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준 기자

기자인 내가 블로그 시작했던 이유 2009/06/27

딸기21 2020. 2. 23. 16:43

외부에선 잘 모르지만 출판계에선 꼭 보는 잡지가 <기획회의>입니다. 이름이 좀 독특하죠?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소장 한기호)가 내는 이 잡지가 250호 특집으로 원고를 부탁해왔습니다. 특집의 제목은 ‘블로그의 진화’인데, 이제 출판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블로그의 현황을 미디어 전문가 겸 만화전문가 김낙호씨가 총정리하고, 블로거 5명의 블로그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었습니다.
 
방문자로 보면 정말 파워블로거 그 자체인 <독설닷컴>의 주인공 시사인 고재열 기자,
미술과 패션을 가로지르는 재미난 블로그로 유명한 <문화의 제국>의 김홍기씨,
네이버 블로그를 넘어 블로고스피어에서 손꼽히는 문화예술 파워블로거인 조안나씨,
출판사 블로그로서 단순 홍보의 장이 아니라 독특한 문화발신자로 자리잡은 그린비출판사 블로그의 이경훈 부장,
그리고 <시험에 안나오는 것들>을 운영하는 제가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블로그에 대해 별다르거나 특별한 생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글쓰기가 좀 난해했으나, 뭐 어쩌겠습니까? 그냥 솔직하게 재미없어도 쓰는 것 뿐이었죠.
혹시라도 읽어보실 분들을 위해 올려봅니다^^.


블로그만한 글 실험실은 없다 
 
블로그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잠시 망설였다. 기자 블로그 중에 누적 방문자가 1000만 명을 넘는 곳들도 있는데 내 블로그는 방문객이 엄청난 것도 아니고, 블로그 주제도 대중적으로 관심 많은 분야도 아닌 탓이다.


또한 내 스스로 정체성을 블로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파워 블로그 기자들의 경우 자신을 ‘기자인 블로거’로 규정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블로그도 운영하는 기자’ 정도라고 생각할 뿐이다. 블로그란 어디까지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로그는 분명 놀라운 것이며, 글 쓰는 사람이라면 이 새롭고 중간적인 묘한 공간을 경험해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블로그를 통해 글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고 넓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원고 청탁을 받아들였다.
 
지금 운영하는 블로그 <시험에 안 나오는 것들>은 4년쯤 전 만들었다. 2005년 10월, 몸담고 있는 신문사에서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해 기자 블로그 중 하나로 개설했다.

 

기존 싸이월드 미니홈피나 네이버 블로그가 있었지만 신문사 기자 블로그를 따로 시작한 것은 ‘익명성을 포기하는 강제성 효과’로 스스로에게 부담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기자라는 것을 밝히는 블로그인 이상 철저히 기자 활동의 연장선이자 내가 쓰는 기사 이외의 공개적이고 공적인 글을 쓰는 장소로 삼고자 했다.
 
이 블로그를 만든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분명했다. 내 정체성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리고자 한 내 정체성은 ‘문화 전반을 넘나드는 기자’다. 앞으로 진로를 문화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정했기에 ‘홍보’가 필요했던 것이다.


1995년 신문사에 들어와 꼭 만 14년을 기자로 일했는데, 다른 기자들보다 자주 업무가 바뀌는 바람에 여러 부서를 돌아다녔다. 좋게 말해 멀티 플레이어고 대놓고 얘기하면 전문성이 없는 기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 자신도 주특기를 무엇으로 할지 스스로 정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바보 같게도 직장생활 10년을 넘기고서야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전공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고른 분야가 문화였다.
 
문제는 문화 전문기자로 목표를 정했는데, 이게 마음 먹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기자 생활 14년 중에서 가장 오래 일한 부서가 문화부인데, 3번에 걸쳐 근무했음에도 총 근무 기간이 4년 반에 불과하다(지금도 문화부 소속이 아니다). 그리고 문화부 근무 절반인 2년은 데스크로 일하느라 내 이름으로 기사를 쓰지도 않았다(간간이 펑크 날 때 땜질 기사만 썼다). 평기자로 근무한 나머지 절반도 책 소개만 담당해 다양한 장르를 경험해보지는 못했다.


그러다보니 회사에서도 나를 문화부보다는 경제부나 사회부에서 일할 때 그나마 생산성이 덜 저하되는 기자로 보는 시각이 많다. 독자들은 당연히 <한겨레>에 구본준이란 문화 기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 리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문화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릴 방법은 블로그뿐이었다.


그래서 사회부에 근무할 때 문화 블로그를 만들었다. 당시 나는 서울시경 출입기자여서 문화 관련 글을 쓰고 싶어도 쓸 지면이 없었다. 문화부 기자도 아닌 내게 다른 매체에서 문화 글을 요청할리도 없었다.
 
나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한 공간
 
블로그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나만 쓸 수 있는 문화 이야기’를 써보자는 것이었다. 내가 남들보다 문화를 잘 알아 나만의 지론과 철학을 펼쳐 보이겠다는 것이 전혀 아니라 ‘나는 재미있는데 남들이 글로 잘 쓰지 않는 것들’을 다뤄보려 했다. 블로그에서 주로 다루는 건축과 디자인, 추리소설과 ‘거리 가구’(거리에 설치하는 각종 공공 시설물) 같은 것들이 그래서 고른 틈새분야였다.


글의 지향점은 내가 기존 신문 문화기사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것들을 스스로 깨보는 시도를 하는 것으로 정했다.
 
내가 독자로서 즐겁게 읽는 문화 글들은 비슷한 것들을 모아서 정성껏 비교해 그 특징을 더 선명하게 알게 해주거나,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이 알고 보면 공통점이 있어 이어지는 부분을 짚어주거나, 똑같은 소재가 우리나라와 외국에선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거나, 기사투보다는 이야기를 통해 어떤 항목에 대해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언론의 문화 기사들은 늘 뭔가가 부족했다. 전문가들이 그대로 불러주는 그 장르 종사자들에게만 소중할 의미만 강조해대고, 추상적 관념어와 형용사와 부사를 빼면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글들이 많았다. 진짜 재미있을 법한 이야기들은 뉴스의 시의성이란 족쇄 때문에 기사화되지 않거나 기사로 써도 신문기사 특유의 고전적 틀 때문에 가장 재미없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자로선 그런 부분을 비판하면서도 나 역시 문화부 기자로선 그런 단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번 자유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신문에서는 자기 이름을 걸고 글을 쓰기 때문에 스스로 처음 해보는 실험을 하기가 어렵다. 어디서 그런 연습을 해보겠는가? 당연히 블로그뿐이었다.
 
더 중요한 의미도 있었다. 내 스스로가 기자인 동시에 ‘콘텐츠 생산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콘텐츠 생산을 연습하고 단련할 공간이 필요했다.


기사는 사실 단순하기 짝이 없다. 머리 쓸 일도 별로 없다. 아주 부지런하지 않아도 된다. 남들이 한 행위나 결과(팩트)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남들의 생각(말)을 물어보기만 하면(취재하면) 된다. 모두 남의 것이다. 그러나 콘텐츠는 다르다. 자기 스스로 자료를 모으고, 자기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야 콘텐츠다.


예전과 달리 신문기사는 변하고 있다. 뉴스 속보는 통신과 인터넷으로 넘어갔고, 결국 긴 호흡의 관점 지향적인 콘텐츠형 기사가 필요해졌다. 특히 문화 담당 기자는 그런 능력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런 기자로 가기 위한 나만의 수련 공간으로 블로그를 골랐다.
 
물론 블로그 운영은 한겨레 블로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네이버에서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바로 블로그를 만들어 운영해왔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랬듯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 겸 자료실로 시작했다. 그러나 차차 블로그의 속성을 깨닫게 됐다. 블로그는 미니홈피나 일기장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기 발신욕구가 있는, 메시지를 생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더 유용한 도구가 블로그였다.


블로그가 등장한 초기에는 블로그에 관심이 없었던 기존 파워 콘텐츠 생산자들이 요즘 홈페이지를 버리고 블로그로 몰려오는 것이 블로그의 이런 속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문받은 글을 써주던 프로들이 이렇게 원고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블로그에 빠져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원래 프로일수록 남들이 써달라고 주문하는 글, 써야만 하는 글을 쓰기에 바빠 진짜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쓰기를 더 갈구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혼자만 적는 일기장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읽어보라고 권해야 하므로 블로그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전문 글쟁이들이 파워 블로거로 인터넷을 주름잡는 현상이 훨씬 강해지고, 지금까지 블로그계를 이끌었던 순수 아마추어 파워 블로거들의 비중은 줄어들 것으로 본다.)
 
글쓰기 방식의 변화
 
새로 여는 블로그의 성격은 철저히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곳으로 하고자 했다. 고재열 기자의 <독설닷컴>처럼 다른 기자들의 블로그는 소속 매체의 지면외의 별도로 자신만의 발언 공간, 자신만의 미디어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내 블로그는 철저히 지식과 정보 콘텐츠만을 다루려고 하는 점에서 다른 기자들과는 방향이 좀 다른 편이라고 하겠다.


블로그가 다룰 장르로는 건축과 미술에 주력하기로 했다.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읽고 싶은 건축글을 써주는 사람들이 없어서였다. 건축 책이나 글을 읽으면 재미도 없고 친절하지도 않았다. 전통건축 분야는 더했다. 읽을 책도 적고, 읽어봐도 주심포가 어떻고 익공양식이 어떻고 쓰는데서 그친다. 그리고 우리 건축은 우리만의 훌륭한 문화유산이라고 갑자기 규정지어버린다. 주심포 양식은 왜 나오게 되었는지, 우리 건축은 다른 나라 건축과 뭐가 다르기 때문에 독특한 것인지 풀어주는 책들은 없었다. 내가 그걸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런 부분들을 찾아서 블로그에서 소개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블로그에 썼던 글들이 ‘한국은 굴뚝의 나라’ 같은 글들이었다. 우리 전통건축의 핵심인 온돌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떠들어봤자 요즘 세대들은커녕 나 자신도 그게 그리 위대한 것인지 와 닿지가 않는다. 차라리 그보다는 다른 나라보다 우리 한옥이 발달한 것이 굴뚝이며, 이 굴뚝이 발달한 이유가 바로 온돌에서 나왔다는 것을 차분히 설명하는 방식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에 썼다.


미술이나 문화재도 비슷했다. 박물관에 가면 도자기뿐인데 왜 그런지, 유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도자기가 왜 귀중한지 진짜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은 안 해주고 ‘상감청자운학문매병, 13세기’라는 식으로만 언급하곤 끝이다. 전문가들이야 원래 그렇다고 쳐도 신문 기사들도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썼던 글이 ‘이 도자기가 100억원인 이유’란 글이었다. 도자기 중에서 가장 비싼 도자기를 골라 왜 이 도자기가 비싼지 그 희소가치를 통해 도자기의 특성을 설명해주는 게 더 독자들로선 알아먹기 쉬울 것 같았다.
 
다행히 반응들은 좋았다. 한 포스트를 5만 명도 넘게 읽는 경우도 있고, 댓글이 200개씩 달리기는 경우도 있었다. 기사의 경우 아무리 맘에 안 들거나 재미가 있어도 피드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독자들의 생생한 의견을 통해 글의 소통과 수용방식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는 것은 기사만 써서는 얻을 수 없는 실로 귀중한 경험들이다. 그런 점에서 블로그는 기사에선 쓸 수 없던 소재를 기존 글과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갈 방법을 고민하게 하고, 이 과정에서 오히려 더 기사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글쓰기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줬다. 아직 글쓰기 수준이 높아지는 단계로 승화되지는 못했지만 기존 자신의 글과 다른 글을 시도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남는 것은 많다. 블로그는 신문이나 책과는 유저 인터페이스가 달라 웹 형식에 맞는 글쓰기와 편집을 시도해보게 된다. 만화가 책으로 볼 때는 크기가 서로 다른 네모칸들이 집합적으로 이뤄진 1개 면을 기본 단위로 하지만, 인터넷 만화에선 스크롤로 위에서 아래로 계속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으로 변하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자연스럽게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고. 시각물과 제목 등을 조합하는 편집력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그런 고민 자체가 가장 중요한 블로그의 선물이자 성과일 것이다.
 
글을 ‘잘’ 쓰는 것과 ‘많이’ 쓰는 것
 
4년 가까이 블로그를 운영한 지금 중간 평가를 해보면 개인적으로는 만족하는 편이다. 목표대로 과연 내가 문화 기자로 널리 알려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끔 원고 요청이 오는 것을 보면 봐주시는 분들이 드물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신문사 내부에도 내 정체성은 이후 많이 알려졌다. 비록 문화부가 아닌 기획취재팀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방문하는 분들도 예상보다 많은 편이다. 나도 모르는 새 ‘~우수 블로그 100’이란 것에 뽑히기도 했다. 주기적으로 오시는 단골들은 주로 건축 전공자들로 추정된다.


콘텐츠 측면에선 서서히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다. 원고료도 안 나오는 글을 저 혼자 꾸역꾸역 올린 덕분에 책 제안들이 들어온다. 첫 번째 작업으로 전통건축에 대한 포스트들을 추려 어린이를 위한 건축책을 하반기에 낸다. 올해 초부터는 블로그에 ‘만만건축’이란 시리즈를 시작했는데 내 스스로도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이 무슨 짓인가’ 싶었다. 그런데 첫 회를 인터넷에 올린 날 몇몇 출판사에서 출간제의가 들어와 정말 놀랐다.
 
제법 오래 블로그질을 하다 보니 어떤 글을 써야 방문자가 늘어나는지 대충 감은 오는 편이다. 그러나 그런 글들은 의도적으로 피할 작정이다. 특정 시점에만 통하는 글을 쓰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기에 상관없이 읽히는 글이라야 진정한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지금보다 더 자주 글을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 쓰며 살게 된 기간이 길어질수록 진짜 중요한 것은 글을 잘 쓰는 것 이상으로‘많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몇 명이나 읽어줄지, 글 쓰는 대가는 뭔지 따지기 전에 나는 과연 내가 쓸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쓰고 있느냐 묻게 된다. 내 글을 실어줄 매체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내가 진짜 쓰고 싶은 글을 과연 언제 쓰게 될까? 진짜 정제된 글, 정말 자신 있게 발표할 글만 쓰려 한다면 일생 동안 과연 글을 얼마나 많이 쓸 수 있을까?


블로그는 내게 그런 족쇄들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줬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재미없는 글이어도 블로그에는 담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 것만으로도 블로그는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