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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만건축 8회] 김일성과 간디의 차이-진정한 영웅의 무덤은? 2009/03/14
    건축과 사귀기 2018.10.14 14:50

    러시아가 아직 소련이었던 1991년, 약간은 충동적으로 연수에 가까운 유학을 떠났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으로 적성국가였던 이 나라와 수교는 되었지만, 러시아로 가는 한국인은 실로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홍역을 앓기 시작하고 있었다. 격변기를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러시아 사람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오랜 애증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기존 이념을 혐오하면서도 새로운 이념과 변화에 대한 기대 못잖게 공포와 당혹감을 느끼던 그 때 러시아 사람들이 떠오른다.

     

    기이한 체험이었던 레닌의 묘

     

    공산주의 나라란 뿔달린 도깨비들 나라처럼 생각하던 시절 공산주의의 맹주 소련에 살게 된 나는 공산주의의 실체에 대해 많은 것이 궁금했다. 정말 듣던대로일까, 아니면 또다른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직접 겪어본 공산주의는 실로 허무했다. 왜냐하면 사람 사는 것은 다 비슷한 탓이다. 체제가 무엇이듯 서민들의 생활은 어디나 똑같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진짜 공산주의 나라에서 살고 있구나 실감했던 순간도 많았다. 그 중 한 순간이 바로 러시아 혁명의 아버지 레닌의 묘를 방문했을 때였다. 




    레닌의 묘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크렘린의 한쪽 담 옆에 있다. 붉은 크렘린의 담처럼 붉은 돌로 피라미드처럼 단을 쌓아 만든 건축물이다.

     

    러시아에서 레닌이 갖는 위상은 상상 이상이었다. 어디를 가도 레닌의 이미지를 피할 수 없을 만큼 곳곳에 레닌 얼굴이 붙어있었다. 20세기 최대의 논쟁적 인물, 아니 논쟁적이란 단어도 초월해버리는 그 인물을 기리는 상징적인 곳이 바로 저 레닌묘다. 길게 줄서 제법 오래 기다린 뒤에야 저 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두운 공간 안에 홀연히 홀로그램처럼 빛이 비추는 레닌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실제 이 역사속 인물의 주검을 본 순간은 오히려 허무했다. 아니, 비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했다. 숨진 지 수십년 지난 그의 방부처리된 모습은 그저 인형같고 기념품같았다. 아무런 생기가 없는 너무나 물질적인 모습이었다. 게다가 방문객들이 많아 그 앞에 멈춰서서 구경할 수 없이 지나가며 봐야 했기에 그저 잠깐 볼 수있을 뿐이었던 것도 실망스러웠다. 

     

    실제 레닌의 모습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레닌을 기리는 저 방식이었다. 말로만 듣든 방부 시신을 보면서 공산주의식 기념법을 처음 만난 것이 더 내게 기억에 남았다.

     

    1924년 ‘위대한 지도자 동지’ 레닌이 숨지자마자 그의 후계자들은 그를 기념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블리조프란 학자가 레닌을 바로 특수처리했고, 해부학자인 바라비요프와 카루시스가, 그리고 화학자 즈바르스키가 레닌의 생전 모습 그대로 주검을 보존하는 방부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가 타계한 지 5년 뒤에 비로소 이 살아있는 주검을 모실 공간을 마련했다. 바로 저 돌 묘다. 

     

    혁명의 지도자 동지를 우상 숭배하듯 기리는 모습은 사실 자본주의 국가 사람들에겐 공산주의 국가들의 촌스러움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따지고 보면 어느 나라나 건국의 아버지, 초대 대통령, 또는 민족주의적 독재자들을 숭배하긴 마찬가지인데도 말이다. 미국이 워싱턴을 기념하는 으리으리한 공간을 지어놓은 것이나 한국의 수구들이 박정희를 기리는 것이나 저 레닌을 방부처리해 놓는 것이나 중요한 역사인물을 기리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현대의 미이라를 보는 것은 묘할 수 밖에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레닌에 대한 러시아 사람들의 숭배 열정에 견주면 묘는 그리 화려하거나 거대하지 않다는 점이다. 작은 규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다. 처음 붉은 광장에 가면 저 레닌묘는 빨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 편이다.

    레닌의 묘 주변에는 또한 10월혁명 때 죽은 노동자와 병사의 무덤도 있다. 노동자와 병사들을 이끌고 혁명을 이룩한 레닌에게 어울리는 구성같지만, 지도자를 기리기 위해 병사와 노동자를 소품처럼 활용한 듯한 느낌도 든다. 

     

    레닌이 저 세상으로 간 지 벌써 85년이나 지났다. 그 사이 저 유해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그를 그냥 땅에 묻는 것이 좋겠다는 반론이 많았지만 소련 공산당은 저런 식으로 그를 기념하길 고집했고, 그래서 지금도 저 모습으로 있다. 문득 저 묘를 생각할 때면 그 어두운 공간 속에서 허옇게 혼자 빛나는 레닌의 화학처리된 창백한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거대한, 그러나 건축적으론 실망스러웠던 마오쩌둥의 기념당

     

    소련 혁명의 아버지 레닌묘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혁명의 아버지 마오의 묘는 어떨까 궁금했다. 그러나 그 마오의 묘를 본 것은 16년이 지난 2007년에서야였다. 기자생활을 잘못 했는지, 해외출장복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천안문 광장을 나는 2007년에야 처음 내 눈으로 봤다. 그나마 미국, 북한은 아직도 못가봤다. 

     

    2007년 천안문을 본 그 출장은 내겐 잊지못할 기록적인 출장이다. 역대 최단기간 해외출장이라는. 1박2일. 출발일과 도착일뿐인 일정이었다. 둘째날 2시간 정도 여유가 났는데 2시간 동안 어딜 가보겠는가. 당연히 천안문 광장뿐. 직접 본 천안문 광장은 예상과는 달랐다. 무지하게 넓고 압도적일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그렇게 광활해보이지 않았다. 물론 건물들은 실로 컸다. 그래도 너무 큰 것들이 비슷한 크기로 이어지니 비교가 안되어 크기가 실감나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그 여러 천안문 광장 건물 중에서도 마오의 무덤, 그러니까 모주석기념당은 더욱 눈에 안들어왔다. 그 이유는, 건물이 촌스럽기 때문이라 하겠다. 

     



    저 모주석기념당은 전형적인 기념관 건물이다. 높지는 않아도 넓고 긴 덩치, 기둥을 줄지어 세운 디자인이 모두 전형적이고 특색이 없었다. 거대하긴 한데 웅장함, 장엄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 저 건물을 지은 과정을 보면 저렇게 감동적이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로 돈을 들이고 온갖 의미를 부여했다. 건물 주춧돌 놓았다고 정초식을 할 때는 대만해협에서 물을 떠와 뿌렸고, 화강암은 쓰촨 것을 가져다 썼으며, 자기는 광동것으로 석명은 쿤룬산 것을 공수해왔다. 기념관에 있는 소나무는 중국공산당 혁명의 성지인 산시지방 안엔에서 13그루를 가져왔는데, 혁명 기간이 13년의 고난의 행군이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마오 자신은 죽고나면 화장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레닌 묘를 보며 배운 것을 그대로 마오에게 적용했고, 그는 전시물이 되었다. 그러나 감동은 없다. 너무 선전용이기 때문이다. 그런 전시의도가 레닌묘보다 훨씬 더 강하다. 마오의 인간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범접할 수 없는 신격인 마오만 강요하는 공간이다. 공산주의형 영웅묘 건축의 특징과 한계가 분명한 건축물이다. 



     

    마오는 분명 불가능해 보인 혁명을 성공시켜 중국인들을 하나로 묶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러나 혁명을 이룬 다음에는 동지와 인민을 대상으로 문화대혁명이란 또다른 혁명으로 처참한 피바람을 일으켰던  잔인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얼굴도 두가지다.  한편으론 신이다. 실제 신이다. 안전운행의 신으로 추앙받아 중국의 운전사들은 운전석에 마오 얼굴을 붙인다. 또 다른 한편으론 증오의 대상이다. 저 기념당의 크리스털 묘는 여러차례 파괴하려는 공격을 받았다. 마오기념당을 참배하고 공격하는 두가지 태도는 두 얼굴의 마오를 바라보는 두개의 시선, 곧 중국 현대사의 명과 암을 그대로 반영하는 셈이다. 

     

    검소한 할아버지 영웅에게 바쳐진 거대한 묘

     

    중국이 내게 1박2일 최단기간 해외출장 기록을 남겨준 출장지였다면, 베트남은 24박25일 최장기간 해외출장 기록을 남겨준 잊지못할 나라다. 문화중심지인 호치민시가 아니라 근엄한 행정수도 하노이에서만 지내는 바람에 하루라도 더 있다가 가고싶기는커녕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던 유일한 해외 출장이었다. 이 지루하고 긴 출장 때 그 안에는 못들어가보고 지나다니며 바라봤던 하노이의 명소가 바로 베트남 인민의 아버지 호치민의 묘였다.




    호치민은 공산주의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갖게 만드는 인물이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책 <목민심서>를 즐겨 읽으며 지도자로서 자신을 수양했던 인물이다. 실로 검소했고, 실로 성실하게 자기 수양을 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낸 지도자다. 그의 놀라운 신실함과 탁월한 리더십은 이념을 떠나 동서양 모두에게 존경과 연구의 대상으로 평가받는다.

     

    호치민에 대한 베트남의 존경심은 소련과 중국이 레닌과 마오를 존경하는 것 이상이면 이상이지 덜하지는 않는다. 소련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그를 레닌에게 바쳐 이름을 레닌그라드로 바꿨듯, 베트남은 가장 큰 대표 도시 사이공을 호치민에게 바쳐 호치민시로 이름을 바꿨다.

     

    그런데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는 호치민의 묘가 왜 저리 웅장해졌을까?


    당연히 호치민은 자신은 화장을 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베트남 공산당은 1969년 그가 죽자마자 위대한 지도자의 말을 바로 거부했다. 그리고 마오기념당처럼 온 나라에서 천연재료들을 가져다가 저 커다란 묘를 지었다. 호치민묘가 마오기념당보다 먼저 지었으니 중국 공산당이 이 방식을 보고 따라한 셈이다. 그리고 호치민의 유해 역시 방부처리해 전시하기로 했다. 허나 나라 사정이 열악한 베트남이 첨단 과학이 필요한 방부처리를 스스로 할 수는 없는 법. 주검 방부 원천기술 보유국인 러시아에 부탁해 방부처리를 했다. 지금도 호치민의 주검은 러시아에서 방부처리를 주기적으로 하느라 1년에 3개월은 기념관 문을 닫는다.

     

    저 묘 역시 다른 지도자 동지들의 묘처럼 방문할 때 규칙을 지켜야 한다. 내부에서 사진을 못찍는 것은 기본이고, 반바지나 노출 심한 옷도 안된다. 경건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심지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것도 안된다고 한다!

     

    건축적으론 어떨까? 역시 기념 건물, 분묘 건축의 전형성을 충실히 따른다. 당연히 개성은 좀 모자라다고 하겠다. 호치민 자신이 저런 웅장함을 원할리 없었다는 점에서 정치권력의 속성과 장묘 건축의 특성을 역시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현대판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터키의 마우솔레움

     

    20세기의 역사는 유럽 국가들이 저지른 식민지배 범죄가 비틀고 왜곡한 현실로 야기된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피지배 민족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거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민중을 이끈 희대의 거인들이 각 나라를 대표하는 건국의 아버지로, 또는 독재자로 등장했다. 터키에선 케말 파샤 또는 아타튀르크로 불리는 이가 그런 인물이다.


     


    한때 유럽을 비천하게 아래로 보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병든 환자가 되어 수모를 당하다가 1차대전과 함께 무너지고 만다. 군인이면서 새로운 근대사회를 꿈꾸는 급진적 정치운동에 몸담아왔던 무스타파 케말은 그리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새로운 터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마침내 그는 국왕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독립 터키공화국을 선포하며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완벽한’이란 뜻의 별명인 케말을 자기 이름으로 쓰는 것만봐도 무척이나 영웅스런, 영웅이길 갈망했던 사람임을 알 수있다.

     

    터키공화국 수립이후 그는 15년이나 나라를 이끈다. 터키 내 여러 민족들의 갈등 문제, 그리고 독재적 성향 등의 비판받을 점도 남겼지만 그는 국부로 추앙받으며 실로 터키에 엄청난 영향을 남겼다. 1934년 터키 의회는 그이게 아타튀르크, ‘조국의 아버지’란 호칭을 헌정하기까지 한다. 좀 지나치다 싶겠지만 20세기 초반이었던 점을 감안하자.

     

    이 조국의 아버지가 숨진 다음 터키가 실로 웅장한 묘를 지었음은 그래서 당연할 정도다. 앙카라에 있는 아타튀르크의 묘는 그냥 무덤(Tomb)이 아니라 마우솔레움 수준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바로 이 묘의 거대함과 웅장함은 바로 전해져온다. 아쉽게도 아직 터키를 가보지 못한터라 저 묘도 당연히 못가봤다. 터키에 가면 저 묘말고도 볼 것이 많아 과연 저 묘까지 보고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타튀르크의 묘는 건축적으로는 그래도 마오기념당이나 호치민묘보다 나아 보인다. 우선 건물의 디자인이 비례가 더 맞는 모습이다. 그리고 확실하게 사람을 압도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며 그 의도가 건축적으로 잘 구현된 듯하다. 저런 건물이 인간적으로 정감이 느껴질지는 의심스럽긴 하지만.

     



    터키가 공산주의 나라가 아닌 까닭에 방부처리된 아타튀르크의 주검은 없다. 대신 검은 관이 있는 모양이다.



     

    보시면 알겠지만 이런 장묘 건축물들은 아주 공통점들이 많다. 웅장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로 석조 건물로 짓고, 석조건물이든 콘크리트 건물이든 기둥을 줄지워 세워 장중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다들 비슷비슷한 것이 약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둥 디자인을 뛰어넘는 권위주의 표현방식은 아직까지 개발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서를 막론하고 이 줄기둥 건물들이 들어서왔다.

     

    아타튀르크의 묘는 그 규모나 방식에서 민족국가 탄생기 국가 지도자를 기리는 기념묘들의 대표스타급이다. 그리고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건물이다. 아타튀르크는 전제 왕정을 무너뜨리고 국민이 주인인 공화국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무덤을 보라. 대통령인 그의 무덤은 그가 무너뜨린 술탄의 무덤보다 더 거대하다. 한계가 많은 지난 세기 민족주의와 공화제, 시민혁명의 모습을 저 무덤은 보여준다.

     

    그럼 평양에선?

     

    국가 지도자를 우상 숭배하듯 기리는 것에 관한한 북한을 능가할 나라가 있을까? 북한의 김일성 숭배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한다해도 다른 체제, 다른 나라, 다른 사회 사람들에겐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고 섬뜩하기까지 한 모습들이다. 그러니, 이 글에서 김일성의 묘를 안 다룰 수 있겠느냔 말이다.


    김일성의 묘가 어딘지 사람들이 빨리 이름을 떠올리진 못할 것 같다. 김일성묘는 ‘주석묘’니 이런 호칭으로 안불리고 ‘금수산기념궁전’이란 이름이 있다. 기념당이 아니라 기념궁전이란 칭호가 역시 심히 북한스럽다.


    금수산이라고 하면 등산애호가들은 충북 단양에 있는 금수산을 떠올리시겠지만, 평양 대동강 옆에 있는 산이다. 모란봉으로 불리기도 하는 평양의 대표적인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이라고 하겠다. 물론 못가봤다. 


    그럼 금수산기념궁전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렇게 생겼다. 




    권위주의 건물이 뭔지, 정치적 체제 선전용 공산주의 건물이 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형적인 건물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그 규모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크게 짓기에 환장한 중국을 능하가는 나라가 바로 북조선과 대한민국이다. 우리와 북한의 건축적 공통점이자 특징이 크기에 환장하는 점이란 사실이 참 쑥쓰럽고 안타깝다. 북한의 저 금수산기념궁전은 앞서 본 천안문 광장의 모주석기념당보다 클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에서도 “모주석묘보다도 큰 우리 수령 동지의~”라고 자랑스러워 할 것이 틀림없어보인다. 


    건축물의 크기에 집착하는 것만큼 촌스러운 것도 없다. 이 분야에서 북한은 지존급이다. 짓다 만 채 남은 괴물 유경호텔을 보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텔을 짓겠다며 도전했다가 완공도 못한채 저렇게 남겨놓고 있다. 당연히 건축사에 남을 해프닝이자 비웃음거리가 됐다. 

     


     

    다시 김일성 묘인 금수산기념궁전 이야기로 돌아가자. 남북한 회담 때 기사에 가끔 등장하는 이곳은 당연히 북한의 성지다. 이 금수산기념궁전이란 이름보다는 아무래도 ‘주석궁’이란 이름이 더 친숙할 것이다. 원래 김일성 관저였는데 그가 죽은 뒤 유해를 안치해 묘가 됐다. 공산주의 국가의 전통대로 당연히 김일성도 방부처리되어 있다고 한다.

     

    건물이 전형적인 북한 양식으로 김일성 65회 생일 기념으로 1977년 완공했다. 짓는데 4년이나 걸렸다. 원래는 저리 큰 규모는 아니었는데 궁전으로 승격되면서 건물이 화끈해졌다. 중앙에 있는 홀에는 너비가 60미터나 되는 대형 초상화가 있다고 한다. 크기에 대한 집요한 집착이다. 

     

    모든 건물은 실제로 보아야 알 수 있다. 언제쯤 저 건물을 내 눈으로 보게될지 짐작조차 어렵다. 실제로 봐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평가를 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런 우상화용 건물이 우리 북쪽에 지어지고 있고, 그런 데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사이 굶주린 북한 국민들이 죽어가는 점이 안타깝기만하다. 분노를 일으키는 건물이다.

     

    드디어 소박한 감동을 주는 묘를 만나다 

     

    저런 국가 지도자 묘들을 직접 보고 또는 사진으로 보면서 참 안타까웠다. 위대함은 포장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호치민을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검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검소한 실제 모습을 더 보여주는 것이 낫다. 그러나 그보다도 저런 웅장한 묘로 그가 위대하다고 부르짖기만 한다. 고함에는 귀를 막아도 나직한 소리에는 오히려 귀를 기울이는 법이다. 

     

    그러다가 최근 인도를 다녀오면서 진정 위대한 지도자의 무덤을 만났다. 델리에 있는 간디의 추모공간 ‘라즈 가트’다. 



     

    델리에서도 올드델리에 있는 장묘공원 중에서 특별히 ‘라즈 가트’라 이름붙인 구역이 바로 간디의 추모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결코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사진으로 보면 웅장해보이지만 오히려 간디의 유명세와 그를 존경하는 인도 사람들의 사랑에 비기면 초라할 정도다. 공동묘지 중심에 라즈가트로 가는 통로다. 가운데 라즈 가트의 문이 보인다. 그 안으로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간디를 모신 신성한 곳이기 때문이다. 문을 지나면 아담한 정원 같은 공간이 나오고 그 가운데에 간디 추모 조형물이 있다.

     


     

    간디는 화장을 했다. 그래서 그는 무덤조차 없다. 참으로 간디답다. 하지만 그를 화장한 자리에 저 검은 대리석 제단을 만들었다. 그를 기리려는 수많은 인도인들, 그리고 외국인들이 참배할 곳은 있어야 했을 것이다. 저 소박한 제단에 연간 1000만명이 참배하러온다고 한다. 제단 앞에는 간디의 유언 “신이여”란 짧은 말을 새겼다. 우리가 갔을 때에도 인도 전역에서 온 사람들이 참배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라즈 가트는 화려하지 않다. 대신 평온하고 차분하다.  위대한 지도자는 무덤이 아니라 존경할만한 언행으로 그를 사랑하는 대중들의 마음속에 남는다. 간디의 추모장은 규모는 세계 그 어떤 정치 지도자의 무덤보다도 작을 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 간디만큼 인류에 많은 메시지를 남겼겠는가? 


    촌스럽게 거대한 기념묘는 떠난 지도자를 존경하기 보다는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술수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간디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저 소박한 화장터를 만든 선택은 진정 현명하고 훌륭하다. 그의 후계자들이 진정 간디를 존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간디의 힘이다.

     

    저 검소한 간디의 화장터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분묘 건축은 그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기념 건축에선 미학 이전에 기념하는 태도와 방식, 그 진정성이 건축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도. 간디의 기념 제단은 건축같지 않아도 훌륭한 장묘 건축이었다.


    문득 우리 기념 건축물들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 선생을 모신 백범기념관이, 국립현충원이 생각났다. 할 말이 많지만 그만 입을 다물게 된다. 간디의 라즈 가트처럼 소박해서 좋은 장묘 건축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 이전에 존경할만한 지도자가 어서 나오길 바랄 뿐이다. 위대한 지도자가 나와야 좋은 묘가 나올 것 아닌가.


    초고층 빌딩에 환장하는 우리의 한심함이여

     

    우리는 저 김일성 묘, 곧 금수산기념궁전을 보며 촌스럽다고 비웃게 된다. 저런 우상화 정책, 권위만을 강조하는 스타일과 지나친 호화로움은 당연히 비웃음을 살만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크기에 집착하는 점 만은 비웃기 어렵다. 우리도 마찬가지인 탓이다.

     

    짓다가 지붕에 불이 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일어나 부실공사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 천안의 독립기념관의 본관이 ‘겨레의 집’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 독재정권이 그토록 강조했던 자랑거리가 “천안문보다도 큰 동양 최대의 기와집”이란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지금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는가? 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까? 건물은 크기와 높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 때문이다. 

     

    독립기념관이 천안문보다 크다고 해서 한국의 독립기념관이 중국 천안문보다 위대하며 아름답다고 생각해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세금을 자기 돈처럼 여기고, 건축과 문화에 대해 조금의 지식도 없는 상스러운 돌대가리 정치인들뿐이다. 

     


     

    평양의 유경호텔도 쉽게 비웃을 일이 아니다. 정작 우리는 유경호텔을 하나도 아니라 여럿 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초고층 빌딩에 한국처럼 집착하는 나라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한국 기술로 짓는 것은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있다고 해서 그 나라가 자랑스러울 일은 없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대만에 있다. 그럼 대만이 건축문화 세계 1위인가? 그 직전까지는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타워였다. 세계 1위 건축국가가 말레이시아에서 대만으로 넘어간건가? 이제 두바이에 버즈 두바이가 지어지니 두바이가 세계 최고인가?

     

    지금 세계의 초고층 빌딩은 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끼리만 경쟁하는 분야다.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들은 관심도 없다. 필요하면 지으면 되고, 그걸 짓는다고 좋은 나라가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선 집요하게 초고층빌딩을 지어야 국력의 상징이자 랜드마크가가 된다고 노래를 부른다.

     

    기업들이 초고층 빌딩 짓겠다는 것은 말릴 수 없다. 임대가 안되어 손해를 보면 그건 자신들이 그대로 감당할 일이다.정말 한심하고 멍청한 것은 지자체장 같은 정치인들이 초고층 빌딩을 짓자고 헛소리들을 하는 점이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중구다. 중구청장이란 사람이 한번 두바이에 다녀오더니 서울 중구에 220층짜리 빌딩을 지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닌다. 자기 돈 들여 지을 것도 아니면서 그런 주장을 펼치며 두바이를 말한다. 역사도시 서울에서도 가장 중심부 오래된 중구에 밑도 끝도 없이 220층 빌딩을 지어 국가 상징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미 중구에는 너무나 많은 국가적 상징이 있다. 그나마 멀쩡히 잘 있던 국보 1호 숭례문을 태워먹은 게 중구청이다. 

     

    서울 중구를 파리나 런던, 로마와 비교해도 부족한 판인데 두바이와 비교하면서 두바이를 본받자고 한다. 부동산 투기용 건설로 나라를 살리겠다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니 이런 코미디가 생겨난다. 자기 도시에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면 자기 도시가 대한민국 최고 도시가 된다고 믿는 꼴이다. 솔직히 묻고 싶다. 진정 그걸 믿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그런 말에 속아주는 유권자들이 있으니 지껄이는 것이라면 차라리 낫다. 높은 빌딩 들어서면 정말로 이미지가 좋아진다고 믿는다면, 그건 무뇌 정치인이다. 어찌됐든 220층 건물 지으면 국가 위신이 선다는 지자체장이 대한민국 1번지 중구에서 뽑힌다. 비극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건설업체 광고로 먹고사는 일부 언론들이 광고주들을 위해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초고층 빌딩을 예찬하기 바쁜 점이다. 그런 기사들이 양산되는 한 제2, 제3의 중구청장이 나올 가능성은 높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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