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지고 놀기

2009 최고 만화로 이 5편을 꼽았던 이유 2010/01/03

딸기21 2023. 9. 1. 19:41

연말이면 날아오곤 하는 주문 중의 하나가 `~베스트' 꼽아달라는 것들이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11월도 아닌 10월에! (참 부지런도 하여라), 만화잡지 <팝툰>에서 메일이 왔다. 2009년 최고 만화를 뽑아달라는 것.
 
그런데 단순히 하나 딱 꼽으라는게 아니라 어려운 숙제처럼 주문을 해왔다. `최고의 만화'를 꼽고 그 이유를, `최고의 만화가'와 `올해의 신인'을 꼽고 역시 이유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더 어려운 질문도 있었다. `잘 만든 단행본이나 괴작'을 추천해달라는 거였다. 
 
기왕 했던 것, 요즘 재밌는 만화책 뭐 없나 하시는 분들을 위해 만화 추천작들을 소개한다.
 
# 최고의 만화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고민되는 질문이었다. 이걸 꼽으면 혹시 누가 흉볼까, 너무 마니아코드로 가는 것 아닌가 등등 신경쓰이는 것들이 제법 많은 탓이다.
게다가 2009년에는 누가 생각하더라도 최고 만화 1순위 후보가 있었다. 윤태호의 <이끼>다. 개인적으로도 재미있게 보았던 만화였다.
하지만 나 말고도 찍을 사람이 많을 듯하여, 내 기준을 정했다. 한국 만화판에서 혼자만의 개성으로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가는 만화가들의 작품, 작품에 견줘 주목을 덜 받는 듯한 만화들을 꼽기로 했다. 
 



최훈의 <지엠>을 꼽은 이유는 전문만화의 새 장을 열었다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이야기의 힘은 작가의 마니아적 열정에서 나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란 점에서도 꼭 추천하고 싶었다.

<지엠>은 단언컨대 지금까지 나온 한국 야구만화에서 가장 전문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고교야구와 프로야구가 인기를 모았던 70년대말, 80년대초 야구 만화는 일대 붐이었다. 이상무부터 허영만 이현세 등 당대의 만화가들이 모두 야구만화를 그렸다. 우수한 야구만화도 많았다. 그러나 분명 그 때만의 유행 이상은 아니었다. 야구를 진정 자기의 주특기로 삼고 만화를 그리는 작가는 이후 드물었다. 그리고 최훈이 등장했다.
 
최훈이 웹에 연재한 메이저리그 만화는 지금까지 없었던 논픽션 야구 만화였다. 실제 메이저리그 팀들에 대한 분석부터 걸출했던 전설의 스타들에 대한 만화까지 꼼꼼한 자료 조사로 개그 만화가도 야구만화를 이렇게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실제 야구에 대한 지식 위주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의 만화에서 처음 알게 된 스탯이 도대체 몇가지인지 셀 수조차 없다.
 
그리고 그가 선보인 픽션, 본격적인 장편 야구만화가 <지엠>이다.
<지엠>은 한국 야구만화의 지평을 넓힌 만화라고 감히 평한다. 그 이유는 선수들의 경기 이야기가 아니라 프로야구의 숨은 일꾼들인 구단 직원들의 세계를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피튀기는 스카우트 전쟁, 트레이드 작전, 낙하산 구단 사장과 전문가 직원들의 애증 등등을 묶어 지금까지 한국 스포츠 만화에 없었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단순한 그림체지만 그 어떤 사실적인 그림체의 만화가보다도 실감나는 야구만화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지엠>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주저 없이 골랐다. 개인적으로도 <하대리> 시절부터 최훈 작가를 좋아했다. 썰렁하지만 매력적인 개그, 자꾸 보다보면 정드는 그림체, 그리고 알맞은 마초성과 여성성을 보여주며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자극해 남녀 모두에게 다가가는 만화가라고 생각한다.
<지엠>은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만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삼국전투기> 역시 뛰어나지만 <지엠>만큼 흡입력이 강하지는 않다고 본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2009 최고의 만화가' 역시 최훈 작가를 꼽았다.
 

  

김홍모 작가의 <두근두근 탐험대>를 꼽은 이유는 김 작가가 이 만화에서 완전히 물이 올랐다고 생각해서였다. 그의 전작들, <소년탐구생활>과 <항쟁군-평행우주> 같은 만화들은 물론 훌륭했지만 타깃이 좀 애매했다. 성인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닌, 그리고 마니아가 아닌 이들은 선뜻 고르기 어려운 만화라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두근두근 탐험대>는 어린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춰 잘 뽑아냈다. 수묵화로 그리는 그의 작풍도 더욱 안정됐고, 이야기도 자유자재로 끌어나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만화가 진짜 최고 중의 최고라고 까지는 생각 않는다. 그러나 이 정도 만화면 분명 판매나 평가에서 모두 기본 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 만화가 잘 팔리는 것은 둘째 치고 널리 알려지지도 못한 것, 그게 지금 우리 만화 현실의 문제라고 본다.



형민우의 <고스트페이스>는 앞서 소개한 최훈의 <지엠>이나 김홍모의 <두근두근 탐험대>보다도 덜 알려졌을 지도 모르겠다. 고르는 입장에서도 좀 과감하게 고른 느낌은 있다. 그러나 주목받을 만화임은 분명하다.
 
형민우는 국내 만화가들 중에서 일본 만화가 아니라 미국 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몇 안되는 작가였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 만화 특유의 고딕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살려낸 첫 작가다. 출세작 <프리스트>는 지금 봐도 대단한 스타일이다. 이 만화가 할리우드로 팔려간 것만으로도 얼마나 세계 시장에 통할만한 글로벌 스탠다드 감수성인지 알 수있다. 
 



<고스트페이스>는 형민우가 이제 완전히 자기 스타일을 완성해냈음을 보여주는 만화다. 그리고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미국 만화의 주류를 이루는 그래픽노블을 그리는 작가임을 선언한 작품이라고 본다. <헬보이>도 <블레이드>도 아닌 퓨전 스타일의 다크 히어로를 깔끔하게 만들어냈는데, 전체적으로 너무 영화와 게임으로 이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기획한 느낌이 강해 오히려 거슬리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와 연출력만으로도 모두 용서가 된다.
 
다만 시장에서의 반응이 너무 없어 제대로 이야기가 마무리될지 걱정스럽긴 하다. 그래도 형민우는 분명 한국을 대표하고 있고, 앞으로도 대표할 만화가 가운데 한 명임에 틀림없다. 그만의 만화세계가 좀더 보편성을 얻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 더 꼽았던 것이 있다. 
  



<티엘티>는 이상한 만화다. 우선 시대착오적 느낌까지 있다. 90년대 이후 멸종된 동물 캐릭터를 가져왔는데, 뜻밖에도 사실적으로 연출했다. 그리고 잡초 근성에 변변찮은 배경 없는 주인공이 재벌 기업에서 성공한다는 식의 기업만화다.
요즘 세대들보다는 30대 중반 이상들에게나 통할 컨셉인데, 웹에서 반응을 보면 결국 먹혀들었다. 컴퓨터와 태블릿 작업 시대에도 옛 펜선과 붓 채색 만화의 느낌을 살려낸 독특한 그림도 보는 맛이 좋다. 30대 이상 남성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법한 만화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네 편을 뽑아 메일로 보냈는데, 아뿔싸.
결국 하나를 빠뜨리고 말았다. 그게 아쉽고 미안해 뒤늦게 소개한다. 꼭 넣었어야 하는데 놓친 그 만화가 <악연>이다.
 
<악연>은 `악당의 사연'을 줄인 제목이다. 
취업대란 시대, 주인공은 일류 기업에 취직하는데 취직하자마자 회사가 망한다. 그래서 들어간 회사는 알고보니 `홍어단'이란 악당들의 무리. 그런데 악당이란 사람들이 좀 이상하다. 그리고 악당인 자기네 회사와 싸우는 여성 영웅에게 한눈에 반한다는 그런 이야기.
줄거리고 뭐고 그냥 일단 보라고 권하는 방법 밖에 없는 만화다. 이렇게 깔끔 상큼한 개그만화, 정말 오랫만이다. <멋지다 마사루>처럼 과하지도 않으면서 오버와 절제의 중간선에서 아주 알맞게 균형을 잡는다.
 

  

<악연>은 신세대와 구세대 모두가 좋아할만한 수작으로, 요즘 어떤 만화 재미있냐고 사람들이 물어볼 때 가장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만화다. 더군다나 연재가 끝나 기다릴 필요도 없다! 설문에서 이 훌륭한 개그만화를 빠뜨린 것을 팬의 한 사람으로써 반성할 일이어서 이렇게 블로그로나마 알리며 위안을 삼는다.
 
# 올해의 신인
 
고민하다가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했던 만화를 모아 <도깨비가 훔쳐간 옛이야기>를 펴낸 하민석씨를 골랐다. 그림 내공이 보여주듯 상당한 경력을 쌓은 작가인데 책이 처음 나왔으므로 어쩔 수 없이...
 

  
 
동화와 옛날 이야기와 멀어지는 요즘 아이들을 위해 좋은 옛날 이야기 만화는 꼭 필요하다. 윤승운이 지금 부모세대들에게 옛날 이야기 해주는 할머니 역할을 했다면 이젠 새로운 만화가가 필요하다. 하민석이 그 역할을 해주는 작가로 성장하길 기대하며 선택했다.
 
# 2009년 잘 만든 단행본, 그리고 괴작
 
난해하나 반가운 질문. 그러나 답을 고르긴 쉽지 않았다. 잠시 생각해 쓴 작품은 <크로니클스>와 <르네상스 미술이야기>였다.
 

  
 
<크로니클스>는 원래 기획한 분량을 다 소화못하고 다섯권으로 마무리했다. 다섯권이 짧지는 않지만 이 만화의 만듦새에 견주면 좀 부족하다.
동양 최고의 팬터지 소설 <서유기>를 만화로 패러디한 것이야 수도 없이 반복된 것이고, 이 만화 역시 스토리면에선 아주 신선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림 면에서는 대단히 우수했다. 캐릭터 디자인도 좋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도가 유지된 점도 좋았으나 역시 시장 반응은 출판사가 원한 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십자군 이야기>로 유명한 김태권 작가의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를 고른 것은, 이 책을 낸 출판사가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자회사여서가 결코 아니다. 이 교양만화가 다른 만화들과는 무리 짓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하다는 점에서였다.
 
누가 뭐래도 김태권은 지금 한국의 교양만화가 중에서 이원복 이후 가장 뛰어난 작가다. 단순한 그림체여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탄탄한 그림 실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양 고전에 대한 지식과 열정 면에서 두드러지는 작가다. 서양역사와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고대 라틴어를 대학원에서 배우는 만화가가 한국에 또 누가 있겠는가.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에는 없는 그림이지만 그가 요즘 연재하는 칼럼 삽화를 하나 가져왔다. 김태권 만화의 약점은 기존 텍스트를 알아야 이해가 되는 요소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좀 썰렁하지만 집요한 비판적 개그도 익숙해지는 시간은 좀 필요하다.
그래도 교양 전문 만화가로써 꾸준히 자신을 벼리며 작품활동하는 그를 보면 지금까지 이룬 성과 이상으로 앞이 기대되는 작가다.
 
여기까지가 설문에 답한 내용이다. 무척 주관적이고, 무엇보다도 올해는 예년보다 만화를 덜 읽어 답하면서도 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남들은 어떻게 답했는지, 올해 최고 만화는 무엇인지 궁금해 <팝툰> 12월호를 기다렸다.
 
결과는 어땠을까?
역시나 최고의 만화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모두 46명의 만화 전문가들이 참여한 투표에서 윤태호씨의 <이끼>가 23표를 얻어 1위였다. 절반 정도가 꼽았으니 대단했다.
그 다음은 일드의 영향도 있었지만 워낙 만화 자체의 인기가 높았던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 그리고 <플리즈 플리즈 미>와 <100도씨>가 공동 3위, <패밀리맨>과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이름의 <이말년월드>가 공동 5위로 뒤를 이었다.
 
나는 응답을 안한 `최악의 만화'에선 인기도 그만큼 높은 <메리는 외박중>이 1등으로 꼽혔다. 유명 작가의 화제작이니 더욱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다는 이야기로 봐야할 듯하다. 그리고 46명중 겨우 3표로 1등이어서 아주 큰 의미는 없을 수도 있어보였다.
 
올해의 만화가는 윤태호, 허영만, 강풀의 순이었다. 윤태호씨는 2관왕.
올해의 신인은? 정필원 이말년 두 사람이 공동 1위으로 꼽혔다.

사실 지난 해는 한국 만화들은 주춤했고, 외국 유명 만화들이 많이 들어온 해였다.
그 속에서 고군분투한 작가들이 이번 조사에서 상위에 오른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만에 만화를 보려하는데 최신 히트작을 잘 모르겠다면,
그리고 그동안 보지 않았던 새로운 만화를 보고 싶다면,
위에 오른 저 이름들을 참고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