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 탐험하기

내 마음의 신촌역, 슬픈 아름다움

딸기21 2023. 3. 15. 13:32

2009/12/24

 

지난번에 화랑대역을 다녀오면서 오랫 동안 잊었던 신촌5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생각이 제법 간절했던지 지난 10월 어느날, 신촌에 간 차에 절로 발길이 신촌역으로 향했다.
 
철없던 시절 이 역에서 기차 타고 백마로, 장흥으로 가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곤 했다. 친한 친구를 만나러 금촌에 갈 때도 이 역에서 기차를 탔다. 그래서 신촌역을 볼 때마다 난 늘 상념에 빠지곤한다.
 


 
신촌역에는 지하철 신촌역과 기차역 신촌역이 있다. 이 기차역 신촌역에서 기차를 타본 지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도 난 신촌역이라고 하면 기차역이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기차는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힘이 세다.

비유하자면, 지하철은 드라마고 기차는 영화다. 사람들은 드라마를 즐겨보지만 특별하게 기억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단 두시간이지만 늘 머리속에 확실히 남는다. 기차역이 그렇다.
 
내가 신촌역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러나 개인적 추억보다도 실은 간이역 특유의 귀엽고 아담한 모습 때문이다. 

신촌역은 커다랗지만 특색은 없는 요즘 민자역사들보다 건축적으로 훨씬 더 매력적이다. 몸집은 작아도 더하고 뺄 것이 없어보이는 깔끔한 디자인이 당당하다. 사실 건축물이란 큰 것보다 작은 것들이 훨씬 더 명쾌한 법이다. 그래서 간이역이 매력적인 것이다. 신촌역은 간이역 중에서도 특히 귀여운 역이다.


백마가 사라지고 금촌 살던 친구도 이사간 뒤로는 신촌역에 갈 일이 없었다. 그래도 늘 신촌을 지날 때마다 반갑게 쳐다보게 된다. 정신없는 신촌 거리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의젓한 모습을 보면 내가 신촌에 온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2007년 신촌역이 민자역사로 바뀐 뒤부터는 신촌역을 바라보는 것이 편하지 않게 됐다. 신촌역은 용도가 다했어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덕분에 헐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아도 살아남은 것 같지가 않다. 이름만 민자역사일뿐 본질은 쇼핑센터인 괴물같은 새 건물이 이 꼬마역을 짓누르며 그 옆에 우뚝선 탓이다.

 


 
그 위용에 눌린 신촌역의 모습은 애처로울 정도로 작아보인다. 그 모습을 보면 늘 가슴 아프다. 오랜 세월 신촌의 중심이었던 역, 사람들이 사랑하는 저 역을 다루는 철도청과 지자체의 태도를 보면 울화가 치민다. 민자역사의 위세에 눌려 더욱 코딱지 만해보이는 신촌역, 신촌역과 대비되어 더욱 괴물처럼 보이는 쇼핑센터. 두 건물의 희한한 공존은 내 눈에는 신촌이란 지역에서 최고의 코메디이자 비극처럼 보인다.
 
좌우지간 다시 찾아간 신촌역은 이제 이용하지 않는 박제 건물로 남아있었다. 예전에는 벽이 하늘색이었는데 이젠 노란색 칠을 해놓았다. 그리고, 그 모양도 바뀌었다.

 


원래 신촌역 자료 사진이다. 자세히 보면 건물 좌우가 바뀌었다. 세모지붕 입구가 건물 오른쪽이었는데 지금 건물은 왼쪽으로 좌우변환이 되어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신촌 새 민자역사를 지으며 저 원래 신촌역은 해체, 복원된다. 그 과정에서 대합실이 새 역사 입구를 가리게 되어 대합실을 건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나마 원래 민자역사를 새로 짓기로 했을 때는 저 역을 철거할 계획이었다. 1920년 지은 신촌역은 작은 간이역이어도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철도역인데, 아주 간단히 없어지게 되어버렸다. 많은 이들이 반대에 나섰고, 간신히 역은 살아남았다. 대신 저렇게 좌우가 바뀐 것이다. 

 


 
문은 잠겨 있었다. 그리고 현대식 역사와 저 옛 역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었다. 신촌역을 한바퀴 돌아보려 그 길 사이로 들어갔다. 


 
모처럼 다시 보니 정말 작았다. 예전에도 이렇게 작았나 싶을 정도로 작았다. 추운 겨울에는 대합실도 어찌나 추웠던지 오들오들 떨며 기차를 기다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플랫폼으로 나가던 뒷문. 이제 플랫폼은 사라졌다. 그래도 간이역 특유의 차양이 의젓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반가웠다.

 



저 차양막 아래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서울 북쪽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목적지로 떠났다.

80년대 청춘들에겐 기껏해야 백마며 금촌까지 가는 노선이었지만 분단 전까지 신촌역은 경의선 출발역으로 대륙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통일이 되어 경의선이 대룍까지 이어지면 중국과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그 머나먼 철도길의 종착역은 프랑스 파리 북역이 된다. 그래서인지 이화여대 부근에는 `북역'이란 카페도 있다고 한다. 신촌역과 파리가 이어진다, 생각하기만해도 묘하다.

 


 
정말 오랫만에 차양막 아래 서 보았다. 금촌으로 향하는 촌로들, 머리에 짐을 인 아줌마들, 얼굴이 대낮부터 불었던 아저씨들이 묵묵히 기차를 기다리던 풍경이 떠올랐다. 기차를 타면, 빛바래고 닳은 비로도같은 쿠션이 좌석에 있었고 그 아래 히터에서 뜨거운 난방이 나왔다. 멀리 가는 아줌마들은 아예 쿠션 위에 반대로 앉아 창밖을 보면서 등받이와 쿠션 사이의 홈에 발을 집어넣고 난방 기운데 발을 녹이곤 했다.

 

 


안으로 들어가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관리의 어려움 때문일테지만 저 안에 들어가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작지만 아름다운 역과 친해질 수 있을텐데 말이다. 
 
한바퀴 역을 돌아본 뒤 한발짝 떨어져 다시 역사를 본다. 임석재 교수가 평했듯 `한국 간이역 특유의 비대칭 미학'이 잘 드러난다. 삼각 지붕을 큼직하게 배치하고 가장자리 각을 척척 잘라낸 경쾌한 디자인이 멋지다.
 
서울에 있는 간이역은 신촌역과 화랑대역 두 곳 뿐이다. 그 중에서도 신촌역은 시내 한가운데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고 중요하고 정다운 역이다. 이 역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거대한 민자역사 틈바구니에 찌그러든 모습은 아무리 봐도 영 못마땅하다. 그냥 길에서 지나다니는 우리는 작은 역이 옆에 그냥 붙어있구나 싶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참 옹색 궁색한 풍경이 펼쳐진다.

 


 
부근 건물에 올라가 보니 민자역사와 옛 신촌역의 대비가 실로 극명했다. 이제 할일 다하고도 눈치없이 회사 앞에 나와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퇴직자같은 모양이었다. 꼭 저렇게 새 역사를 바짝 붙여서 지었어야 했을까. 그저 신촌역이 남아 있는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하는건지... 내려다보는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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