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성격 최악+성적 꼴찌, 그런데도 불멸의 영웅이 되다 2013/08/08

딸기21 2024. 3. 14. 14:26

성격이 나빠도 성공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 기준으로 보면 `성격이 나빠 성공한' 이들도 많습니다.

건축가들 중에서도 성격 나쁘기로 소문난 이들이 여럿입니다. 그것도 건축의 역사에 길이 남은 거장들 중에서도 말입니다.
자기만의 철학을 위해, 그리고 자기 중심적 사고가 몸에 배어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해버리는 건축가들이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자기 건축을 위해 건축주를 배려하기는커녕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디자인을 살리려고 기능을 빼버렸고, 집을 짓자마자 물이 새서 건축주의 자녀는 병에 걸린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가구를 놓을 위치까지도 정해주고 간섭했습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남들에게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고, 건축주의 부인과 바람이 나서 도망가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건축가도 있습니다. 자기 건축 세계를 추구한다며 매번 건축주의 예산을 훨씬 뛰어넘는 설계를 강요하고, 완공 기한을 어기기 일쑤였고, 착한 건축주에게 거꾸로 소송까지 걸어서 괴롭혔던 건축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건축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건축가가 되었습니다. 성격은 나빴지만 생활은 검소해서, 그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행색이 남루해 노숙자로 착각했습니다. 그 건축가의 이야기입니다.

 

 

"너는 바보냐, 천재냐"-교장의 분노

 

그 학생은 결코 교수들의 교육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 고집쟁이였다. 건축학교 학생인데도 건축 수업에는 들어오지 않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어댔다. 스승의 작품이어도 생각이 다르면 서슴지 않고 비판해댔다. 과제물은 늘 자기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밀어붙여서 한 번에 통과된 적이 없었다. 교수들 사이에서 학생은 늘 논란의 대상이었고, 그 바람에 성적은 늘 꼴찌였다.

 

졸업을 앞두고도 이 막무가내 학생은 혼자만의 독특한 설계안을 내놨다. 너무나 튀어대는 꼴에 화가 난 교장은 결국 졸업에서 그를 탈락시켜버렸다.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장인들의 작업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던 학생에겐 날벼락 같은 일이었지만, 다행히 투표를 통해 구제 받아 간신히 졸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졸업식 날, 교장은 지긋지긋한 말썽꾸러기에게 쏘아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제군들, 내가 오늘 이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바보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네.” 그러자 학생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이제 제가 진짜 건축가라는 것을 보여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 고집불통 학생이 바로 안토니 가우디(1852~1926)였다.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 판 데어로에의 이름을 아는 이는 적어도, 가우디의 이름을 아는 이는 많다. 가우디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건축가가 되었다. 그의 평생의 작품이자 유작, 지금까지 100년 넘게 짓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성당). 일련의 작품으로 가우디는 바르셀로나를 `가우디의 도시'로 만들었다.

 

그 고집 하나를 밑천으로 가우디는 졸업식장에서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건축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건축가로 우뚝 섰다.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그의 이름은 안다. 그리고 가우디의 건축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바르셀로나를 찾아간다. 가우디보다 더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건축가는 많았지만, 가우디처럼 유명한 건축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우디는 평생 힘들고 괴롭고 외롭게 살았던 이였다. 그건 가우디 스스로 자청한 삶이기도 했다. 가우디를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치열함’이었을 것이다. 그 치열함은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함’으로 비쳤다.

 

가우디가 죽기 전까지 40년 넘게 매달린 사그라다 파밀리아. 현재 높이 178미터의 탑을 가운데에 짓고 있다. 이 놀라운 성당은 2026년 완공될 예정이다.

 

가우디를 평생 사로잡았던 것은 ‘자연’이었다. 모든 영감의 원천이 자연이었던 그는 “인간은 창조하지 않는다. 단지 발견할 뿐이다”라고 믿었고, “독창적이란 말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연 속에서 형태의 본질을, 아름다움의 핵심을 포착하는 것은 모든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에게 공통적인 작업이지만 가우디처럼 집요하게 자연을 파고들어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그 방법도 실로 지독했다.

 

대표작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설계할 때를 보면 그는 성당 표면을 장식한 수많은 인체와 동물 형상을 디자인하기 위해 작업장 지하에 동물 시체를 한가득 가져다 놓고 형태를 탐구했고, 병원에 가서 부랑자의 주검들을 직접 골라가며 관찰했다.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 하도 모양이 기괴해 사람들은 `해골 집'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이런 일처리 방식은 주변 사람들에겐 피곤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작업을 할 때면 아예 작업장에서 먹고자면서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지휘했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기괴하다 싶을 정도로 튀는 그의 건축 스타일은 졸업 이후로도 늘 논란을 불렀다. 열광적인 지지자들을 양산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혐오자들을 만들어냈다. 지금이야 가우디의 건축이 세계적으로 숭배를 받아도 당시에는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을 끊임없이 들어야했다. 천박할 정도로 기괴한 것만을 추구했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었다.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건물 중 하나”라고까지 했다. 또 다른 대표작 카사 밀라도 처음 등장했을 때의 반응은 경탄이 아니라 경악에 가까웠다.

 

가우디의 또다른 대표작 카사 밀라. 돌이 물결치는 듯한 형태로 충격을 줬다. 사람들은 `채석장'이라고 불렀다.

 

동시대 사람들이 이처럼 가우디 건물을 싫어했던 것은 당시 서양 건축이 거대한 변화를 거치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모더니즘 건축은 한마디로 ‘절제된 건축’을 지향하고 있었다. 건물을 뒤덮고 있던 장식을 떼어내고 간결하면서도 추상적인 건축, 철과 유리 그리고 콘크리트로 새로운 재료로 새로운 철학을 표현하는 건축이었다.

 

그런데 가우디는 거꾸로 더 장식적이고 더 곡선적인 건축을 추구했다. 그리고 늘 고전적인 재료를 고수했다. 그래서 시대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건축으로 비쳤던 것이다. 여기에 괴팍하고 성격까지 더해져 그는 완벽한 이단아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카사 바트요의 윗부분. 기와지붕은 용의 비늘을 형상화했다.

 

물론 그는 결코 남들의 평가나 비판에 굽힐 줄 몰랐다. “그들(평론가들)은 거의 대부분 자질과 용기가 결여되어 좌절한 예술가들”이라고 조롱하면서 자기 미학을 끝까지 추구했다.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때론 엄청나게 진보적인 동시에 때론 편견으로 비칠 정도로 전통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항상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세상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서도 새로운 시대 이념으로 떠오르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우둔한 지배형태”라고 욕을 해댄 것은 그의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잘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옥상'일 카사 밀라의 옥상. 가우디는 환기구와 굴뚝을 정체 모를 괴물 같은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다.

 

대인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칠 정도로 신앙과 건축에만 매달렸으니 평생 독신이었던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건축주 구엘과는 영혼을 공유하는 동반자 관계가 되었던 반면 카사 밀라의 건축주와는 원수가 되었다.

 

가우디는 카사 밀라를 원래 도면보다 4000제곱미터나 더 크게 지었고, 여러 가지 허가 기준을 멋대로 어겨 건축비용의 5분 1에 해당하는 10만 페세타를 벌금으로 내게 만들었다. 건축주는 꾹 참고 모든 비용을 지불해 가까스로 건물은 완성됐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례금을 놓고 다툼이 벌어져 가우디가 건축주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건축주와 건축가가 소송을 벌이는 일은 물론 그리 드문 것은 아닌데, 이 소송의 결말은 너무나 ‘가우디스러웠다’. 재판에서 이긴 가우디는 건축주 부부가 건물을 저당 잡혀 마련한 10만 페세타를 지불하자 바로 모두 종교단체에 기부해버렸다.

 

가우디의 작품에는 판타지를 연상시키는 묘한 장식들이 난무한다.

 

말년에 평생의 후원자 구엘이 죽은 이후로 가우디는 더욱 깊은 고독감에 빠져 사그라다 파밀리아 작업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어찌 보면 가우디란 인물에게 어울리는 죽음을 맞았다.

 

일흔네 살이 된 1926년 6월7일, 가우디는 길을 건너다 전차가 오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서 피하려다가 반대 방향에서 오던 기차에 치었다.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전차 운전사와 주변에 있던 택시운전사들은 그를 부랑자로 여겨 그냥 내버려둔 채 가버렸고, 가우디는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져 숨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분신이 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지하에 묻혔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내부는 기괴한 외관과 전혀 다른 반전이 펼쳐진다. 나무처럼 뻗은 기둥이 모이는 천장 모습.

 

가우디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그에 대한 평가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한 신문은 이 외롭고 이상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로 특별했던 건축가에게 이런 헌사를 바쳐 위로했다.

“바르셀로나의 한 천재가 우리 곁을 떠났다. 바르셀로나의 한 성자가 우리 곁을 떠났다. 돌마저도 그를 위해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