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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100년 두 탐정 영웅을 기립니다 2007/08/03

딸기21 2018. 6. 12. 16:38

100년이란 숫자는 의미심장합니다. 그래서 100년을 기념하는 것이겠지요.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은 아니지만, 제 개인적으로 올해를 맞아 100주년을 기념해주고 싶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올해로 데뷔 100년을 맞는 `탐정 영웅'들입니다.


1887년, 제왕 탄생하다

 

추리팬들에겐 익숙한 이야기겠지만, 추리소설 역사에서 중요한 연도들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꼭 120년과 100년 전인 1887년과 1907년, 그리고 96년전인 1911년입니다. 
 

1887년은 바로 추리소설의 대명사 ‘셜록 홈즈’가 등장한 해입니다. 영국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이 해 <주홍색 연구>란 작품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추리소설 주인공 셜록 홈즈를 선보입니다.



지금도 전세계 어린 세대들이 셜록 홈즈를 통해 추리소설과 만납니다. 탐정이란 말에 홈즈처럼 잘 어울리는 캐릭터도 없지요. 홈즈는 탐정의 왕이요, 추리소설의 최고 스타입니다. ‘셜록 홈즈 팬’이란 뜻의 ‘셜로키언’이나 ‘홈지언’이란 말을 거느린 탐정도 홈즈말고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 셜로키언은 주로 미국쪽 팬들, 홈지언은 주로 영국의 홈즈팬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입니다.)

 

1907년, 세 영웅이 한꺼번에 데뷔한 해

 

그러면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1907년은 어떤 해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 이 해 세 명의 위대한 탐정 캐릭터가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홈즈의 라이벌이었고, 오늘날 독자들에겐 셜록 홈즈에 반해 또다른 추리 소설을 찾을 때 만나게 되는 탐정들입니다.


‘1907년 데뷔 동기 명탐정’ 3명 가운데 어느 정도 추리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에겐 아마도 가장 친숙할만한 탐정이 가스통 르루의 대표작 <노랑방의 비밀>로 이해 등장한 명탐정 기자 ‘조셉 룰르타뷰’일겁니다.


<오페라의 유령>, <노랑방의 비밀>을 쓴 프랑스의 대표적 추리작가 가스통 르루


가스통 르루란 보통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라는 설명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 가스통 르루가 유명해진 것은 이 걸작 추리소설 <노랑방의 비밀> 때문이었습니다.
 

<노랑방의 비밀>은 폐쇄 공간속 살인을 다루는 이른바 ‘밀실 트릭’의 고전입니다. 여기 등장한 기자 탐정 조셉 룰르타뷰는 기자를 하기엔 비정상적으로 어린 나이인 18살로 설정되어 있는데, 그래서 더 명석한 머리가 두드러지는 탐정입니다. 연역적 추리로 사건 개요를 귀납해내는 추리를 선호하는 똑똑이죠. 
 
그러면 또 1907년에 데뷔한 황금 트리오 가운데 나머지 두 명은 누구일까요?

 

명탐정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업고, 빼놓아서도 안되는 탐정, ‘사고기계’란 별명으로 유명한 반 두젠 교수와 ‘법의학자’란 캐릭터를 거의 최초로 만들어낸 손다이크 박사입니다.
 

이 두 탐정들은 추리소설에 큰 관심이 없는 분들에겐 다소 생소하겠지만 강한 개성과 확실한 매력으로 100년째 세계 추리팬들을 사로잡고 있는 장수 캐릭터들이라고 하겠습니다.


(** 이처럼 한 해 막강한 탐정들이 여럿 데뷔한 해로 1911년도 있습니다. 최초의 ‘성직자 탐정’ 브라운 신부, 그리고 미국을 대표하는 ‘개척자 탐정’ 애브너 아저씨(엉클 애브너)가 1911년 데뷔합니다. 추리소설 탄생 100년을 맞아 주요 추리소설들을 정리 평가해 후대에 자주 인용되는 헤이크래프트는 그래서 1911년을 ‘위대한 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수사의 시대를 연 두 과학자 탐정


반 두젠 교수와 손다이크 교수를 함께 언급하는 것은 이 두 박사 탐정이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또한 추리소설사에서 같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에드가 앨런 포가 만들어낸 ‘추리소설’이란 장르의 역사에서 ‘과학 수사’를 도입시킨 주역들이자 ‘과학자 탐정’이 바로 이 두 먹물탐정들입니다. 

우선 공통점을 보면, 1907년 데뷔 동기인 반 두젠 교수와 존 손다이크 박사는 모두 ‘무지하게 잘난’ 분들입니다. 가지고 있는 지식과 학위가 장난이 아닙니다.


비운의 작가 푸트렐


먼저 자크 푸트렐이 탄생시킨 캐릭터 반 두젠 교수를 보시죠.


중국어판 <반 두젠 교수>. 반 두젠 교수는 커다란 머리가 특징이다.

(** 자크 푸트렐은 비극적인 최후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영화 <타이타닉>이 바로 푸트렐 이야기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내와 함께 타이타닉호에 탔던 푸트렐은 배가 침몰할 때 아내를 강제로 구명정에 태우고 자신은 배와 함께, 그리고 미발표 원고와 함께 바다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이 양반은 정확한 이름이 ‘오거스터스 S.F.X. 반 두젠’(Augustus S.F.X.Van Dusen)입니다. 무지하게 이름이 깁니다만, 직함에 비하면 오히려 짧은 편입니다. 반 두젠 교수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대학에서 철학박사(Ph.D), 법학박사(LL.D), 의학박사(M.D), 치의학박사(M.D.S) 학위를 받았고, 왕립학회 회원(F.R.S) 입니다. ‘직함만으로도 알파벳 거의 모든 글자를 쓴다’고 작가가 적었죠. 직업은 교수, 직장은 보스턴의 어느 대학입니다. 현실적으로 해도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천재로 설정해놓았습니다.

 

본인이 의사 출신이었던 리처드 오스틴 프리맨이 창조한 영국의 명탐정 손다이크 박사(Dr. John Thorndyke)도 잘나시기가 반 두젠 교수 못잖은 분입니다. 손다이크 박사는 추리소설계에 최초로 ‘법의학’을 수사에 제대로 도입했습니다. 수사드라마 <CSI>의 증조할아버지뻘되는 분입니다. 직업은 당연히 법의학자, 그리고 변호사이기도 합니다. 법의학과 함께 병리학을 전공했고, 고고학과 식물학에도 밝고 이집트학에도 전문가입니다. 이 모든 지식을 종횡으로 엮어 추리를 하지요.


손다이크 박사는 최초의 법의학자 탐정이다.

 

그러나 두 탐정의 성격은 좀 다릅니다.

 

반 두젠 교수는 잘났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앞서 소개한 개인의 이력과 경력, 잘남을 절대 감추지 않는 솔직함-달리말하면 ‘잘난척’이 되겠습니다만-이 이 학자 탐정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남들 보기에 정말 어려운 것에 대해 ‘난 실제로 그걸 할 수 있어’라고 꼭 나서서 밝힙니다. 불가능해보이는 것도 머리만 잘 쓰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그럼 당신이 해봐’라고 주변에서 도발하면 보란듯이 해내보입니다. ‘사고 기계’란 별명도 이런 자기 능력 입증과정에서 나왔습니다. 체스도 규칙만 배우면 얼마든지 전문가 못잖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 뒤 체스를 잠깐 배우고 체스 챔피언과 시합을 합니다. 15수만에 반 두젠 교수가 이기자 체스 챔피언이 경악하며 “당신은 인간이 아니야, 사고 기계야!”라고 절규합니다. 이걸 본 기자가 기사로 쓰면서 그는 ‘사고기계’란 별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좀 심하죠?


(** 물론 실제 잘난척의 정도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퀼 포와로가 사실은 훨씬 더 심한 편입니다. 또한 `만물박사 탐정’ 파일로 밴스도 빼놓을 수 없네요. 반 두젠 교수는 그냥 “머리를 쓰면 난 할 수 있어”라고 하실 뿐 포와로나 파일로 밴스처럼 느끼하진 않습니다.)
 
반면, 손다이크 박사는 무척 겸손합니다. 

 

손다이크 박사는 셜록 홈즈보다 데뷔는 늦었지만 설정상 동시대 인물이고 또 실제 홈즈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평가받았던 강자입니다. 당시 영국 추리소설계에서 홈즈의 경쟁자로 평할만한 라이벌은 손다이크 박사, 아서 모리슨이 창조한 ‘서민형 탐정’ 마틴 휴윗(** 이 마틴 휴윗 탐정 책의 삽화를 그린 이는 공교롭게도 <셜록 홈즈> 시리즈 오리지널 삽화가였던 시드니 파젯이었습니다) 등이 있었는데, 손다이크 박사가 가장 강한 경쟁자였습니다.
 
이 손다이크 박사 사리즈는 추리소설사에 커다란 족적을 두가지 남겼습니다.


첫번째 족적은 앞서 언급했듯 법의학을 추리소설에 도입한 것입니다. `최초로 현미경을 활용한 탐정'이 바로 손다이크 박사입니다. 

두번째는 이야기의 구성면에서도 추리소설사에서 아주 혁신적인 변화를 처음 보여주어 이후 하나의 포맷으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손다이크 시리즈는 이전 다른 추리물들과는 정반대로 먼저 도입부에 범행 장면을 보여줍니다. 추리의 단서도 물론 함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다음 손다이크 박사가 증거물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독자들은 범인이 누군지 아는 상태에서 범인과 손다이크 박사가 두뇌싸움을 하는 것을 관전하게 됩니다.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는 거의 모든 작품이 구성이 비슷하고 캐릭터도 단조롭지만 이런 구성 하나만으로도 그런 약점을 극복하며 인기를 모았습니다.  

 

이처럼 먼저 범죄를 보여주고 주인공 탐정이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보여주는 구성은 텔레비전 수사드라마 <형사 콜롬보>가 가장 유명한데,  그보다 훨씬 이전에 손다이크 시리즈가 선보였던 것입니다.


<형사 콜롬보>. 범인을 먼저 보여줘 콜롬보의 추리과정을 관객들이 지켜보게 된다.


셜록 홈즈와 뤼팽만이 그들을 넘었을뿐-100년을 넘긴 생명력

 

그러나, 이 두 탐정은 불운하게도 탐정계의 챔피언은 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껏 골수팬들을 사로잡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홈즈와 뤼팽에겐 못미치고 말았던 겁입니다. 그런 점에서 셜록 홈즈가 얼마나 대단한 캐릭터인지 새삼 실감하게 될 수도 있지요.

 

그러면 왜 이 두 탐정은 홈즈에 못미쳤을까요? 
 
그건 한마디로 “홈즈만큼 매력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들 두 탐정은 모두 과학자 탐정들입니다. 의학 지식과 과학 지식으로 무장하고 증거들을 가지고 분석해냅니다. 이런 `과학자 탐정'들의 등장은 앞선 홈즈 같은 ‘안락의자 탐정’들에 대한 반작용이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의뢰인 이야기만 듣고 귀신같은 추리 능력으로 팍팍 문제를 풀어대는 초기 탐정들의 황당함을 극복하는 캐릭터로 등장한 탐정들이 바로 이들 과학자 탐정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분명 한발짝 더 앞세대 탐정들보다 나아간 ‘진화된 탐정’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에겐 역시 홈즈처럼 덜 과학적이더라도 개성이 강한 캐릭터가 더 먹힐 수 밖에 없습니다. 파이프를 물고 의자에 앉아 점쟁이처럼 추리하는 홈즈가 쪼그리고 앉아 렌즈로 증거물을 들여다보는 손다이크 박사보다 독자들에게 더욱 멋있어 보이는 것이겠죠. 추리 전문가 정규웅씨는 책 <추리소설의 세계>에서 이를 “탐정다운 맛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평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비록 셜록 홈즈에 조금 못미칠뿐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다는 점에서 그 생명력과 매력이 놀라운 탐정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추리소설이란 장르가 미국에서 태어나 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같은 초기 탐정 캐릭터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오늘날 영화는 물론 드라마와 만화에 까지 스릴러들이 대중문화의 최고의 이야깃거리로 번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추리소설의 대중화 덕분입니다. 이제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도 거의 사라지고 있고, 오히려 장르문학이 더 큰 대중적 호응을 얻게 된 것은 장르문학의 대표주자 추리문학의 공이 큽니다.

  

홈즈가 양산해낸 추리소설 팬들에게 더욱 진화한 새로운 탐정의 매력, 더욱 과학적인 글쓰기의 맛을 선사한 차세대 주자들이 바로 이 두 탐정입니다. 이들이 만들어낸 과학자 탐정의 유전자는 오늘날 <CSI>의 그리섬 반장과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에게, 그리고 파트리샤 콘웰의 케이 스카페타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록 오늘날 홈즈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이 두 과학자 탐정들은 또한 홈즈 못잖은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새 올해로 이들이 추리팬들과 만난 지 100년, 한 세기를 넘기며 새로운 세대들과 인연을 맺어가는 두 노익장 박사 탐정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