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서울에 남아있어 고마운 화랑대역 2009/07/08

딸기21 2020. 6. 3. 20:08

역이란 무엇인가? 역 건축은?

그런 거대한 물음은 필요없다. 그냥 가서 보면 무언가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 느낌을 한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면 족하다.
간이역은 그런 역이다. 거창한 볼 것은 없지만 작고 투박한, 그래서 더 귀엽고 소중한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간이역이라면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나야 할 것 같지만, 지하철만 타도 쉽게 가는 간이역이 있다. 서울에 남아 있는 마지막 간이역 화랑대역이다.
집 부근이어서 늘 오가며 마주치는 이 역이 `명퇴'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화랑대역이 생긴 것이 1939년이니 올해로 꼭 70살.사람으로 치면 `고희'다. 70살은 예전부터 드물어 고희라는 말이 생겼는데, 간이역으로 70살 맞은 역은 정말 드물다. 그래서 등록문화재(근대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역이다.
70년 세월 동안 화랑대역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보내고 맞았을까? 그 사람들에게 이 역은 어떤 곳이었을까?
마치 동네 이웃 할아버지지가 퇴직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가까이 있어 오히려 더 자주 못찾아가본 이 문화재 간이역을 모처럼 찾아갔다.
 


화랑대역은 이름이 똑같은 지하철 6호선 화랑대 역에서 내리면 걸어서 5~10분 거리에 있다. 가는 방법도 아주 쉽다. 무조건 육군사관학교 앞으로 가면 된다.


지하철 화랑대역에서 육사까지 가는 짧은 길은 서울 시내 다른 길들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가로수가 울창하다. 그래서 `걷고 싶은 길'로도 지정되어 있다. 가을에는 낙옆을 일부러 쓸지 않고 놔두는 길이기도 하다. 철길이 보이고 철길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육사 정문이 나온다.

 


육사 정문. 요즘 구내 공사가 한창이다. 옆으로는 서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전원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우리의 화랑대역은 도대체 어디에?
입구 바로 앞까지 가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된다. 화랑대 역은 육사 정문과 붙어 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저 작은 건물이 화랑대역이다.

 


얼핏 보기에도 작다. 간이역으로 치면 작은 역은 아니지만, 앞에 심은 나무에도 쉽게 가리는 아담한 역이다. 앞 마당 꾸밈새만 봐도 이 역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건물의 정면. 뒤에서 봐도 똑같은 앞뒤 일체형 건물이다.
보통 간이역은 뾰족한 삼각지붕이 교차하는 십자형 건물들이 표준 구조다. 화랑대역은 좀 모양이 다르다. 이 점 때문에 간이역 중에서 건축적 가치가 크다고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전문가들이 꼽는 이 건물의 미학은 `비대칭 큰 박공' 건물의 아름다움이다. 대칭 모양이 아닌 큰 경사지붕 집이란 이야기다.

 

큼직한 지붕 하나로 대범하게 툭툭 손가는 대로 디자인한 듯한 모양새가 멋지다. 거침없는 듯하면서도 아기자기하다. 그리고 강렬한 색칠. 사실 간이역들은 종종 새로 칠해 건물 색깔이 완전히 바뀌곤 한다. 서울 기차역 신촌역의 경우 전에는 푸른빛이었는데 지금은 갈색으로 전혀 달라졌다.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넓은 대합실이 나온다. 임석재 교수는 최근 낸 책 <한국의 간이역>에서 대합실을 `맞이방'이란 순우리말 용어로 썼다. 인상적인 단어인데, 그 표현을 따르자면 화랑대역 맞이방은 참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통나무 의자와 책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투박한 생김새를 그대로 살린 가구들이 간이역스럽다. 갈색칠을 한 긴 의자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 위에 걸린 그림도.

 

 

저 의자가 맞이방의 주연이다. 옛날식으로 길게 자른 나무를 짜맞춘 의자가 간이역의 나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 역을 오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 켠에 붙여놓은 열차 시간표를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화랑대역에는 하루에 7번 열차가 선다. 청량리와 춘천을 오가는 경춘선 열차다.
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리는 이는 하루 20명 정도라고 한다. 안쓰러울 정도로 적다.

 

그래서 내년 개통하는 경춘선 복선 전철을 건설하게 되면서 이 역은 빠지게 됐다. 올해가 지나면 이 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그래서 명예퇴직이다.
다행스럽게 등록문화재인만큼 건물 자체는 헐리지 않고 보존되게 됐다.

 


맞이방을 지나 플랫폼으로 나간다. 언제봐도 독특한 정취를 풍기는 철길이 바로 나타난다. 역은 작아도 파란색 역명 표시판이 늠름하다. 춘천으로 가는 쪽 철길.

 


그리고 청량리쪽 방향.
역사 곳곳에 꽃들이 피어 운치를 더해준다.

 


철길을 건너 다시 역 건물을 바라본다. 정면과 달리 긴 차양이 선그라스처럼 달려 있다.

 

임석재 교수는 이 역과 차양이 기둥구조의 백화점이라고 평했다. 전공자가 아닌 이상 그렇게까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는 없겠지만 간단한듯 신경쓴 차양이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제법 만듦새가 단단해보이면서도 은근히 멋이 있다.

 

 
그리고 표 넣는 작은 함.

 


내년부터 기차가 서지 않게 되면 저 함도 기능을 다하고 물러날 것이다.
 
휘휘 둘러보는데 시간이 얼마 걸린다고 말하기도 좀 그럴 정도로 역 구내는 간단하다. 그래도 천천히 돌아보며 음미하자면 오래오래 있기에도 부족함은 없다.

 

다시 육사 앞길로 나간다. 큼직한 가로수길이 시원하다. 다니는 차도 없어 더욱 고즈넉하다.

 


간이역 화랑대부터 지하철 태릉입구역까지 이어지는 저 울울창창한 가로수길은 분명 서울에서 가장 훌륭한 모습이다. 문화적 시설이 더해져 이 거리를 사람들이 걸어다니게 만드는 계기가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차로만 휙휙 보고 지나치는게 아쉽다.
 
다음 주에는 모처럼 신촌역을 보고 싶어진다. 거대한 쇼핑센터에 짓눌린 그 아담한 모습이 안쓰럽지만, 귀여운 그 모습만큼은 늘 반갑다.



# 뱀다리/ 간이역 길잡이책 2권

최근 간이역을 잘 소개하는 책 두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철도 마니아 임병국씨의 <간이역 여행>과 건축학자 임석재 이화여대 교수의 <한국의 간이역>이다.

 

<한국의 간이역>은 문화재로 지정된 주요 간이역들의 건축적, 인문학적 의미를 심도 깊게 들여다본다. <간이역 여행>은 전국의 주요 간이역들을 여행자의 관점에서 소개한다. 주변 맛집 등 여행 정도도 꼼꼼히 곁들였다. 취향따라 골라보면 좋을 듯.

 

# 뱀다리 추가

 

작지만 역 기능에 충실한,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화랑대역을 보면서 문득 우리 기차역 건축 문화에 대한 울화가 치밀었다.

한국에서 가장 황당하고 낙후된 공공 건축분야를 꼽으라면 주요 기차역들을 꼽고 싶다. 도시의 얼굴이 되어야할 중앙역들이 개판 디자인의 상업건물처럼 변질된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 짜증나는 풍경이 떠올라 화랑대역 소개보다 먼저 쓴 포스트가 `이게 기차역이야, 변신로봇이야'  다. 외국의 역들과 한국 역을 거칠게 비교한 글인데,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