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도시에서 만난 풍경들
이 아름다운 도시의 분위기에 연인들은 절로 취한 모습이었다.
고풍어린 도시, 아름다운 다리, 그리고 밤. 이 세가지가 어울린 곳에서 연인들은 그들만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피렌체.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말하면 좋을까?
아마도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아 아름다운 도시라고 해야겠다.
이탈리아 대부분 명소들이 그렇듯 피렌체의 하늘도 푸르디 푸르고, 그 아래에선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저 하늘이 아니어도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그 자체로 아름답고, 하늘 아래 도시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그리고 밤이 되면 피렌체는 낮 못잖게, 그리고 낮과는 또 다르게 다가온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는 꼭 봐야할 것들이 한 두 곳이 아니다. 우선 윗 사진 오른쪽, 피렌체 전경을 찍으면 무조건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거대한 대성당을 빼놓을 수 없고, 왼쪽으로 성당과 마주보며 우뚝 솟아있는 베키오궁도 있다.
그러나 이런 거대한 것들이 아닌 소소한 것들도 아름다웠다.
명품 브랜드 구치의 본사가 있는 도시, 가죽 공예의 본산으로 꼽히는 도시답게 화사한 신발 색깔들도 눈길을 끌었고,
오랜 세월이 배어 있는 이런 돌바닥도 아름다웠다.
특별한 것이 굴러다디듯 모여 있는 이 도시, 피렌체가 자랑하는 세계적 명물들 속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한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 남자를 기리는 조각상이었다. 아니, 그 조각상 주변을 감싼 묘한 분위기였다.
이탈리아가 가장 존경하는 이 남자
피렌체의 상징 중 하나가 산타 크로체 성당이다.
이 아름다운 산타 크로체 성당은 성당인 동시에 묘지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수많은 위인들이 이 곳에 모셔져 있다.
그 면면들은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라도 누구나 아는, 인류사에 남은 진정 위인들이다.
르네상스의 간판 미켈란젤로, 저 유명한 마키아벨리, 과학의 영웅 갈릴레오,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작곡가 로시니까지...
그래서 이 성당은 위인들의 묘를 모아놓은 프랑스의 판테온처럼 ‘피렌체의 판테온’으로 불리는 묘지 성당이다.
그리고 이 성당 앞에는 이 위대한 영웅들의 도시가 가장 내세우는 인물의 조각상이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피렌체가 낳은 수많은 위인들 중에서도 피렌체는 유독 이 인물을 가장 상징적인 성당 앞에 조각상까지 세워 기리고 있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독수리마저 올려다 보는 인물. 치열한 정신으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본 인물이다.
그 정신을 조각상은 잘 드러내고 있다. 돌로 빚어도 형형한 눈빛으로 그는 저 거대한 성당을 뒤로 하고 어딘가를 바라본다.
이 사람이 바로 단테다. 피렌체가 낳은 이 위대한 사상가, 또는 예언자는 새로운 시대 정신을 이끌었다.
그의 작품 <신곡>은 (실제로는 아무도 읽지 않지만) 인류의 고전이 되었고, 라틴말을 쓰던 시대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 그는 이탈리아의 정신적 지주이자 위대한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무덤은 비록 이 성당이 아니라 라베나에 있지만, 피렌체는 그를 자기 도시의 대표로 꼽고 있었다.
단테의 이 조각상은 분명 대단했고, 훌륭했다.
그러나 내가 사로잡힌 동상은 이 동상이 아니었다. 그 조각상 역시 단테를 조각한 것이지만 이 조각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골목 안에 있어 더 아름답고 경쾌한 동상을 만나다
진정 아름다웠던 그 조각상은 단테의 생가에 있었다. 수백년된 집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골목길 중간에 있는,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그냥 `집 같은 집‘이 단테의 집이었다. 특별할 것은 없지만 돌을 쌓아만든 그 느낌은 실로 매력적이었고, 위대한 인물이 살았던 집이란 점에서 그 분위기는 범상찮았다.
그리고, 이 집의 주인공 단테의 얼굴이 여기 있었다.
조각은 실로 작았다. 집 벽에 튀어나온 부재들 중 하나인 양 작은 돌 받침 위에 작은 흉상을 올렸을 뿐이었다.
산타 크로체 성당 앞의 젊고 예리한 단테와 달리 생가 앞 단테는 나이들고 피곤에 지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 조각상과 크기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소박했다.
그러나 그래서 더 이 흉상은 마음을 움직인다.
흉상이 된 단테는 이번에도 정면이 아니라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꿈꾼 새로운 세상을 응시하고 있으리라.
조각을 작게 만든 것은, 이 좁은 골목 안에 맞게, 그리고 성당처럼 크지 않은 생가 건물의 규모에 맞게 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동상을 벽에 붙여 올리는 처리는 실로 경쾌했고, 옆으로 살짝 틀어 올린 그 감각이 멋졌다. 산타 크로체 성당 앞, 아폴론 같은 젊고 웅혼한 영웅의 얼굴이 아니라 고뇌하는 스승의 얼굴처럼 묘사한 조각가의 생각도 와닿았다.
돌의 질감이 잘 살아나는 벽, 그리고 역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길바닥, 옆에는 오래된 우물까지 있는 그윽한 골목에 가장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저 동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꽃
그리고 저 동상 아래에 눈길이 꽂혔다. 절로 그리고 눈이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이 위대한 인물에게 꽃을 바쳤다. 바닥에는 헌화대가 따로 없었기에 그는 그냥 꽃을 돌바닥에 놓았다.
비가 내려 색깔이 더욱 짙어진 돌바닥 위에서 꽃은 더 또렷하게 보였다.
그냥 꽃가지를 놓은 것이 아니라 벽과 바닥이 만나는 곳에 줄지어 바친 꽃. 꽃을 하나 하나 떼어내 저 움푹한 모서리에 맞게 정성껏 놓았다. 누가 가져온 꽃이었을까. 알 수는 없었다.
그냥 붉고 노란, 그리고 송이가 작은 평범한 꽃이었지만 저 꽃을 줄세워 모서리 면에 놓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화려하고 근사한 화환보다도 저 꽃이 더 아름다워보였다. 꽃을 바치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인데, 저 꽃을 놓은 이는 놓는 방법도 아름답게 디자인해 놓아두었다.
큰 기대를 않고 찾아간 단테의 생가는 예상 이상으로 소박했다. 그러나 피렌체에 머문 짧은 기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보여줬다. 조각은 작았지만 근사했고, 그 아래 누군가 가져다 놓은 꽃은 조각 이상으로 기억에 남았다.
오랜 세월 빛바랜 돌 벽, 그 울퉁불퉁한 느낌과 잘 어울리는 아담한 단테의 흉상. 그 아래 역시 반질반질한듯 오돌도돌한 돌 바닥. 그 위에 남아 있는 물기, 그 벽과 바닥 사이에 줄지어선 꽃...
그 모습은 연인들에게 키스하고 싶어지게 하는 이 도시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도시 속 탐험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또 못찍은 서울산업대의 숨은 보물 2010/01/05 (1) | 2023.10.18 |
---|---|
내가 탐닉하는 골목 2010/01/01 (0) | 2023.09.01 |
내 마음의 신촌역, 슬픈 아름다움 (1) | 2023.03.15 |
캐나다가 내 눈에 콕 쏘아준 풍경들 2009/10/04 (2) | 2023.01.03 |
비좁음을 판다-골목의 경쟁력이 문화자산이다 2009/08/18 (0) | 2020.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