주요 도시들은 훌륭한 극장을 갖기 위해 세계적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설계 경기를 벌여 우수한 극장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 제2 항구도시 포르투의 명물 `카사 다 무지카'. 외관만 봐서는 극장임을 알 수 없는 파격적인 모습이다. 최근 극장 건축의 명작으로 평가받으며 포르투의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



최근의 사례로는 포르투갈의 도시 포르투에 2005년 들어선 콘서트홀 카사 다 무지카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은 무척이나 생김새가 독특해 겉모습만 봐서는 ‘이거 극장 맞아?’라고 묻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화제가 되었구요. <뉴욕타임스>에서는 이 건물이 로스앤젤레스의 디즈니콘서트홀(이 블로그 글 목록에서 ‘진짜 소리를 들려주는 공연장을 만나고 싶다’를 참고하시면 자세한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한스 샤로운의 베를린 필하모닉 홀과 함께 지난 100년 동안 지어진 콘서트홀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홀이라고 평했습니다.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최근 세계 건축계에서 ‘스타 건축가’로 인기높은 렘 콜하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사람이 설계한 건물이 몇 개 있습니다. 서울 한남동에 있는 삼성그룹 미술관인 리움미술관 건물 가운데 하나가 콜하스 것이고, 서울대 미술관도 이 사람이 설계했습니다. 


이밖에도 최근 유명 건축가들에게 도시 이미지를 높일만한 명품 극장을 맡기는 사례는 수두룩할 정도입니다. 중국과 대만 등 우리 이웃 아시아 나라들도 경쟁적으로 이 대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잘 지은 극장 하나, 도시를 살리다 


영국의 중소도시 게이츠헤드는 극장 하나 잘 지어 관광명소로 떠오른 곳입니다. 인구는 불과 20만명인 작은 도시인데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트가 설계한 세이지 음악당이 이 도시의 랜드마크로 떠오르면서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애벌레 모양의 독특한 생김새가 눈길을 잡아끄는 게이츠헤드의 세이지 뮤직센터. 지방 중소도시에 세계적인 공연시설이 들어서 지역을 재생시킨 사례로 꼽힌다.


그렇다면 우리의 극장은 어떨까요?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극장은 대략 3곳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 극장의 간판스타인 세종문화회관, 그리고 국립극장,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입니다.


이 세 극장은 예술의전당이 80년대 지어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모두 70년대 패러다임에 속해있다고 봐야 합니다. 세 극장 모두 70년대 세계 건축계를 풍미한 히로이즘(영웅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장대한 기둥이 줄지어선 모양, 그리고 웅장함을 강조하는 미학 등에서 이 사조의 연장선에 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 우리나라 극장에 적용된 웅장미를 추구하는 영웅주의를 대표하는 건물이 미국의 대표극장 링컨센터입니다. 바로 이 건물입니다.


링컨센터는 뉴욕 맨해튼섬에 있는 종합 예술센터로 뉴욕을 대표하는 극장이다. 1962년 뉴욕의 웨스트 65번가 140번지에 세워졌는데, 당시로선 드물게 규모가 크고 음악·무용·연극·오페라·발레 등 다양한 예술장르를 한 공간에서 조화시키겠다는 대담한 구상이어서 화제가 됐다. 링컨센터는 이후 최초의 복합예술공간이면서 세계의 문화 중심으로 자리잡는 데 성공하여 오늘날 복합문화공간의 전형이 됐다.



이 건물의 영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이 국립극장입니다. 얼핏 외관은 달라보입니다만 컨셉과 디자인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국립극장은 동시에 전통 건축 요소를 현대화하는 시도를 더했습니다. 건물 처마 끝이 치켜 올라간 디자인에서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국립극장이 지어진 것은 1973년으로, 이 건물은 70년대 초반 한국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건물이라 하겠습니다.


이 국립극장보다 5년 뒤에 지은 세종문화회관은 국립극장과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납니다. 그 5년 사이 우리 사회가 제법 많이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세종문화회관은 우리 극장 건축사에서 정점에 서 있는 건물입니다. 무엇보다도 이후 전국 주요도시에 들어선 문화회관이나 예술전당 등 공연장, 극장 건물의 모델이 되면서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장충동 국립극장 전경



이 세종문화회관은 70년대 당시 우리 사회의 건축적 취향이나 기준, 수준 등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우선 디자인은 한국적인 것들을 강조했습니다. 기하학적 문양은 전통 디자인 그대로 가져왔고, 서까래와 처마, 지붕 등에 한국 전통 디자인들이 더해졌습니다. 미학적으로는 괜찮은 평가도 많이 받았습니다. 현대건축과 전통적 미감을 잘 접목했다는 것이죠. 


반면 건물 윗부분이 굉장히 강조된 반면 아랫부분은 허약해보여 좀 부담스럽게 보인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기념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권위적이란 평가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건물은 ‘노력한 건물’이란 평을 들었습니다.


이 세종문화회관은 1978년 4월14일 개관했습니다. 그런데 이 4월14일은 북한 김일성 주석의 생일(4월15일) 하루 전입니다. 당시 남과 북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냉전시대, 김주석 생일 하루전에 ‘김빼기 작전으로 개관일을 정했다는 야사 같은 정사가 전해집니다. 


세종문화회관은 그 역사도 재미있습니다. 종전이후 우리나라 현대 극장의 역사와 당시 시대상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이 담고 있는 현대사 에피소드들


지금 세종문화회관은 원래 시민회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민회관 이전에 다른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처음 극장을 만들기로 했을 때 극장 이름은 ‘우남회관’입니다. 지금은 이 이름을 들으면 “우남이 무엇이냐”고 궁금해하실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만큼 세월이 지났다는 이야기일텐데, 이 우남은 이승만 초대 대통평의 호입니다. 제1공화국 당시 이대통령 탄생 80회(물론 생존해 있을 때입니다)를 기념하는 한편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각계 인사들이 지지를 받아 우남회관을 짓자는 창립총회를 거쳐 지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자유당 독재와 이대통려에 대한 우상숭배에 가까운 지지가 강했을 때였으니 탄신 80회 기념 극장을 서울 한복판에 짓자는 발상은 그닥 어렵지 않았던 것이죠. 그 못지않게 이제 서울에도 커다란 공연장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도 중요했다고 합니다.


좌우지간 이렇게 시작은 했는데, 진도가 안나갔답니다. 야당인 민주당이 예산 통과를 막으면서 버텼고 해를 거듭해갔습니다. 그러던 도중 군사쿠데타가 터져 이제 이승만 대통령을 기념하는 이름은 의미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름은 시민회관으로 바뀌었고, 뒤늦게 공사 진도가 빨라져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가 못살던 시절이라, 이 극장은 시대의 첨단인 동시에 시대의 한계를 고스란히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설비를 갖추지 않는 바람에 시민회관은 비극속에 사라집니다. 


1961년에 준공해 10년 좀 넘게 지난 1972년 12월2일 MBC가 주최하는 <10대가수 청백전>이 시민회관에서 무대에 올랐습니다. 당시 문화방송의 ‘10대가수~’는 대단한 인기였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한데, 70~80년대 연말만 되면 시민들이 모두 안방에 앉아 둘러보는 중요 이벤트였습니다. 이 날 한창 쇼가 이어지던 8시27분에 무대 조명장치가 터지면서 불이 붙었습니다. 


당황한 주최쪽은 급하게 막을 내렸는데 오히려 이게 더 큰 화재를 불렀습니다. 막에 불이 옮겨붙어 겉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51명이나 숨지는 대형참극이 빚어졌습니다. 이후 조사결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극장이었음에도 놀랍게도 소방시설은 거의 전무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심지어 당시 관장도 5층 관장실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질식사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외부는 화려했어도 내부는 소방시설 등이 너무나 부실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예산문제로 공사를 마무리해야 하는 바람에 내부 시설은 신경쓰지 못하고 기간을 맞춰 완공했던 탓이었습니다. 아직 사회 시스템이 고도화하지 못했던 60~70년대의 문제점이 그대로 이 극장에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민회관이 불타버린 뒤 그 자리에 새롭게 공들여 지은 극장이 바로 세종문화회관이었습니다. 원래는 이런 공연장이 아니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정권을 이어가기 위해 도입했던 대통령 선출방식인 통일주체국민회의 회의장으로 기획되었는데, 예술공간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아져 세종문화회관으로 낙착되었습니다. 


이런 범상찮은 전사를 거쳐 우여곡절끝에 들어선 세종문화회관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당시 기술적 문제 때문에 공연하기는 좋지 않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는데, 얼마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치면서 많은 점이 개선되었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비용만 700억원대에 이르렀을만큼 거대한 극장입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제가 보기엔 세종문화회관은 다른 극장들보다는 확실히 살아있는 극장인 것 같습니다. 우선 국립극장과 예술의전당은 거리에서 동떨어진 곳에 따로 자리잡아 시민들이 친숙하게 지나다니면서 접하기 불가능합니다. 또한 디자인도 무척이나 권위적이어서 정이 잘 붙지 않습니다. 반면 세종문화회관은 시내 한 가운데에 있어 자주 접하면서 친숙해지기 쉽고, 건물 구조도 시민들에게 열려있는 편입니다.


보통 극장 건물들은 과감한 디자인을 적용하기는 쉬운데 미학적으로 완성도를 높게 뽑아내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극장들이 유명은 하지만 미학적 측면에서는 다른 건물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편입니다. 특히 극장 뒷면은 마치 케이크 잘라놓은 것처럼 엉성하게 처리된 경우도 많습니다. 


세종문화회관도 그런 약점이 다소 있기는 한데 대신 뒤편 공간이 시민들의 쉼터로 열려 있습니다. 건물 뒤편 공간배치가 거리 친화적이어서 오가는 직장인들이 잠시 커피 한잔 마시며 쉬어가기도 하고 담배 한대 피우며 이야기하기에도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문화회관과 국립극장 등 현대 우리 극장건축물들은 아직까지는 시민들이 사랑하는 공간으로 완전하게 서울의 명물로 자리잡지는 못한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이는 아직 우리 극장들이 진화하며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들어서는 극장들은 보다 시민들이 진짜 사랑하면서 우리 나라, 우리 도시의 상징으로 꼽을 수 있는 극장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극장은 그 도시의 핵심 아이콘이며 이제는 중요한 관광 상품으로도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도시들은 유명 건축가들을 경쟁적으로 초청해 명품형 극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극장이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힘을 지닌 것을 주목한 것입니다.


극장, 지으려면 제대로 지어다오 


서울시 역시 새로운 극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앞서 이명박 시장 때 한강 노들섬에 5000억원을 들여 오페라 하우스를 짓자고 했고, 이어 오세훈 시장이 이 곳에 극장을 넘어 문화콤플렉스를 짓겠다, 그리고 민자를 유치해서 초거대 건물로 짓겠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행정가들이 아직도 개발독재 시절에나 통할법한 불도저식 밀어붙이기와, 무조건 민자유치가 최선이란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 이런 이유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현재 오페라극장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오페라란 장르 자체가 온국민들에게 폭넓게 사랑받는 장르도 아직은 아닌데, 굳이 오페라극장을 5000억원이나 들여 지을 필요가 있는지 회의적입니다. 더욱 못참겠는 것은 ‘문화행정’을 강조하며 당선된 오시장이 오히려 더 황당하게 이 계획을 발전시켰다는 점입니다. 오 시장이 서울에 제대로 된 문화를 만들어주기를 내심 크게 기대했는데 완전 배신당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너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결국 재검토로 돌아간 모양인데, 극장을 지으려면 노들섬이 아니라 다른 곳에, 그리고 꼭 오페라는 아니어도 좋으니 시민들이 서울의 상징, 한국의 상징으로 사랑할만한 극장을 신중하고 진지하게 검토해 세워주길 바랄 뿐입니다. 


이 긴 글을 통해 계속 강조해왔듯 극장은 시대와 문화 코드를 담는 그릇이며, 그 이전에 시민들이 문화를 즐기는 소중한 곳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