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왜 창덕궁에만 자유이용권이 있을까? 2009/08/14

딸기21 2020. 9. 17. 22:37

“궁궐에도 자유이용권이 있어요”라고 하면 사람들은 뜻밖이란 반응들을 보이곤 한다. 오래 된 제도인데도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창덕궁 자유관람말이다.
 
창덕궁은 경복궁이나 덕수궁과는 관람제도가 전혀 다르다. 덕수궁이야 규모가 작아 도심 속 공원에 가깝고, 경복궁은 3000원에 언제나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창덕궁은 더 비싸고 더 까다롭다. 창덕궁은 일반관람과 자유관람이 나뉘고 특별히 따로 신청해야하는 구역들도 별도로 지정되어 있다. 왜 그럴까?
 

돈화문 지나, 진선문 지나면 이제 창덕궁의 진짜 공간이 시작된다. 왼쪽 인정문과 앞 숙정문이 펼쳐지는 너른 공간이 관람객을 맞는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벌써 울울창창하고 커다란 나무들이 얼굴을 내민다. 창덕궁은, 단언컨대 서울 시내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숲이다.


창덕궁이 더욱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즐기는 시민 입장에선 창덕궁은 경복궁보다 더 비쌀 가치가 있다. 그건 경복궁보다 더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더 다양한 아름다움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목요일에만 즐길 수 있는 영화 2편 값의 사치

창덕궁은 사실상 산자락에 올라탄 궁궐이다. 뒷편 후원(한때 비원으로 불렀던)은 도심 속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너른 숲이다. 이렇게 좋은 숲을 거느린 궁궐은 나라 안팎을 둘러봐도 찾기 어렵다.
그러니, 관람객들이 바글거려서는 유지 관리가 쉽지 않다. 아름다운 정원과 숲, 그 속 곳곳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정자와 건물들을 잘 관리하기 위해 창덕궁은 정해진 코스를 가이드를 따라 관람해야 한다. 
 

창덕궁 뒷쪽에 있는 다래나무. 천연기념물 251호다. 창덕궁에는 이 다래나무 말고도 천연기념물이거나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들이 여럿이다. 


하지만 매주 목요일만은 관람객이 자기 맘대로 이 넓은 궁전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있다. 앞서 말한 ‘자유이용권’이 바로 이 자유관람일 이야기였다.
대신 그 값은 좀 비싸다. 정해진 곳만 보는 일반관람은 어른 3000원이지만, 이 자유관람은 어른 1만5000원이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에만 가능하다. 따로 신청해야하는 궁궐 깊숙한 옥류천 일대와 낙선재 관람을 그냥 한번에 다 돌아볼 수 있다.
 
궁궐 한 번 보는데 1만5000원은 너무 비싸지 않느냐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영화 2편 값보다 1000원 싸다. 한국 최고의 공간을 마음껏 거닐 수 있는 값이다.
문제는 목요일이 평일이어서 좀처럼 가기가 쉽지 않다는 점인데, 창덕궁 자유관람을 하게 되면 이게 오히려 더 반길 일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만큼 사람이 적어 호젓하고 여유롭고 운치있게 이 아름다운 궁궐과 후원을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자유관람은 10월까지만 가능하다. 벌써 8월 중순. 올해가 가기 전에 어디 가볼만한 곳 없나 아쉬운 분들께 목요일 월차를 권한다. 창덕궁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인정전 단위에 올라 바깥 빌딩숲을 보는 맛. 거대한 콘크리트 도시에서 탈출해 특별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기분을 절로 느끼게 된다. 


창덕궁이 경복궁보다 좋은 이유
 
경복궁에는 숲이 없다. 아니, 창덕궁에만 숲이 있다.
원래 동양 궁궐은 그 안에 숲은커녕 나무도 잘 없다. 그 이유는 풀이하자면 이렇다.
집(口) 안에 나무(木)가 있으면 한자가 ‘困’자가 된다. ‘곤할 곤’자다. 임금이 있는 궁궐에 이런 꺼림칙한 뜻이 연결되어선 안될 일이다. ‘문(門’ 안에 나무가 있어도 ‘한가할 한(閑’자가 되어버린다. 나랏님에게는 반드시 피하고 싶은 의미다.
 
이런 명분적인 의미보다도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나무가 크고 울창하면 경호업무가 어려워진다. 나무 속에 자객이 숨기도 좋고, 나무 타고 자객이 들어오기도 좋다. 그래서 궁궐에는 나무가 없거나 적다. 서양 궁궐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다. 루브르 궁에 나무 있는 것 봤는가?
 

자금성, 거대하나 삭막하다. 몰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중국 사람들은 특히나 이런 것에 신경썼다. 자금성에 가본 분들은 안다. 뭔놈의 궁전이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그래서 자금성은 지나치게 삭막하다. 그 삭막함이 너무나 싫었던 서태후는 이화원에 가서 살기를 좋아했다. 그 이화원을 크게 꾸미느라 수천수만이 동원되어 연못을 파는 삽지를 해야했고, 그 삽질한 흙더미로 다시 산을 만들어야했지만.
 
우리 궁궐들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알맞게 나무가 있는 편이다. 하지만 숲이 울창할 정도는 아니다. 유일하게 창덕궁이 그렇다. 백악산과 안산으로 넘어가는 산줄기에 자리잡아 거대한 후원을 꾸며놓았다. 자연주의 조경철학에 따라 아주 자연스럽고 은은한 숲이다. 서울 한가운데에서, 왕이 즐기라고 만들어 놓은 이 좋은 숲을 즐기는 맛은 창덕궁에서만 가능하다. 
 
창덕궁 숲 즐기기의 백미는 숲속에 개성적인 모습으로 저마다 자태를 뽑내는 여러 정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숲이 있기에 창덕궁은 보석같은 정자들을 여럿 거느리게 됐다.
이 재미를 목요일에만 누구나 여유롭게 만끽할 수 있다. 이만한 사치가 또 있을까.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는 울창한 나무들에서 초록색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서울 도심에서, 궁궐에서 이런 장면을 질리도록 만날 수 있는 곳은 창덕궁뿐. 
궁 북쪽 신선원전 가는 길. 하염없이 걷기에 좋다. 
옥류천 가는 숲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정자 취한정. 창덕궁 후원은 숲속 정자들의 경연장이다. 


경복궁이 바로크라면 창덕궁은 로코코
 
경복궁이 남성적이고 웅장하다면, 창덕궁은 여성적이고 아름답다. 화려하다. 그리고 다양한 얼굴과 아기자기한 매력포인트를 지니고 있다.
 

희정당 남행각. 마차나 자동차로 내리게 꾸민 돌출 현관이 우리 전통 건축과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됐든 보기에는 화사하고 아름답다.


창덕궁의 중요한 볼거리들은 누가 꼽더라도 가장 중요한 왕의 정치 공간인 인정전과 선정당, 그리고 왕비의 공간인 희정당과 대조전이다. 그리고 왕이 일부러 민간 양반집 집처럼 지은 연경당과 낙선재의 우아한 모습, 그리고 아름다운 연못 부용지와 그 옆 정자들을 꼽는다.
 

단청하지 않았지만 문과 창호의 치장과 장식이 실로 고급스러운 낙선재. 
화려한 모양이 절로 눈을 끄는 낙선재 뒷쪽 삼삼와와 칠분서. 창덕궁은 이런 화려하고 독특한 건물들이 많다. 
연못 부용지를 내려다보는 주합루와 그 앞 어수문. 


그러나, 이런 유명한 포인트들보다도 개인적으로 그 못지 않다고 꼽는 창덕궁의 매력 포인트가 있다. 오히려 궁궐스럽지 않은 궁궐 속 공간이다.
화려하게 꾸민 왕궁의 으리으리한 주인공 건물들, 그러니까 왕실이 쓰는 건물들 말고 오히려 왕궁에서 열심히 일했던 신하들이 근무하던 집무용 건물들이 밀집한 궐내각사 지역이다. 창덕궁을 한바퀴 둘러본 뒤 나오는 길에 들르면 좋다.
 
이 궐내각사 지역은 지금으로치면 정부 종합청사 같은 곳이다. 건물들이 다 비슷비슷해서 보기에는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궁궐을 이해하는 데에는 예쁘고 멋진 공간들과 함께 이렇게 열심히 나라를 유지해온 사람들의 공간도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잘 잊어버린다.
궁궐에는 임금만 아니라 나라를 실제 유지했던 신하들의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또한 창덕궁 뿐이다. 역사책에서 접했던 이름들인 규장각 같은 곳들이 바로 이 곳에 있다.

창덕궁 검서청. 옆으로 나온 누마루가 돌로 꾸민 내 안으로 들어가는 독특한 모양이다. 
궁궐에도 약방이? 내의원에 속해 궁중 의약을 담당했던 약방이다. 왕의 집무공간인 인정전과 지근거리에 있다. 임금을 더 잘 치료하기 위해서다. 건물은 최근 복원된 것이다.  


한옥 건물을 보면서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건물들이 우아한 갑각류 동물들 같아 보인다는 생각이다. 기와로 뒤덮인 지붕 때문이다. 기둥은 다리 같고, 지붕은 너른 등판 같다.

기와 지붕들이 밀집한 모습을 보면 이 동물들이 모여서 선을 이루고, 서로 맞닿을 듯 붙어 있고, 높낮이에 따라 줄을 선 것처럼 연상해본다. 창덕궁 앞쪽 이 궐내각사 지역은 특히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런 느낌을 더 받은 것은 창덕궁의 이 지역이 궁궐내 다른 곳들보다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다.  
한옥 특유의 매력은 건물들이 큰 덩어리 하나가 아니라 나뉘어 따로 존재하면서도 알맞은 거리와 간격으로 유기적으로 새로운 구성을 창출하는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이쪽 지역은 건물들이 아주 촘촘하게 모여 만들어내는 다양한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건물들이 다 똑같네, 라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구석구석 빚어내는 다양한 표정들을 찾아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중첩되는 지붕들이 빚어내는 한옥만의 풍경. 날아갈 듯 솟은 크고 작은 지붕들이 오케스트라 화음을 내듯 새로운 표정을 만들어낸다. 


한옥의 지붕선들이 서로 마주보면서 각도에 따라 달라지며 만들어내는 풍경은 한옥만이 보여주는 특유의 얼짱 포즈 중 하나다.
 
그리고, 또 남는 창덕궁의 여러가지 모습들.

영화당에서 바라본 부용지와 부용정. 
돌로 만든 독특한 문 불로문. 경복궁 역에 모사품이 있다. 
한옥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 창호와 창호들이 이어지면서 창문 속에 또 창문, 그 속에 또 창문이 이어져 보여주는 ‘겹’의 미학. 
개인적으로 창덕궁 여러 문들 중에서도 좋아하는 금마문 뒷편 같은 모양 문. 앙증맞은 지붕과 너무나 얇은 기둥이 불균형을 이룬 것 같으면서도 묘한 맛이 있다. 
일반관람으로는 올 수 없는 옥류천과 소요정. 


창덕궁의 이런 여러가지 모습을 즐기려면 역시 목요일 자유관람뿐이다.
에버랜드말고 창덕궁도 자유이용권이 있다. 가격은 에버랜드보다 훨씬 싸다. 1만5000원으로 이만한 눈요기에 이만한 산림욕을 할 곳이 서울 한복판에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 창덕궁 목요 나들이는 내겐 스스로에게 보상해주는 가장 알맞은 사치다.
 
마지막 나오는 길, 궁궐 입구의 금천교를 지키는 돌짐승들을 다시 한번 만나는 것으로 나들이는 끝이다. 네 기둥에 올라탄 상상속 동물 산예들도 봤다면 다리 아래에서 나쁜 기운을 막아주고 있는 녀석들도 쳐다봐주자.


특히, 저 맨 아래에서 물을 바라보는 요 녀석. 참 귀엽지 않은가. 그 녀석 위 벽면에 그려진 또다른 녀석도 그렇고. 두 녀석만 보면 절로 웃음 짓게 된다. 창덕궁 나들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