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한국에서 가장 슬픈 문, 그래도 가장 멋진 문 2009/08/22

딸기21 2020. 12. 22. 11:17

광화문보다 흥례문을 보라, 잠시 만이라도

 

사람들은 2등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궁궐문들도 마찬가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궁궐은 문이 여러 개다. 그러나 스타는 늘 정문뿐. 두 번째 문은 궁궐 안으로 들어가면서 스치듯 지나쳐버린다.

 

조선 법궁 경복궁의 문도 마찬가지다. 경복궁 안에 수많은 문이 있지만, 누구나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문은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뿐이다. 조금 더 관심이 있어야 동문인 건춘문, 서문 영추문, 북문 신무문 정도의 이름을 기억해준다. 하지만 경복궁에는 그 안에 있는 수많은 건물들 수 못잖게 많은 문들이 있다. 이 크고 작은 문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문이 있다면 단연 흥례문이다.

 

흥례문. 경복궁 중심축 앞쪽에는 문 3개가 나란히 줄서있다. 광화문, 흥레문, 그리고 근정전 앞 근정문이다. 흥례문 이름에는 예절 예(禮)자가 들어갔다. 인의예지신 5가지 덕목 가운데 예는 오행에 따르면 남쪽에 해당한다. 남쪽 문이니 예자를 넣은 것이다. 남대문인 숭례문에 예가 들어간 것과 같은 이치.

 

흥례문은 광화문 다음으로, 아니 광화문 못잖게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문이다. 건춘문·영추문·신무문도 그 아름다움과 규모 면에서 흥례문에는 감히 비길 바가 못 된다. 광화문 바로 다음 나오는 문이자 본격적으로 궁궐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문이니 당연히 멋지게 꾸며 지었다. 건춘문이나 영추문은 오히려 사람들이 드나들 일이 드물지만, 흥례문은 경복궁에 가면 누구나 반드시 거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문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름은 관심 밖이고 그저 ‘경복궁에 들어갈 때 입장권 받는 사람들이 있는 문’ 정도로만 여긴다. ‘넘버 2 궁궐문’의 비애이자 숙명이다. 

 

흥례문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은 두 번째 문의 숙명 탓도 있지만 또 다른 특별한 사연 때문이기도 하다.

 

흥례문은 지금의 30대 이상들에겐 더욱 낯설고 생소한 문이다. 그들이 어린 시절 경복궁에 갔을 때에는 이 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흥례문은 만든 지 10여 년밖에 안 된 새 문이다. 문에도 팔자와 운명이 있다면 흥례문처럼 팔자가 슬프고 기구한 문도 없다.

 

경복궁을 남쪽에서 입장할 때 입장권 내는 문이 바로 이 흥례문이다. 이 문 안이 진짜 궁궐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입장한다. 그 의미 이상으로 이 문은 역사적으로 아픈 사연을 겪어야 했던 실로 처절하고 파란만장한 문이다.

 

그러면 흥례문은 왜 없어졌던 것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가 경복궁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수난을 당했던 문이 바로 흥례문이다. 일제는 1914년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며 흥례문을 헐어 없애버렸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광화문은 정문이다 보니 옆으로 옮겨버리긴 했어도 놔뒀지만, ‘넘버 2’ 흥례문은 가차 없이 경복궁에서 도려내버린 것이다.

 

사라진 흥례문이 경복궁에 다시 돌아오는 데에는 거의 1세기가 걸렸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을 헐어버리면서 흥례문은 복원됐다. 역사적 의미와 별개로 총독부 건물을 파괴하는 것은 비문화적이라는 말도 많았지만, 어찌됐든 흥례문을 파괴하고 들어선 조선총독부 건물이 다시 파괴된 덕분에 흥례문은 되살아나게 됐다.

 

그리고 이 문이 복원되면서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는 넓은 광장 같은 공간이 생겼다. 두 문의 사이는 생각보다 멀어 거의 100m나 된다. 족히 7천 명이 모일 수 있는 거대한 국가적·상징적 공간이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도 이곳에서 열렸던 것이다. 이 너른 공간의 주인이 바로 흥례문이다.

 

이 각도에서 보는 흥례문의 모습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다. 우진각 지붕이 팔작보다 둔해보일 때도 있는데 이런 비례와 각도는 팔작지붕이 못따라오는 우진각 지붕만의 맛이 있다.

 

요즘 광화문을 목원하면서 경복궁은 잠시 정문이 사라진 상태다. 덕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흥례문이 경복궁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이하는 얼굴 역할을 하고 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이 잠시 보이지 않는 것을 아쉬워 말고 대신 그동안 눈길을 덜 줬던 이 문을 잠깐이라도 주목해보면 어떨까.

 

우리는 이 건물이 되돌아온 슬픈 사연을 종종 잊는다. 그리고 이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도 쉽게 지나치곤 한다. 흥례문은 새 건물이어서 건물에 밴 세월의 무게는 덜해도, 그 아름다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앞에서 봐도 멋있지만 옆에서 보면 더욱 매력적인 건물이다. 거대한 2층 기와지붕이 날렵하고 경쾌해 보이는 그 비례에 절로 감탄하게 될 것이다. 이 멋진 문이 사라졌던 과거가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플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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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겨레21>에 연재중인 칼럼 `시험에 안나오는 문화'에 쓴 칼럼이다.

연재 칼럼은 매번 뭘써야 하나 막판까지 고민하게 된다. 지난주에도 글감을 찾아 궁리하다가 막판에 고른 것이 흥례문이었다.

 

문득 흥례문이 떠오른 것은 최근 경복궁에 다녀와서였다. 경복궁의 얼굴인 광화문은 강익중 화백의 작품 가림막을 뒤집어쓰고 한창 복원중이었다. 문득 그 모습을 보면서 항상 광화문 뒤에 가리는 흥례문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잘 생긴 문을 우리는 그냥 지나치곤 한다. 흥례문은 넘버2 문이지만 그 모양만은 넘버 1 못지 않다. 이렇게 두번째 문에 공들인 경우는 경복궁이 유일하다. 경복궁이 공식 궁궐, 그러니까 법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위 사진 속 문은 창덕궁의 넘버2 대문인 진선문이다. 창덕궁 돈화문이 그 위용 면에서 광화문에 비길 바가 아니듯, 두번째 문인 진선문 역시 흥례문과 비교하면 소박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다. 또다른 궁 덕수궁은 원래부터 궁궐이 아니었던 탓에 넘버2 문이 아예 없다. 그런 점에 비춰보면 흥례문이 얼마나 신경쓴 문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건축적 특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사속 이렇게 아픔을 겪은 뒤 돌아온 이 문의 사연일 것이다. 그 사연이 사람들에게 너무 알려지지 못한 게 아쉬웠다. 조선총독부 때문에 파괴되어 박멸된 문, 그리고 총독부가 사라지면서 되돌아온 문. 이런 인생유전을 가진 문이 또 있을까.

 

의견이 팽팽히 엇갈렸던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가 어찌됐든, 총독부가 사라진 대신 우리는 이 문을 다시 얻었다. 어차피 총독부가 사라진 이상 그걸 해체하는 것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이 문이 돌아온 것은 반겨줘야 할 일 아닌가.

 

흥례문이 겪은 슬픈 이야기는 우리가 좀 더 깊게 생각을 해보게 되는 이야기다. 역사와 건물, 그리고 문화와 복원 등 여러 지점에서 많은 함수를 품고 있는 고차원 문화방정식이다. 그 이야기가 비록 슬프지만 우리 너른 가슴속에 대범하게 품자. 그리고 기억하자.

 

 

# 뱀다리/ 황제 폐하 이름 글자는 쓰면 안됩니다-기휘 

 

흥례문이 겪어야 했던 수모는 이름에도 있다. 문의 원래 이름은 홍례문(弘禮門)이었다. 문1395년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오문(궁궐 남문을 부르는 보통명사)로 부르다가 나중 홍례문으로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19세기 경복궁 중건할 때 문 이름을 흥례문으로 바꿔 원래 있던 `넓을 홍(弘)'자가 사라졌다. 청나라 건륭제의 이름이 홍력(弘曆)이어서 그 이름자를 피해 한자를 바꾼 것이다.

 

 

이런 습속을 `기휘' 또는 `피휘'라고 한다.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이나 조상 이름에 들어있는 한자를 피하는 법칙이다. 군주와 조상에 대한 유교적 예의로 나온 문화다. 옛 문헌들을 연구할 때 연대를 추정하기 어려울 때 어떤 한자가 빠지거나 다른 것으로 쓰였는지 파악해서 연대를 추정하기도 한다. 

 

기휘의 사례인 흥례문이란 이름에는 조공국가로서 패권국가 눈치를 봐야했던 조선의 설움이 배어있다. 새로 짓는 문도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문이고 이름인데 중건하면서 그 이름에 청나라 황제 이름자를 피한 모습이 지금 보는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