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이것이 저술가의 서재다-임석재 교수의 거대한 자료실 2007/02/16

딸기21 2018. 6. 6. 10:56

2년쯤 전이었습니다. 모처럼 건축사학자 임석재 교수(이화여대 건축과)를 만났는데, 근황을 묻자 “서재를 구해 책들을 옮겼다”고 하더군요. 궁금했습니다. 책이 얼마나 많기에 서재를 따로 마련해야 했을까요. 임교수는 옮긴 서재도 옮기자마자 자료로 가득찼다며 빙긋 웃었습니다. 무척이나 궁금해서 언젠가 한번 찾아가서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5일, 임석재 교수의 광주 아파트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10여년 동안 무려 28권의 책을 쓴 우리 시대 대표적인 건축글쟁이, 그 글쟁이의 서재를 찾아간 것은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연재 기사 <한국의 글쟁이> 열아홉번째 글쟁이로 임석재 교수를 선정한 것이 제가 임교수 댁을 찾아가게 된 경위입니다. 물론 진작부터 보고 싶었던 서재 구경 욕심도 있었구요. 


임교수의 서재는 경기도 광주의 한 아파트였습니다. 가족들과 같이 생활하는 곳이 아닌 완전한 집필실로 마련한 공간입니다.  과연 얼마나 자료가 많을까 궁금했는데, 임교수가 현관문을 여는 순간 현관에서 보이는 집안 모습은 이 곳이 ‘거대한 자료의 바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이미 철제 책장이 놓여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바라본 집안 모습.


집안 조금이라도 빈 공간에는 책장들이 열병하듯 서 있었습니다. 마루는 그저 큰 방일 뿐이었습니다. 마루 가운데에는 책상이 있고 나머지 모든 벽은 책장을 놓았습니다. 자, 마루 책상 앞에 선 임석재 교수입니다. 


방이 아닙니다. 마루입니다.


임 교수는 마침 슬라이드 필름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임교수는 글쟁이이면서도 사진을 직접 해결합니다. 사진을 거의 전문적으로 찍는데, 내년도 이화여대 다이어리를 임교수가 찍은 우리나라 전통가옥들 사진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52주별 그림으로 넣을 52개 전통가옥별로 좋은 사진을 고르던 차였습니다. 책상 위에는 슬라이드보관통과 사진을 살피는 도구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5개의 방은 방 하나 하나가 모두 서재였는데, 나름대로 분류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사진 자료를 넣어놓는 방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물별 자료방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축가, 미술가, 철학자 등 개인들에 대한 자료들을 모은 방입니다. 또다른 방 2곳은 시대별 자료방입니다. 고대부터 19세기까지 자료방, 그리고 19세기 이후 현대건축까지 자료방 등. 마루는 집필공간 겸 현대건축 자료들 공간입니다. 


우선 근대건축 이전 자료들을 모은 방입니다. 카메라도 모두 이방에 놓았더군요. 



조금의 빈 틈에도 책장을 넣을만큼 자료는 많았습니다. 



각 자료들에는 찾기 쉽도록 종이로 항목을 붙여놓은 모습입니다.


임교수 자료실의 압권은 바로 슬라이드 사진을 모아놓은 방입니다. 물론 모두 임교수가 직접 찍은 필름들입니다. 부피가 나가는 책도 아니라 조그만 슬라이드 사진필름이 도대체 몇 개나 되기에 방까지 따로 만들었냐구요? 자그마치 20만개라고 합니다. 클리어파일처럼 생긴 두꺼운 파일철에 한 쪽당 20개씩 끼워 보관합니다. 자, 한번 보시죠. 



보시면 낯익은 생활용품인 방습제 ‘물먹는 하마’가 있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습기흡수용품을 넣은 것은 슬라이드 필름이 습기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이 필름철 한쪽한쪽 사이에 넣기 위해 신문지를 크기를 맞춰 1만쪽을 잘라놓은 점입니다. 습기 빨아들이는데 신문지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임교수가 신문을 주워다 모은 뒤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종이를 잘랐다고 합니다. 정말 자료 관리가 저술가에겐 생명과도 같구나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사진철에는 꼼꼼하게 필름 항목을 적어놓았습니다. 맨 오른쪽 파일집 등에 써놓은 영국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이름이 보이네요. ‘English Baroque, Christopher Wren‘. 



(# 크리스토퍼 렌은 영국 바로크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갑니다. 원래는 자연과학자로, 뉴튼이 칭찬할 정도의 대단한 양반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옥스퍼드대 천문학과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놔두고 건축가가 되었답니다. 참 재주도 많은 분이죠? 대표작은 영국 세인트폴 대성당입니다. 이만큽 설명하고서 사진도 안보여드릴 순 없을테니 아래 세인트폴 성당 사진 첨부합니다.) 



학자들의 일상은 자료와의 전쟁이자 동고동락입니다. 스스로 분류한 자료가 아니면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드는 불가능한 도전을 시도하게 됩니다.  


건축이란 분야 속성상 임교수의 도전은 다른 인문학자들보다 훨씬 돈이 듭니다. 왜냐구요? 건축책들은 비싸거든요. 사진들이 들어가면 책도 크구요. 보통 원서가 권당 10만원 가까이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거대한 자료실 속에서 임교수는 읽고 쓰고 자료를 정리합니다. 그의 삶을 보면 글쓰는 팔자가 따로 있다 싶습니다. 아니, 글쓰는 기계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본인도 씨익 웃습니다. 

“참 미련하게 살지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사나 싶을 때가 있어요.” 

그 결과 28권의 책이 독자들과 건축을 이어주었으니, 보람은 클 것입니다. 


임 교수는 방학이면 카메라를 짊어지고 해외로 떠납니다. 취재와 자료수집을 위한 출장인데요, 그 중간중간 사서 모은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머그잔’입니다. 나라별 특색있는 기념품으로 하나씩 모은 것이 부엌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선반 위에도 한줄로 머그잔이 서 있네요. 



건축학자라서 그런지 건축물 그림이 들어있는 머그잔들을 모아놓은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술가들의 서재가 모두 임석재 교수의 서재 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학자이면서 책을 쓰는 저술가들의 서재는 이렇게 자료실이 되고 맙니다. 얼마나 많은 자료에 투자하고 관리했느냐에 따라 저술의 양과 질이 바뀌기 때문에 오늘도 글쓰는 학자들은 모으고 또 모읍니다. 그게 저술가의 팔자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모으는 과정 자체가 즐겁기에 모으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죠. 


자, 그러면 퀴즈! 

책이 이 정도면 한 몇 권이나 될까요?

 

임석재 교수에 대한 기사는 이후 제가 썼던 책 <한국의 글쟁이들>(한겨레출판 펴냄)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저서는 계속 늘어나서 이제는 쓴 책의 숫자가 자기 나이를 넘어설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놀라운 생산성이 바로 이 서재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저술가의 특별한 서재, 구경 잘 하셨습니까? 

 

참, 임교수 댁에 있는 책은,

 

1만권입니다.

 

글을 쓰시는 모든 분들이 언젠가 이런 집필실을 가지게 되기를 응원합니다. 저도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