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도서관 2010/01/18

딸기21 2023. 3. 15. 14:06

구본준의 만만한 건축 <13>
 
# 눈이 오면 더 빛나는 건물, 눈이 내려 완성되는 건물
 
델프트.
미술 역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화가이자 골수팬 많기로 손꼽히는 화가 페르메이르(국내에선 `베르메르'로 많이 쓰는데, 정확한 표기는 페르메이르입니다)의 도시입니다. 델프트가 낳은 대화가답게 페르메이르는 델프트 풍경을 이리도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저 아름다운 델프트를 대표하는 건축 명물이 있습니다. 90년대 현대건축의 주요작으로 꼽히는 이 건물입니다. 1997년에 지어진 건축가그룹 메카누 아키텍텐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이 건물은 제목에서 말씀드려 예상하셨듯 도서관, 델프트공대의 도서관입니다.
어떻게 생긴 건물인지 쉽게 감이 안오실 수 있는데, 저 잔디밭이 도서관 지붕입니다. 사진 중간 걸어가는 사람 오른쪽으로 도서관 유리창이 보입니다.
그러면 저 원뿔은 뭐냐, 싶으실텐데 뭐 상징이기도 하고, 채광창도 됩니다.
 



저렇게 건물 중간에 저 원뿔이 독특한 공간을 연출합니다. 도서관 메인홀 데스크 위까지 원뿔인데, 원뿔을 기둥 열개가 받치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우주로 곧 발사할 로켓미사일을 연상합니다.
저 원뿔은 특히 밤에는 더욱 매력적으로 변합니다. 안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마치 등대처럼 빛나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햇빛을 받아 들여 도서관 안을 비추고, 밤에는 다시 빛을 뿜는 원뿔입니다.
 
저 원뿔의 내부는 나선형 계단입니다.
 


 
델프트공대 도서관은 도서관스럽지 않은 독특한 디자인, 그리고 경쾌한 색깔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저 파랑색은 메카누가 즐겨쓰는 색으로도 유명하지요. 이 아주 간단하면서도 아주 파격적이고 아주 강하면서도 아주 친근한 이 디자인 하나로 건축가그룹 메카누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건물 단면도입니다. 저 원뿔을 경사진 공간 중심에 놓아 독특한 내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건물의 최대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저 완만한 잔디밭 언덕 지붕이겠죠.
 


 
도서관이라고 하면 누구나 네모 반듯한 상자나 책상 모양 건물을 연상하는데 메카누는 전혀 다른 디자인으로 접근했습니다. 그 디자인을 더 돋보이게 만든 것이 흙으로 덮고 잔디를 심은 저 지붕입니다.
지금은 저렇게 흙을로 덮은 `그린 루프' 건물이 제법 많아졌지만 1997년 당시만해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잠깐 설명드리자면 저런 흙과 식물을 심는 지붕은 일반 콘크리트 지붕에 비해 훨씬 효율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우선 보온 효과가 뛰어납니다. 그리고 지붕 자재를 많이 안쓰기 때문에 당연히 친환경적이 됩니다. 지구에 좋은 방식이죠.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라기 보다는 제가 보기에 즐거운 효과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썰매를 탈 수 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눈이 펑펑 내린다면, 신나게 눈썰매 몇번 타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눈이 와도 도서관에 가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건물에 대해 글을 쓴 한 서양 건축글쟁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메카누는 진정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용해 빛과 창조의 장소인 도서관을 만들어냈다. 과연 어느 도서관의 지붕에서 눈 내리는 겨울에 스노보드를 탈 수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눈썰매야 그렇다고 해도 설마 스노보드를 타겠어? 하실 수도 있을 듯해 사진 올립니다. 스노보드, 정말 탑니다.
 



물론 저 건물을 제가 갑자기 이렇게 포스트에 올리는 것은 올 겨울 폭설로 지겹도록 눈을 보고 있다보니 눈이 내리면 즐거워지는 건물이나 소개해보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눈이 오면 쓸모가 하나 더 생기는 건물, 눈이 내리면 더욱 아름다워지는 건물, 그런 점에서 메카누의 델프트공대 도서관은 특별합니다.
 
저 도서관 때문에 저는 서울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리노베이션을 보고 크게 실망했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디지털도서관을 새로 지어 증축하면서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nbsp;사진제공=정림건축


  
원래 있던 건물 앞에 커다란 유리창으로 꾸민 디지털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디지털도서관 부분만 보시겠습니다. 

▲&nbsp;사진제공=정림건축


그리고 내부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 사진제공=정림건축



건물 외벽이 전면 통유리이고, 내부에 동그란 원형 디자인 조명부를 배치한 점에서 델프트 도서관과 컨셉이 좀 비슷하지요?
 
그런데 왜 저 국립디지털도서관 신축 건물을 보고 실망했느냐,
이미 예측하셨겠지만 바로 이 부분, 지붕 때문입니다.

▲&nbsp;사진제공=이용재&nbsp;건축평론가



아, 그렇습니다. 썰매를 탈 수 없습니다.ㅜㅜ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저렇게 잔디지붕으로 했는데 기왕이면 경사를 완만하게 해서 눈이 왔을 때 썰매를 타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저만의 생각이겠지만 경사가 너무 급합니다... 

▲ 사진제공=이용재 건축평론가



동네 아이들과 학생들이 썰매도 탈 수 있는 국립도서관이라면 멋졌을텐데 말입니다.
물론 도서관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눈썰매 타게 했다가는 안전 사고가 날 수도 있고, 그러면 책임 소재를 따질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또 아이들 많이 오면 신경도 쓰이고 그렇게 될 점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나라에도 눈썰매를 탈 수 있는 건물이 있습니다.
그것도 델프트공대 도서관보다 훨씬 더 썰매타기 좋은 건물입니다.
국립디지털도서관에서는 못타는 썰매, 여기가면 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건물!
 


 
이번 폭설로 건물 앞 넓디넓은 주차장 전체가 눈으로 덮여 더욱 장관입니다.

저 멀리 경사진 지붕에 쌓인 눈, 스노보드를 타고도 남을 듯하군요. 실제 눈썰매 타는 아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무슨 건물일까요?


 
아직도 많은 분들께는 낯선 건물인 듯한데, 아마 경기도 안산시에 사시는 분들은 친숙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산시 초지동에 있는 경기도미술관입니다.
 
눈이 하도 덮여 어떻게 생겼는지 감이 안오실 듯해 평소 모습 사진을 올립니다.

 

 


경기도미술관은 귀도 카날리란 이탈리아 건축가가 설계했습니다. 카날리는 이탈리아 대표 명품브랜드 프라다 공장 등을 디자인했는데, 저 경기도미술관은 앞 호수에 떠있는 한조각 배를 표현했다고 합니다. 넓게 기울어져 설치한 거대한 유리창이 옆에서 보면 돛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경기도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워낙 독특해 한번 가보실만한 곳입니다. 최근에는 뉴역에서 유명한 화가 이상남씨의 46미터짜리 초대형 벽화가 로비에 설치되어 명물이 하나 더 늘었으니 가볼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고 하겠습니다.
 
풍경에 4계절이 있듯 건물에게도 4계절에 따른 표정이 있습니다. 델프트공대 도서관과 경기도미술관은 눈이 왔을 때 전혀 다른 모습이 되는 건축물입니다. 건물이란게 늘 똑같은 모습이지만 날씨와 계절에 따라 그 분위기가 새삼스럽게 바뀐다면 그만큼 더 매력이 많은 건물일 겁니다. 눈이 내리면 썰매를 탈 수 있는 건물, 그런 재미가 있는 건물, 더 많아져야겠지요?
 
뱀다리/ 도서관, 건축의 또다른 경연장
 
앞서 말씀드렸듯 델프트공대 도서관은 도서관 건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깹니다. 도서관이라면 으레 네모반듯한 책상자 같은 건물 뿐이라면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동안 우리나라 도서관들은 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보면 정말 고전적인 도서관스럽게 생겼습니다.
 
대학 도서관들은 어떤가요?

▲&nbsp;강원대&nbsp;도서관
▲&nbsp;덕성여대&nbsp;도서관

 

▲&nbsp;동의대&nbsp;도서관
▲&nbsp;숭실대&nbsp;도서관
▲&nbsp;서울대&nbsp;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보다는 덜 단조롭지만 국내 대학 도서관들 역시 대부분 건축물 자체를 볼만한 재미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아쉽습니다.
 
물론 외국도 오래된 도서관 건물들은 아주 고전적이고 권위적입니다.


 
어느 나라 국회의사당으로 오해하기 십상인 저 전형적인 돌기둥 건물은 미국 콜럼비아대 도서관이라고 합니다. 외국도 대학도서관들은 다 비슷하군요. 
 
그러나 도서관은 건축에서 중요한 장르로 이제 각광 받고 있습니다. 공공성이 다른 어느 건물보다도 강하고 그래서 공공건축의 모범으로서 더욱 신경써서 짓는 도서관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디자인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원래부터 도서관은 건축에서 중요했습니다. 이화여대 새 캠퍼스로 국내에서도 유명해진 프랑스의 도미니크 페로도 파리 국립도서관 건물 하나 화끈하게 지어서 떴습니다. 
서강대 도서관의 경우 한국 건축 1세대 슈퍼스타 김중업의 작품이지요. 지금 봐도 그 모양새가 포스가 있습니다. 대학 도서관들이 다 엇비슷하던 시절에 지었던 건물이어서 더욱 돋보이는 도서관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외국 도서관 잠깐 볼까요?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이토 도요의 다마예술대학 도서관도 현대 건축의 화제작으로 유명합니다.



토론토대학의 로바츠도서관도 독특한 외관이 두드러집니다.


이건 뭐 금방이라도 변신해 날아갈 트랜스포머 같군요.
 
반가운 것은 최근 들어 국내 도서관들도 그 모양이 재미와 다양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건축가 정기용씨의 순천 기적의 도서관처럼 귀여운 도서관도 생겼고, 최근 완공된 김인철 교수의 중앙대 도서관처럼 근사한 도서관들이 하나둘씩 선보이고 있습니다.
 

▲&nbsp;김인철&nbsp;중대&nbsp;건축과&nbsp;교수의&nbsp;최신작&nbsp;중앙대&nbsp;도서관.&nbsp;사진제공=중앙대


공부하고 싶어지는 그윽한 분위기와 자주 가고 싶어지는 재미있는 구석이 잘 어우러지는 도서관이 대학마다 들어서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