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 탐험하기

내가 탐닉하는 골목 2010/01/01

딸기21 2023. 9. 1. 19:28

서울 한복판에 숨은 사관학교, 그 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공간
 



서울 한복판,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미국 대사관저쪽 덕수궁 돌담길,
터벅터벅 걸어 광화문쪽으로 가다보면 덕수초등학교와 이웃해있는 건물이 있습니다. 서울 시내에 있는 뜻밖의 `사관학교'입니다.
 


 
얼핏 보기만해도 연륜이 묻어나는 빨간 벽돌 건물입니다. 하얀 돌기둥과 삼각형 지붕이 딱 보기에도 학교 본관을 연상시킵니다.

도대체 무슨 사관학교일까요?
육군사관학교도, 해사도, 공사도 아닌 특별한 사관학교입니다. `구세군사관학교'. 추운 겨울마다 자선냄비로 사랑을 모으는 구세군을 상징하는 건물, 구세군 중앙회관입니다. 건물 이름이 2개인 근현대 문화재 건축물입니다.
 
제가 구세군 중앙회관 앞을 지나가는것은 잘 해야 2~3년에 한번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앞을 갈 때마다 이 건물에서 꼭 들러서 엿보는 곳이 있습니다. 회관 건물과 바로 옆 부속 건물 사이로 난 틈입니다.
 


 
이 건물 사이로 난 작은 길입니다. 벽돌 건물과 벽돌 건물 사이로 난 길 바닥도 벽돌입니다.구세군중앙회관 앞을 지날 때면 꼭 건물과 건물이 만나 살짝 틔워놓은 이 벽돌 골목(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짧은 남의 건물 뒷쪽)에 몰래 들어가보곤 합니다. 덕수궁 근처에 갈 때 즐기는 혼자만의 쑥스런 비밀놀이입니다.
 



겨우 10미터 정도나 될까요, 건물 뒤편으로 가는 아주 짧은, 이 건물 사람들만 다닐 길입니다. 그래도 몰래 엿보는 것은 이 짧은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갑자기 일상에서 벗어나 어떤 특별한 시공간으로 들어온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왼쪽도 벽돌, 오른쪽도 벽돌, 아래도 벽돌, 그리고 윗쪽으로 들어오는 빛, 벽돌에 난 이끼의 푸른색... 그 느낌에 잠시 취하게 됩니다.
 


 
사알짝 들어가서 뒤를 돌아보면 들어온 골목 입구가 보입니다. 저 바깥과 이 안이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몇걸음 차이로 벌어지는 이런 풍경의 차이, 느낌의 차이가 반갑고 즐겁습니다. 그리고 벽돌로 가득한 공간이 주는 특별한 느낌이 좋아서 살금살금 들어가보게 됩니다.

구세군중앙회관은 건물 자체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숨은 공간을 거느렸다는 점에서 저는 구세군중앙회관이 진정 멋진 건물, 좋은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사동에 갈 때마다 들르는 골목
 
구세군중앙회관 건물 뒷쪽으로 향하는 좁고 짧은 길을 보면 건물 두개만으로 얼마든지 멋진 골목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물과 건물이 아름답게 만나는 것이 도시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새삼 생각해보게 되는 장면입니다.
두 건물만 만나도 저렇게 공간이란게 천변만화하는데, 여러 건물들이 만나고 이어지면서 그 사이로 골목길이 생길 때 도시에는 얼마나 다양한 풍경과 표정이 생겨날까요.
 
골목이란게 참 묘합니다. 좁고 불편해도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 골목을 보면 참지 못하고 꼭 들어가보게 됩니다. 앞에 사람이 오면 서로 몸을 옆으로 돌려야 엇갈릴 수 있는 좁은 골목일수록 더 재미가 있습니다. 제가 탐닉하는 몇가지가 있다면 그 중 하나가 골목입니다. 그 중에서도 좋아하는 골목이 `구리우물길'입니다.
 
덕수초등학교 근처에 가면 저 틈새를 엿보듯, 인사동이나 낙원상가 부근을 가면 이 작은 골목길에 꼭 들어가보곤 합니다. 저 좁은 사잇길이 구리우물길입니다.
 


 
인사동에 갈 때 시간이 나면, 왠지 혼자 걷고 싶으면 가는 저 골목에 갑니다.

유명 음식집 민가다헌으로 가는 수도약국 골목으로 가다 술집 평화만들기쪽을 들어가도 되고, 허리우드 극장 뒤쪽에서 건국주차장 골목 말고 좀 더 가서 이 좁은 입구로 들어가도 됩니다. 너무 빨리 걸으면 입구가 하도 좁아 골목이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저 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양쪽 벽의 질감이 마음에 들어서입니다. 구세군중앙회관 틈새처럼 벽돌벽도 있고, 시멘트를 뿌린 예전 벽들도 있습니다. 벽돌에, 보도블럭에, 시멘트 알갱이벽에 비친 산란빛이 빚어내는 명암 차이가 묘한 분위기를 냅니다.

그럼 좀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구리우물길 집들은 주거용 건물과 식당 건물들입니다. 저 골목 안에 우물은 없습니다.

왜 이름이 구리우물길인지 찾아봤는데 옛날 견지동에 있었던 전의감 앞 우물이 구리 벽돌로 쌓아서 물을 뜰때마다 쇳소리가 나서 `구리우물'로 불렸고, 그 동네가 구리우물골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저 구리우물길은 견지동에서 좀 떨어진 경운동 부근입니다. 저 구리우물골이 지금 이 구리우물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유래야 어떻든 구리우물길은 참 좁습니다. 그리고 길지도 않습니다. 한 두번 돌면 끝, 중간에 한번 갈라지는 정도입니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별천지에 들어간 듯한 느낌입니다.



인사동답게 이 좁은 길 안에도 화랑이 있다는 수작업 표지판도 붙어있군요.



저렇게 시멘트를 흩뿌리는 벽, 이젠 유행이 지나고 단독주택 건물들이 줄어들면서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나름 일대를 풍미(?)한 기법인데, 이 골목길에선 주종을 이루는 디자인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옆으로 꺾어지는 방향으로 들어가면 조금 다른 느낌 골목이 이어집니다.



뻔하고 흔한 벽돌이래도 모양이 반복되면서 독특한 공간감을 만들어냅니다.
 



지나가는 제 눈에는 사는 곳이 아니어서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저 좁은 길을 다는 주민들은 좀 불편하실 겁니다. 차가 다니지 못한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 엄청난 제한이 되니까요.

  

인사동이란 유명한 동네에 있지만 이 골목은 늘 조용하고 다니는 사람도 없습니다. 인사동의 그림자 같은 곳이라고 하겠지요. 그래도 인사동에 갈 때면 이 곳이 생각납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올 때 일부러 동네 골목을 꼬불꼬불 이어다니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나 자신이 도시와 함께 부대끼고 어울리고 즐기는 방법이 많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사는 동네가 아니고 내가 퇴근하는 길이 아니어도 마음에 드는 곳은 있을 수 있습니다. 남들 모르게 혼자 `내 마음의 골목' `내 마음의 거리'를 정해 놓으면 어떨까요?

괜히 낭만적이고 싶을 때, 혼자서 헤매보고 싶을 때 그 골목에 가서 자기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며 즐겨보는 것, 나름 재미있습니다.

새해에는 여러분들만의 골목을 하나씩 발견하시면 좋겠습니다. 서울이 칙칙해도 혼자 즐기는 재미가 있으면 제법 정이 든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