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지고 놀기

책의 세계3-치열하고 치사한 책 제목의 세계 2007/10/25

딸기21 2018. 6. 22. 10:36

출판사 황금부엉이는 2006년 미국의 인터넷 검색기업 구글의 성공비결을 다룬 책 <구글, 성공신화의 비밀>을 펴내면서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에 특별한 ‘편집 후기’를 덧붙였다. 황금부엉이가 펴낸 책과, 앞서 나온 다른 출판사의 구글 관련 책의 ‘제목’에 대한 뒷이야기를 밝힌 것이다.

황금부엉이는 <구글, 성공신화의 비밀>의 원래 제목인 ‘구글 스토리’(The Google Story)을 한국판에서도 제목으로 쓰고 싶었지만, 출판사 랜덤하우스중앙(현 랜덤코리아)이 앞서 다른 구글 관련 책 <검색으로 세상을 바꾼 구글 스토리>를 지난해 말 펴내면서 ‘구글 스토리’란 이름을 임의로 사용해버렸다고 설명했다. 

책 제목 따라하지 마란 말이야

황금부엉이가 이처럼 굳이 제목에 대한 별도 자료까지 낸 것은 책 제목만큼 책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의 입장에서는 기억하기 쉽고 강렬한 책 제목을 정하는데 거의 사활을 건다. 물론 이런 설명은 ‘구글 스토리’란 이름을 선점한 랜덤하우스쪽이 ‘페어 플레이’를 한 것이냐는 의문도 함께 제기하는 것으로 읽힐 수 밖에 없다.

랜덤쪽은 당시 반대로 “이런 식의 자료배포가 오히려 상도의를 어기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랜덤하우스 관계자는 “책을 우리가 앞서서 냈고, 책을 거의 펴내기 직전에야 구글을 다룬 다른 영문판 책의 제목이 <구글 스토리>란 것을 알게 됐다”며 “의도적으로 제목을 선점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고 밝혔다. 

좋은 영어 제목 선점에 발만 동동

황금부엉이와 랜덤하우스가 벌인 감정싸움은 출판사들에게 책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그리고, 책 제목을 둘러싼 출판사들의 치열한 경쟁과 함께 책 제목을 짓는데 어떤 명확한 기준이나 규범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님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가뜩이나 심각한 출판불황으로 생존위협을 받고 있는 출판사들에게 책 제목 짓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지면서 책 제목을 둘러싼 다양한 풍경들이 벌어진다. 특히 출판계에서 오랜 관행처럼 이어져온 ‘책 제목 따라짓기’ 또는 ‘베껴짓기’가 극심하다. 한 책이 성공을 거두면 그와 비슷한 이름을 지어 연상효과를 거두려는 따라짓기, 또는 베껴짓기는 특히나 명확한 위반규정이 없고 기준도 모호해 많은 출판사들이 ‘애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경제책으로는 두드러진 성공을 거둔 웅진닷컴의 <경제학 콘서트>(팀 하포드 지음)도 전형적인 ‘이름 따라짓기’의 사례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은 <비밀 경제학자>(The Undercover Economist)였는데 국내에서는 <경제학 콘서트>로 탈바꿈했다.

웅진 쪽이 책 제목을 <경제학 콘서트>로 정한 것은 베스트셀러 과학책인 <과학 콘서트> 때문이었다. 출판사 동아시아가 2001년 펴낸 <과학 콘서트>(정재승 지음)는 방송프로그램 <느낌표>가 선정한 책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40만부 가까이 팔린 스테디셀러다. 일반인들이 어려워하는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지은이의 글솜씨 못잖게 ‘과학’이란 딱딱한 느낌의 단어에 ‘콘서트’라는 이질적인 단어를 붙여 새로운 느낌으로 만들어낸 독창적인 제목도 독자들에게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경제학 콘서트>는 바로 이 <과학 콘서트>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따라 지은 덕분에 <과학 콘서트>처럼 어려운 전문분야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편안하고 재미있는 책으로 독자들이 연상하게 만들었고,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무임승차…단맛의 유혹

<과학 콘서트>의 경우처럼 책 제목 자체는 아니지만 인상적인 제목의 구조는 사실상 출판사의 ‘브랜드’처럼 대중들에게 인식된다. 성공할 경우 하나의 시리즈처럼 이어지면서 다른 후속작들도 쉽게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아진다.

문제는 고심 끝에 만들어낸 이런 제목을 다른 출판사들도 손쉽게 가져다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경제학 콘서트>를 낸 웅진 쪽은 ‘~콘서트’란 이름을 먼저 만들어낸 동아시아 쪽에 이 제목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를 지불할 의무나 필요는 없다.

실정이 이렇다보니 어떤 책이 성공하면 금세 무수한 아류작들이 나온다. <바보들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 <바보들은 항상 바쁘다고만 한다> <바보들은 항상 여자탓만 한다> <바보들은 적금통장만 믿는다> <바보들은 운이 와도 잡을 줄 모른다>…. 얼핏 시리즈처럼 보이는 이 책들은 모두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서로 다른 책들이다.

이 ‘바보들은~’ 제목의 시초는 출판사 한언이 지난 2001년 낸 <바보들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였다. 그리고 이 제목을 유행시키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예문이 펴낸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가 성공하면서부터였다. 예문 쪽은 당시 ‘바보’란 열쇳말로 이름을 정하려 고민하다가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 제목을 지었는데, 한언이 먼저 ‘바보들은~’이란 제목을 썼던 것은 몰랐다고 설명했다. 이후 너도나도 이 제목을 따라지으면서 지금 ‘바보들은 ~한다’는 제목의 책만 모두 10여종이 나와서 유통되고 있다. 몇몇 책들은 디자인도 흡사해 한 출판사의 연작물로 착각하게 만들 정도다.

‘하루만에 ~하는 ~책’이란 제목도 마찬가지다. <하루만에 알 수 있는 재테크>부터 <하루만에 준비하는 모임요리> 등 10여종이 있다. 이 ‘하루만에~’와 거의 비슷한 ‘하룻밤에 ~하는 ~책’이란 제목도 따라짓기 대상 가운데 하나다. 모두 10여개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이 이 형식의 제목을 달고 있다.

‘~따라잡기’와 ‘~길라잡이’란 제목은 하도 많아서 헤아리기도 쉽지 않을 정도다. 90년대에는 이후 ‘~는 못말려’가, <일본은 없다> 이후 ‘~는 없다’란 제목이 한때 줄지어 나오기도 했다.

이런 ‘제목 유사품’들은 성공해서 브랜드 가치를 갖게 된 책제목을 이용해 후발 주자들이 편승하려는 전략이어서 본질적으로 ‘무임승차’ 행위나 마찬가지다. 먼저 나온 책의 기획성과를 짓밟는다는 점에서 윤리적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소비자들 역시 검증된 책의 후속작일 것으로 믿고 책을 사려다가 혼란을 겪게 된다.

그러나 저작권법만으로 보면 책 제목에는 표절이 없다. 소설가 손장순씨가 고원정씨의 소설이 자신의 소설 <불타는 빙벽>과 이름이 똑같은 데 대해 표절이라고 손해배상청구를 낸 데 대해 법원이 “소설 제목은 창작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당시 법원은 “제호(제목)은 독립된 사상, 감정의 창작적 표현이라고 보기 어려워 창작물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원고인 손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표절’ 적용 안돼 양심에 맡길뿐

출판사의 처지에서 제목을 유사 제목들로부터 보호하는 길은 ‘부정경쟁방지법’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저작권법 자체가 개별 제목을 보호하는 취지가 아닌 탓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부정경쟁방지법이 출판에 적용된 적은 없다. 제목의 창의성을 침해당한 출판사 쪽이 자기 제목이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브랜드란 점만 입증하면 확실하게 이길 수 있지만 이겨도 소액 보상에 그치기 때문에 중간에 합의를 보고 끝내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결국 제목 베끼기는 출판계의 양심과 윤리에 맡길 수 밖에 없는 문제로 되돌아간다. 제목에 반칙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