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지고 놀기

올해 BEST 스릴러 & 미스터리, 결론은 이렇습니다 2009/12/31

딸기21 2023. 3. 15. 13:42

읽어주시는 분은 거의 없어도 저 혼자 심심해서 매해 연말 뽑아온 추리&스릴러 소설 베스트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몸이 안좋아 밍기적거리다보니 마지막날 부랴부랴 올리네요.-_-
 
올해는 읽은 추리 & 미스터리가 많지 않아 원래부터 그리 많지 않았던 객관성이 약간 더 떨어졌는데, 그래도 올 한해 저 개인의 추리스릴러 독서평을 한다면 `여성주의적 스릴러들을 만나 즐거웠던 한해'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여자들이 주인공인 괜찮은 소설들이 예년보다 많았던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2009년 읽은 것들중 최고를 먼저 꼽겠습니다. 좋은 것 소개하기도 바쁘니까요^^. 이 글은 지난 여름 <한겨레21>에 실린 원고를 손보고 내용을 더한 것입니다.
 
# 공동 1위-묵직한 강펀치 <심플 플랜>

 

 

<심플 플랜>(스콧 스미스 지음, 비채 펴냄)은 익숙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평범한 시민으로 신혼 재미가 한창인 주인공 행크는 형 제이콥, 형 친구 루와 한적한 숲속을 가다가 추락한 비행기에서 440만달러가 든 돈가방을 발견합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어떻게 할까 놀란 세사람, 고민 끝에 남들 눈치채지 못하게 숨겨놨다가 나누기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좀 칠칠치 못한 형 친구 루가 욕심을 못참습니다. 무조건 나눠서 맘대로 쓰자고 우겨댑니다. 돈을 안주면 신고하겠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흐르게 되어 있고 그러면 다시 세 사람 사이에 칼부림나기 십상입니다.
 
이 낯익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스콧 스미스의 이야기 솜씨는 대단합니다. 정말 잘 읽히는 스릴러입니다. 이야기 흐름에 군더더기 없이 거침없이 진행하는데, 예상가능한 이야기를 예상에 맞춰주기도 하고 훨씬 빠르게 치고 나가기도 하고 그러면서 당연히 반전도 집어넣어 독자들 머리위에 올라탑니다.


특히 이 책은 독자가 주인공이 되어 범죄자가 되어보는 듯한 간접 경험을 제대로 해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돈에 초연하던 주인공이 결국 돈에 눈이 뒤집혀가는 과정을 실감나게 이어지는데, 주인공이 기로에 설 때마다 `나라면 어떻게 결정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내 생각과 주인공의 선택은 과연 비슷할까 다를까 궁금해하며 읽게 됩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 마무리였습니다. 순수문학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듯한 결말에 저도 십분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공동 1위-매력이 너무 많은 <6인의 용의자> 

<심플 플랜>과 함께 2009년 읽은 최고 소설이었다고 생각하는 <6인의 용의자>입니다. 이 책의 매력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매력이 너무 많은 것이 매력'이라고 하겠습니다.

 

 

<6인의 용의자>란 제목은 솔직담백하면서도 흡입력이 있습니다. 보나마나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6명 중 한 명이 범인일텐데 그게 누군지 잡아내는 이야기겠죠. 이 책 역시 <심플 플랜>처럼 낯익은 플롯입니다. 역시 이야기는 익숙한 것들에 계속 끌리게 되어있나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첫째. 인도가 무대라는 점 때문에 왠지 꺼리시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북미나 유럽이 무대가 아니라 인도라니, 라는 선입견을 버리면 보석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인도라서 낯선 느낌은 처음 5분, 그 뒤로는 정신없이 읽게됩니다.
둘째, 절대 두께에 겁먹지 마시기를. 625쪽이나 됩니다. 그러나 출판사에 점수 주고 싶어질겁니다. 책을 2권으로 나누지 않고 한권으로 냈으니까요.
세째, 지은이의 전작을 연상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 이 책을 쓴 사람은 비카스 스와루프, 아카데미상을 받은 그 유명한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원작 소설을 쓴 양반입니다.


이 비카스 스와루프는 사람 기를 죽이는 사람입니다. 직업이 소설가가 아닙니다. 현직 외교관입니다. 외교관일 하면서 두달 동안 쓴 소설이 <슬럼독 밀리어네어>인데, 32개국에 번역됐고 영화는 아카데미상 8관왕을 합니다. 게다가 두번째 소설은 스릴러로,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장르에 첫 도전한 것인데 이렇게 재미있다니 , 사람이 이렇게 뛰어나도 되는 건지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선 읽고 난 소감부터. 600쪽이 넘는데 읽고 나면 정말 600쪽 밖에 안되나 싶습니다. 하도 이야기가 풍성해 1000쪽 짜리 정도로 느껴집니다. 용의자 6명에 대한 이야기들이 각각 펼쳐지는데, 하나 하나가 다 빼어난 단편소설 같습니다.


그러면 본론인 줄거리 소개합니다.

인도의 악덕 재벌이 파티장에서 총격으로 죽습니다. 용의자는 제목대로 6명인데 인도 최고의 여배우, 전직 고위관료, 그리고 죽은 재벌의 아버지인 내무장관, 우연히 파티장에 오게 된 미국 관광객, 사라진 마을의 보물을 찾아 대도시로 오게 된 오지 원주민, 그리고 어린 휴대폰 좀도둑입니다. 이 각자에겐 모두 사연이 있고 그 이야기들은 쪼개졌다가 다시 합쳐집니다. 

재미있는 점은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인 지은이가 자기 나라의 꼬이고 부패한 현실을 사정없이 비판하고 폭로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나라 외교관이 이런 소설을 썼다면 아마 난리가 날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비카스 스와루프가 외교관 그만 두고 이런 스릴러를 많이 써주면 좋겠습니다.
 
# 무서운 여자들 이야기

마음에 들었던 여성주의적 스릴러들 차례입니다. 여성들이 주인공이니 덜 잔인하리라고 예상하시면 그건 오해라는 것, 예상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묘한 분위기, 매력적인 설정, 그리고 깔끔한 반전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던 <그 여자의 살인법>(질리언 플린 지음, 바벨의도서관 펴냄)입니다. 표지가 눈에 안띄는 스타일이어서 놓칠뻔 했습니다.

 

한 여성 사건기자가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을 취재하게 됩니다. 살인이 벌어진 곳은 하필 그토록 탈출하고 싶었던 고향 마을. 고향에 돌아가 취재를 해보니 살해당한 아이들이 자기 어머니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기자는 알게됩니다. 그리고 사건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이 소설 최고의 매력은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이란 점입니다. 가장 가깝고도 가장 증오하는 사이가 되기 쉬운 가족들 사이에 벌어지는 긴장감, 그리고 심리묘사가 일품입니다. 여기에 미국 시골 동네 특유의 폐쇄적이면서도 뭔가 숨어있는 듯한 야릇하고 묘한 분위기가 솔솔 풍겨옵니다. 가족 간의 애증과 마을 공동체 속의 비틀린 관계를 극한까지 몰아붙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끈적끈적한 긴장과 공포가 실감나고 반전도 좋습니다. 강추합니다.

 

# 나쁜 상사와 꽉막힌 회사 때문에 작가가 된 베스트셀러 소설가
 

 

이 책 <서바이버 클럽>도 놓치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제목 때문입니다.

외국 작품 제목을 영어 발음대로 적는 병이 영화계에서 시작되어 책동네까지 번졌습니다. 이 책은 그 바람에 오히려 별 특색없는 느낌이 되어버렸습니다. 차라리 번역대로 <생존자 클럽>으로 가는 것이 더 나았을듯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존자들이 모인 클럽이냐면 성폭행 당한 뒤 살해당할 뻔 했다가 살아난 여자들의 모임입니다. 인생 최악의 경험을 한 여성 셋이 힘을 합쳐 용의자를 지목합니다. 그런데 간신히 잡아낸 범인이 법원에 출두하다가 총에 저격당해 죽습니다. 범인을 증오하는 세 여자가 살인을 청부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정의감에 불타는 주인공 경찰이 수사에 나섭니다.

범인을 잡아가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섬세한 여성 심리묘사가 흥미롭습니다. 대신 남자 주인공은 무지하게 단순합니다. 남성 작가 소설 속 여성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빤한 캐릭터인지에 견주면 훨씬 나은 수준이긴 합니다만 말이죠.

 

내용 못잖게 재미있었던 것은 지은이의 이력이었습니다.

지은이 가드너는 원래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는데, 정장 차림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부하를 몰아대는 상사에도 질렸고, 숨통 조이는 회사 분위기도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답니다. 회사와는 체질적으로 안맞는 모양인데 그래서 스릴러 소설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문득 저의 강압적인 일처리 방식에 괴로워했을 여러 여자 후배들이 떠오르네요. 후배들에게 잘 해주고 살아야겠습니다.

 

# 역대 최악의 여자 살인마를 소개합니다

 

 

역시 여성 작가가 쓴 <상처>(첼시 케인 지음, 리버스맵 펴냄)는 스릴러 소설을 어느 정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더욱 좋아할 듯한 소설입니다.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인 시리즈 첫 편인 <상처>는 범죄를 다루는 소설에서 이젠 빠지면 이상할 정도인 프로파일링의 익숙한 설정을 살짝 뒤집습니다. 모든 북미권 범죄소설에서 연쇄살인마는 거의 예외없이 과거 학대받은 경험이 있는 백인 남성으로 설정됩니다. 그런데 이 시리즈에선 미모의 여성 연쇄살인범 그레첸 로웰이 등장합니다. <양들의 침묵>으로 유명한 한니발 렉터의 여성 버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람 잡아다가 독창적으로 고문해 죽이는 재미로 무려 200명을 죽인 괴물입니다.

 

로웰은 집요하게 추적하는 수사관 아치 셰리단을 잡아다가 고문을 해서 거의 죽이기 직전에 붙잡힙니다. 책은 로웰에게서 간신히 살아난 셰리단이 새로운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이야기로, 그 속에서 로웰과 셰리단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2중으로 펼쳐집니다. 이런 소설들이란게 곧 얼마나 독창적으로 배배꼬인 범죄를 창안해내느냐가 재미인데, 그레첸이 셰리단을 집요하게 고문하는 장면 묘사는 피가 튀는데도 독특, 상큼합니다.

뒷 편들인 <낙인>과 <파국>을 읽어야 하는데, 요즘 지갑이 얇아져 책을 과감하게 못사는 나머지 아직 못읽어 봤는데 읽어보신 분들 계시면 평을 부탁드립니다.

 

여성작가들의 미스터리는 이 정도로 하고, 올해 괜찮았던 추리소설로 꼭 소개하고 싶은 2권이 있습니다. 외국 장르소설이 판치는 가운데 고군분투하고 있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입니다.
 
# 1930년대 명탐정 경성을 누빈다

 

 

먼저 일제강점기 이름이 경성으로 바뀌어버린 서울을 무대로 활약하는 탐정이야기, <경성탐정록>(한동진 지음, 학산문화사 펴냄)입니다.

 

주인공 탐정의 이름은 설홍주. 어디서 들어본 듯한 느낌이 오십니까?
그럼 이 탐정 조수이름을 보시지요. 왕도손 의사.
그래도 모르시겠다면 설홍주 탐정이 사는 하숙집 아주머니 이름이 `허도순'이란 것까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고전 추리소설의 지존 `셜록 홈즈'를 경성으로 데려온 패러디+오마주 소설입니다. 셜록 홈즈는 설홍주, 와트슨은 왕도손, 허드슨 여사는 허도순 여사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한 인물이 더 등장합니다. 경성 최고의 법의학자 손다익 박사. 셜록 홈즈 시리즈의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추리소설사에 빛나는 법의학 탐정의 비조, 손다이크 박사의 이름을 가져왔습니다.

 

이 <경성탐정록>은 셜록 홈즈의 스타일, 분위기, 추리법, 설정 등을 모두 그대로 재현한 재미있는 추리소설입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셜록 홈즈 이야기가 그리운 분들은 반갑게 읽으실만합니다. 영국 런던의 셜록 홈즈와 조선 경성의 설홍주가 다른 점이 있다면, 셜록 홈즈는 마약을 즐기는 `또라이' 기질이 있는 반면 설홍주는 아주 모범생이란 점입니다.
 
# 한국 추리소설도 괜찮네? 

또다른 한국산 추리소설은 <두 명의 목격자>(최혁곤 등 지음, 황금가지 펴냄)입니다.

 

 

<두 명의 목격자>는 한국 추리소설계의 현재를 이끄는 비교적 젊은 작가들의 추리 단편 모음집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이야기, 다양한 개성을 한 권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제목으로 쓴 단편 <두 명의 목격자>는 살인사건이 벌어진 택시 안의 미터기와 휴대폰이 화자로 나와 대화를 하는 독특한 서술 방식이 특징입니다. 물건이 화자라는 점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빼어난 추리소설 <나는 지갑이다>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 <두 명의 목격자>는 일단 먼저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제 감상평을 한 문장으로 쓰면 "한국 추리, 이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가 되겠습니다. 한국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는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물론 기대에 못미치는 것들이 많지만 이 <두 명의 목격자> 정도면 물건너온 외국 추리물에 견줘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외국 작품보다 오히려 더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소설도 많아 새로운 느낌을 더 많이 받으실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 미야베 미유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
 
올해에도 미야베 미유키와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게임광이자 초능력에 관심 많은 미미 여사는 <크로스 파이어>로 다시 한번 초능력의 세계를 소재로 했습니다. 너무나 뻔한 듯한 이야기여도 미유키가 쓰면 읽을만한 것으로 바뀌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책입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왜 그렇게 초능력을 좋아할까요? 초능력자가 겪게 되는 상황의 의미, 문제, 사회적 관계와 역할 같은 설정은 작가로선 틀림없이 매력적일 겁니다. 그리고 미야베 미유키만의 틈새 장르이기도 하지요. 물론 미야베 특유의 미스터리 요소를 넣어 독자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워낙 그를 좋아하는 탓인지 팬으로서 조금 성에 차지 않습니다. 미야베의 특징은 캐릭터가 늘 전형적 극단적이란 점입니다. 단순명쾌해서 잘 읽히지만 조금 더 캐릭터가 입체적이면 좋겠습니다. <모방범> 같은 작품은 다시 안나올까요.
 

 

항상 기본을 보장하는 작가로 히가시노 게이고만한 이도 없을겁니다. 게다가 올해 출간된 저 <유성의 인연>은 2008년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드라마가 되었을만큼 대중성이 입증된 소설입니다.

실제 <유성의 인연>은 재미 있습니다. 그 설정부터 재미의 정석입니다. 어린 남매가 부모님 몰래 밤에 별똥별을 보러 놀러 나갔다 돌아옵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부모님은 참혹하게 살해 당한 시체가 되어있었습니다. 졸지에 부모 잃은 세 남매는 사기꾼이 되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부모님만이 내던 비법의 음식맛을 내는 식당을 발견합니다. 남매는 부자가 된 식당주인이 부모님을 죽인 원수인지 확인에 나섭니다.
 
<유성의 인연>을 읽은 소감은 미야베 미유키의 <크로스 파이어>를 읽은 느낌과 아주 비슷했습니다. 좋은 책, 읽기 재미있는 책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특별한 작가임을 감안하면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됩니다. 이 책은 너무 깔끔해서 너무 프로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읽은 게이고 책으로는 단편집 <수상한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올해 나온 히가시노의 또다른 단편집<예지몽>도 좋았습니다만 <수상한 사람들>이 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장편의 달인이지만 단편은 도사입니다. 정말 이야기를 잘 만들어 가지고 논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 책은 추리니 스릴러니를 따질 필요가 없이 그냥 `이야기의 힘' 그 자체가 셉니다. 히가시노 팬들이라면 꼭 보시길 권합니다.
 

 

 

물론 <예지몽>도 괜찮은 책입니다. 무엇보다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으로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용의자 X의 헌신>의 명탐정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가 등장한다는 점 만으로도 <용의자 X~>를 읽은 독자들은 무조건 집어들게 되는 책입니다. 

히가시노가 만든 여러 주인공 중에서도 이 유가와는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요소가 많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는 천재로 셜록 홈즈처럼 이야기만 듣고도 척척 풀어나는 스타일이어서 우리가 늘 생각하는 탐정의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분신처럼 여기는 캐릭터 가가 형사의 경우 좀 밋밋한 편이어서 오히려 유가와가 독자들에겐 더 매력적입니다.

 

예지몽은 단편집이어서 유가와의 매력을 장편처럼 긴 호흡으로 맛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황당할 정도로 특이한 설정을 척척 풀어나가는 게이고식 미스터리의 매력을 느끼기는 충분합니다. 그래도 책의 분량이 적은 편이어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분명합니다.
 
# 그리고 추천하는 책들

 

결말이 좀 허무해지는 단점이 있지만 그 흡입력만큼은 최고였던 책으로는 <차일드 44>를 꼽고 싶습니다. 이 책, 정말 계속 읽게 됩니다.

 

 

 

<차일드 44>는 이런 류의 소설 특유의 분위기가 아주 일품입니다. 억압과 통제 속에 살아가는 구 소련을 무대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몸담고 있는 조직 내부의 권력투쟁과 정치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엘리트 수사관이 경쟁자의 음모로 좌천 당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꿋꿋이 연쇄살인마를 잡아 되살아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스토리는 단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암투의 소용돌이 묘사가 실로 실감납니다.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엘리트가 주인공인 점에서 <차일드 44>와 비슷한 소설로는 일본 경찰소설 <은폐수사>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만 가능한, 일본이어서 나올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이 아닌 우리가 읽어도 무척 재미있습니다. 적어도 장르소설에서 전문성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 독자는 `소설가의 장인정신이 느껴진다'고 평했더군요.
 

 

영화 <춤추는 대수사선>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일본 경찰은 현장에서 발로 뛰는 그룹과 행정 조직에서 일하는 엘리트 그룹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들 엘리트 그룹은 일본 경찰 내에서 `캐리어'라고 불리며 출세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합니다.
 
이 책 <은폐수사>의 주인공은 바로 이 캐리어 중에서도 엘리트로 언론 공보관인 경찰 간부입니다. 지독한 출세주의자면서도 꽉 막힌 원칙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이 주인공이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경찰 내부 누군가와 연결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을 은폐하라는 압력속에서 원칙주의자 주인공은 거짓을 말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혼란을 겪습니다. 거기에 아들 녀석이 마약을 복용하는 일이 터집니다. 출세를 위해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 엘리트주의자 주인공은 자신과 가족, 경찰의 명예를 모두 지키기 위해 잘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탈출 방법을 찾아냅니다.

 
<은폐수사>를 읽으면서 어찌보면 정말 사소한, 일반 미스터리에서 다루지 않는 조직내 출세경쟁의 일상적 사건 하나를 가지고 이런 숨막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의 힘에 놀랐습니
다. 그리고 일본 특유의 `경찰소설' 전통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경찰을 좋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와 다른 것은 경찰들의 세계를 깊숙하고 사실적으로 다루면서 경찰의 자긍심을 높여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경찰이란 직업의 명과 암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 꾸준히 나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점입니다.
 
제목부터 경찰소설임을 알 수 있는 <경관의 피>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올해 출간된 이 장편은 온가족이 경찰인 집안의 이야깁니다.
 

 

이 책은 미스터리이면서도 그 보다는 3대에 걸친 경찰 집안의 일대기에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미스터리로 흥미롭게 시작해 대하 드라마처럼 끝나기는 합니다만 도입부의 힘이 무척 세서 한번 읽으면 끝까지 읽게 됩니다. 일본적이고 독특한 장르를 만나보고 싶다면 한번 도전해볼만합니다.

 
올해 나온 스릴러&추리&미스터리 중에서 기억에 남는 또다른 작품으로는 <신주쿠 상어>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선보였다가 다시 나와 더 반갑습니다. 개인적으로 올해 최고의 표지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선 대단한 인기였던 이 <신주쿠 상어> 시리즈가 한국에서 인기를 얻기는 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한국에선 이런 하드보일드한 소설의 장르적 매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온 지 제법 오래 되어 지금 보면 별 대단치 않아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류의 소설들이 그 뒤로 많이 나왔으니까요.
저 역시 정말 십몇년 만에 다시 읽으니 예전처럼 경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런 유명 작품들이 세월을 극복하고 다시 출간되는 것 자체는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정말 독특한 책으로는 <이미 죽다>를 빼놓기 어렵습니다. 표지는 좀 안습이어도 내용은 정말 최신 트렌드인 책입니다. 요즘 대중문화 최고 인기 아이콘인 뱀파이어와 스릴러가 만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아주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설정과 스타일만큼은 뛰어납니다. 역시나, 영화 <블레이드> 제작팀이 영화화한다는 군요.
주인공은 뉴욕의 탐정인데 실은 뱀파이어입니다. 인간 세계 속 숨은 뱀파이어 세계 속의 암투에 휘말리며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하드보일드의 느낌을 잘 살린 스타일 그 자체로 승부하는 소설입니다.
 

 

<벨로시티>는 2009년 최고였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딘 쿤츠가 왜 잘나가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저 깔끔한 표지도 맘에 듭니다.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반전이 기가 막히고 추리 과정이 기발한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읽게 만들기 위해선 주인공을 옭아매는 범죄 설정이 기발해야 합니다. 벨로시티는 그런 점에서 아주 모범적입니다.
평범한 바텐더 주인공에게 왠 쪽지가 옵니다. 쪽지를 경찰에게 전하지 않으면 금발 여선생을 죽이고, 전달하면 할머니를 죽이겠다는 겁니다. 주인공은 별놈 다봤네 하며 웃어 넘겼는데 정말로 여선생이 죽었다는 뉴스가 나옵니다. 그리고 두번째 쪽지. 이번에는 쪽지를 알리면 아이가 둘인 어떤 엄마를 죽이고, 알리지 않으면 미혼 남자 하나를 죽인답니다. 어떻게 해도 사람이 죽는 골때리는 상황이 된 주인공, 범인 찾으러 갑니다. 빨아들이는 힘 하나는 대단한 설정입니다.

 

# 이 작가, 그 엽기 작품 쓴 작가 맞아?

 

 

올해 가장 의외의 책은 <인형 탐정이 되다>를 시작으로 하는 `인형탐정 시리즈'입니다.
주인공은 인형으로 공연을 하는 복화술사. 그런데 자아가 분열되어 두 개입니다. 진짜 자신,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정체성이 인형인 또다른 자신. 복화술사 본인과 달리 인형인 또다른 자신은 천재적 추리력을 가졌습니다. 이 인형이 사건을 푼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무척이나 귀여움을 강조하는 팬시한 10대 하이틴 로맨스, 또는 시트콤 풍의 소설입니다.
 
이 시리즈가 의외인 이유는 이 소설의 지은이가 바로 잔인하고 충격적인 내용으로 유명한 <살육에 이르는 병>을 쓴 아비코 타케마루이기 때문입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은 반전이 돋보이는 미스터리를 꼽을 때 늘 이름이 오르는 작품입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반전으로 유명한 것 이상으로 끔찍한 묘사로도 유명합니다. 잔인한 내용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 미스터리 소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18세 미만 구독불가' 소설이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국이 딱지를 붙인 것이 아니라 출판사가 알아서 18금 신청을 했다는 점입니다.

 

 

저 <인형, 탐정이 되다>는 정통 미스터리와는 좀 거리가 멀고 가볍게 읽을 책입니다. 이런 가볍고 귀여운 소설이면서 미스터리 느낌이 더 들어간 책으로는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루피너스 탐정단의 당혹>이 있습니다. <인형~>보다는 더 재미있고 더 코믹합니다. 예전 <세자매 탐정단>처럼 일본 특유의 만화처럼 과장된 캐릭터들이 웃음을 주는 미스터리를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그런데 2편인 <루피너스 탐정단의 우수>는 분위기가 또 달라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 추천할만한 책들이 많습니다만 너무 길어지는 듯해 조금만 더 덧붙입니다.
 

 

경찰 내부에서 비밀 특별 수사팀을 만들어 법으로 해결 못하는 사건을 법 이외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실종 증후군> <유괴증후군> <살인증후군> 시리즈는 처음 읽을 때 마치 예전 인기 미국 드라마 를 연상할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다만 마지막 <살인증후군>이 앞 편의 재미를 확 깨어버린 것이 아쉽습니다.

 
# 그리고 누가 뭐래도 최고-<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

사실 제가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은 가이도 다케루의 <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입니다. 2008년 10월에 나왔습니다만 2009년 읽은 모든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가이도 다케루는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입니다. 실제 의사여서 현장감과 전문성이 살아있는 의학 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국내에선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의 의사-수사관 명콤비 시리즈 3부작이 소개되었습니다. 이 시리즈의 첫 편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과 <나이팅게일의 침묵>은 정말 꼭 권하고 싶은 소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마리아 불임클리닉의 부활>은 그 못지않거나 그 이상이었을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병원이란 공간을 무대로 생명이란 것의 가치를 이런 식으로 재미있게 쓸 수 있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직접 출산을 하지 않는 남성들은 더욱 꼭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재미와 감동 모든 점에서 최고점을 주고 싶습니다.
 
이 밖에 `청소년 소설'이란 관념을 사정없이 깨버리는 독특하고 유명한 청소년 문학의 고전 <텐더니스>, 왜 존 그리샴이 대단한 작가인지 보여주는 <어필>, 추리문학의 고전이자 뒤에 붙어있는 `추리소설의 법칙' 부록만으로도 추리팬들에겐 소장가치가 있을 책인 <파일로 밴스의 정의> 등도 2009년 기억에 남는 책들입니다.
 
한편 장기 인기 시리즈들에 대해선 애증이 교차합니다.
익숙한 설정을 반복하지만 알면서도 늘 보게되는 덱스터 시리즈의 <어둠속의 덱스터>, 긴다이치 탐정 시리즈의 <밤산책> 같은 책들이 적어도 중간은 했다면, 캐시 라익스의 <크로스 본즈>와 패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 최신작 <데드맨 플라이>는 실망스러웠습니다. 힘이 빠지는 느낌이 역력했습니다. 리 차일드의 <탈주자> 역시 전편 <추적자>에는 훨씬 못미쳤습니다. 2010년 선보일 신작들이 그런 실망을 메꿔주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