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지고 놀기

책의 세계5-선진형 출판 장르 ‘평전’의 세계 2007/11/11

딸기21 2018. 6. 26. 16:57

“평전이란 무엇인가.”


고 조영래 변호사의 일생을 그린 <조영래 평전>을 둘러싸고 지난해 벌어졌던 논쟁은 처음으로 우리 출판계와 독서대중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평전(評傳)이, 그것도 거의 가뭄에 콩나듯 했던 국내 인물을 국내 지은이가 쓴 평전이 출판계 뉴스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당시 논란은 안타까우면서도 눈길을 끌었다. 그만큼 평전이란 장르는 우리 독서계에서 자리잡지 못한 장르였다.



<조영래 평전> 논란은 조 변호사의 유가족들이 지은이 안경환 교수(서울대 법대)가 “고인의 사상과 인물됨을 왜곡하고 있고,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 이어 권인숙 명지대 교수가 이 책이 사실을 왜곡했으며, 안 교수가 자신의 사상적 틀에 조영래를 끼워 맞추고자 했다고 비난하면서 파장이 커졌다. 이에 지은이 안경환 교수는 “평전은 한 사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자의 몫”이라고 강조하면서 “가족으로서 마음 아픈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평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썼고, 책 내용은 자신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사람 중심의 역사 평전의 매력


한 인물을 재구성한 평전을 놓고 대상 인물과 관련된 각 주체들이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평전을 바라보는 처지와 시각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조영래 평전 논란’은 아직까지 평전에 대한 사회 공통의 인식이 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동시에 평전이란 갈래가 본격적으로 우리 출판시장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전’은 한마디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전기다. 한 인물을 기리려는 것이 주된 목적인 전기와 달리 한 사람을 통해 당시 시대를 들여다보면서 그 사람의 업적과 활동을 평가하는 것이 목적이다. 평전은 방대한 자료 수집이 필요해 기술적 측면에서는 사회 전반의 기록문화가 갖춰져야 하며, 사회문화적으로는 한 역사인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분위기가 갖춰져야 한다. 그래서 사진집, 대화나 대담집 등과 함께 대표적인 선진 출판물로 꼽힌다.


평전은 한 인물을 칭송할 수밖에 없는 위인전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당사자의 시각만으로 쓰는 자서전이 갖는 객관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어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므로 출판 의미가 크다. 또한 독자들에게는 위인전에서는 볼 수 없던 역사인물의 단점과 함께 인간적 측면도 함께 볼 수 있어 한 인물을 좀더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사건 중심인 역사책들이 들려주지 못하는 사람 중심의 역사를 통해 부담없이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것이야말로 평전의 강점이자 특유의 매력이다.


평전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동양의 경우 사마천이 쓴 <사기>의 ‘열전’이 분명한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인물을 평가한 글이란 점에서 평전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화가들을 기록한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이 효시로 꼽힌다.


서양에서는 이후 동양에 견줘 평전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하면서 평전을 전문적으로 쓰는 ‘전기작가’들이 따로 등장했고, 출판에서 평전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전기작가의 위상이 대단하다. 오스트리아의 슈테판 츠바이크, 프랑스의 앙드레 모루아, ’전기장르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리튼 스트레이치 등은 ‘20세기 3대 전기작가’로 불리며 평전작가의 대명사로 꼽힌다. 서양에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석학 에드워드 핼릿 카도 평전을 쓴 적이 있을 만큼 학자와 유명 문필가들이 평전을 쓰는 것도 흔한 일이다.


그래서 주요 역사인물들은 여러 종의 평전이 동시에 나와 있어 독자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던 ‘악인’이나 문제인물들의 평전도 거의 빠짐없이 나와 있다. 국내에도 소개된 나치즘 광기의 주역 괴벨스 같은 이를 다룬 평전도 여러 종이다. 또한 문화인물에 대한 평전도 많아 영화배우나 가수 등 대중문화 스타들 쪽 평전도 활성화되어 있다. 외국 주요 서점에는 별도의 평전코너를 따로 마련한다.


사회 전반 기록문화 갖춰져야


반면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평전은 그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다. 평전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 이후였고, 인물을 다룬 책은 으레 ‘전기’나 ‘위인전’이 주종으로, 이런 경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출판 전문가들은 외국 평전에 견줘 볼 때 아직까지 국내에서 본격적인 평전은 없다고 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나온 평전들 대부분이 평전이란 이름을 달았지만 훌륭한 인물들의 삶을 기리는 ‘전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문화적 특성 때문에 국내에서는 평전 저술이 어렵다는 지적도 많다. 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많은 기록이 유실돼 자료가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아직은 인물 평가에 이해당사자들이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또한 워낙 역사가 굴곡졌던 탓에 역사 속 주요 인사들이 자기의 역사적 역할을 증언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드러내는 것조차 꺼리는 경향이 강한 것도 주요한 원인이다.


여기에 평전이 다른 책에 비해 엄청난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는 점도 출판시장의 규모가 작은 국내 사정상 출간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외국의 경우 전기작가들이 평전을 준비하는 기간은 최소한 몇년, ‘10년은 기본’일 정도다.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야 하고 주변인물들을 많이 인터뷰해야만 대상 인물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그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준비기간이 길고, 책의 분량도 1000쪽 가량인 경우가 흔할 정도다. 



그래서 외국 작가들의 경우 평전을 ‘가장 나중에 쓰는 책’으로 여기는 편이다. 특정 분야 쪽 책을 여럿 써서 전문성을 갖춘 뒤 평전을 쓰는 게 일반적이다. 역사인물들에 대한 평전을 썼다가 후손들에게 비난받는 웃지 못할 경험을 해야 했던 역사저술가 이덕일씨도 “한 사람의 세밀한 일생을 추적하지만 그 일생을 통해 그 시대를 조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평전이란 기본적으로 미시사지만 거시사적인 안목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평하고, “개인적으로 평생에 걸쳐 할 영역으로 평전을 설정했다”고 말한다.


이렇다 보니 출판사로서는 번역 평전도 용기를 내지 않고는 쉽게 내지 못하며, 국내 인물을 다룬 평전은 더욱 성공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다행히 90년대 이후 외국 인물 평전들이 하나둘씩 꾸준히 선보이기 시작했고, 국내 인물을 다룬 국내 지은이의 평전도 간간이 출간되기 시작해 최근 몇년 새 <문익환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등이 나오면서 국내에서도 조금씩 평전 저술 문화가 싹트기 시작하고 있다.



또 외국의 우수한 평전물들이 점점 많이 소개되면서 평전의 저변이 넓어지고 있다. 노먼 베쑨이나 프란츠 파농, 비노바 바베 등 국내에는 생소했던 인물들을 소개한 실천문학사의 ‘역사인물 찾기’ 시리즈, 도발적 사진작가 헬무트 뉴튼이나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재즈 거장 마일스 데이비스 등의 평전을 모은 을유문화사의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 그리고 비교적 적은 분량에 선명한 주제를 내세우는 평전을 지향하는 푸른숲의 ‘푸른숲 비오스’ 시리즈, 출판사 교양인의 ‘문제적 인간’ 시리즈 등이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실천문학사의 <체 게바라 평전>의 경우 게바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과 맞물려 30만부 넘게 팔리는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1~2년새 평전 쏟아져



지금까지 국내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평전은 <전태일 평전>(돌베개)이다. 모두 50만부 가까이 나간 것으로 추산되는 이 평전을 쓴 이는 다름아닌 조영래 변호사다. 그 자신이 평전으로 획을 그은 조 변호사에 대한 평전이 논란이 된 상황은 그래서 더욱 역설적이다. 이번 논란이 평전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인식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된다면 조영래 변호사는 평전 문화에 예상치 못했던 또다른 기여를 하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