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거대한 탑, 그저 바라만 보다 2009/02/11

딸기21 2018. 10. 5. 15:21


 

유적지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광으로 보이는 탑은 세밀하고 정교한 디자인을 숨긴 채 실루엣으로 먼저 다가왔다. 인도에 대한 이미지로 세계 사람들에게 각인된 거대한 탑, 쿠틉 미나르다.


인도의 아이콘이 된 거대한 탑, 쿠틉 미나르

 

쿠틉 미나르는 거대한 저 탑과 주변의 폐허가 된 유적지를 합친 사적이다.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델리의 대표적인 명소다.

인도의 모든 관광지는 내국인과 외국인의 입장료가 다르다. 당연히 외국인 입장료가 몇배나 비싸다. 입장권은 어디나 똑같은 디자인이다. 좋게 말하면 단순깔끔하며, 나쁘게 말하면 허접해보인다. 



 

거대한 탑을 보며 유적지 안으로 들어간다. 높이가 73미터인 석탑은 왠만큼 멀리 떨어져 찍지 않으면 사진기 프레임으로 쉽게 담기 어려울 정도로 높고 크다. 

올려다 보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은데, 그냥 마주 바라보면 아담하다. 경쾌하고 산뜻한 디자인의 힘일 듯하다.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합쳐진 표면에 정교한 부조로 한껏 치장했다. 

 



저 탑은 인도 북부를 제패한 이슬람 왕조의 쿠틉 웃딘 아이바크가 이슬람의 승리를 기념해 13세기 지은 것이다. 저런 거대한 탑은 국가적 대사업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법. 쿠틉 웃딘 아이바크가 저 탑을 국가 사업으로 지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쿠틉 웃딘 아이바크는 그 신분의 변천으로 볼 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음을 보여준 사람이다. 도적이었다가 중국 황제가 된 주원장 같은 이라고나 할까. 


훗날 제왕이 되었지만 그는 원래 노예였다. 그의 왕조 이름은 노예왕조다. 노예 출신이었지만 그의 머리와 결단력은 비상했다. 그는 군대에서 성공을 거둬 장군이 되었고, 델리의 총독이 되어 국왕이 죽은 뒤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술탄이 된 사람이다.


건축과 관련된 인간의 속성이 있다. 정점에 오른 자가 스스로를 빛내는 속성이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스스로 만족할 위치에 오르면 누구나 건축을 시도한다. 개인으로서 경제력을 어느 정도 갖추면 자기 집을 짓고, 회사가 경제력을 갖추면 사옥을 짓는다. 


국가나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세우면 건물을 짓고, 선거에서 당선되면 건물을 짓는다.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사람은 독립기념관과 예술의전당을 지었고, 쿠데타를 이끈 친구를 이어 대통령이 된 사람은 전쟁기념관을 지었고, 샐러리맨을 하다 서울시장이 된 사람은 청계천을 새로 지었다. 

미테랑은 건축으로 성공을 자축한 정치인, 건축으로 성공한 정치인의 지존격이다. 온 파리에 기념 건축을 남겼다. 심지어 이렇게 건축에 집착하다 쫓겨나는 정치지도자도 적지 않다.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는 국력에 걸맞지 않은 호화 건물에 집착하다 쫓겨났고, 무굴제국의 샤 자한은 마누라 묘를 20년 동안 짓다가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갇혔다.


이렇게 정치적 승자가 짓는 건물들은 단순히 자기를 빛내는 목적이 주가 되지만 다른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경우도 많다. 자신과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는 가장 효과적인 홍보물로 건축을 활용하는 것이다. 

쿠틉 웃딘 아이바크도 그런 노림수로 건축을 활용했다. 그 스스로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고 싶었던 동시에 힌두교들의 땅에 이슬람을 빛낼 새로운 랜드마크가 필요했다. 이슬람 모스크와 꾸란 내용을 담은 기념비 같은 저 탑을 힌두교 성전이 있던 곳에 세워 새 종교와 새 왕조의 힘을 알렸다.


탑은 그렇게 지은 지 어느새 800년 가까이 지났다. 그럼에도 너무나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주변의 풍경은 정 반대. 허물어져 백골처럼 앙상하게 남은 쿠틉 모스크 건물들이 이 탑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너무나 깔끔하고 화려한 탑과 허망함을 보여주는 허무한 폐허가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가 이곳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저 쿠틉 미나르의 바로 옆에는 짓다만 새 탑의 흔적이 있다. 밑둥의 크기만으로 보면 쿠틉 미나르를 능가하고도 남을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지어지지 못했고, 저렇게 폐허로 남고만 그런 운명의 탑이다.

 



쿠틉 미나르의 유적군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고고학 개념 하나를 제대로 만날 수 있다. 바로 ‘오파츠’다.

 

오파츠(OOPARTS)는 ‘out-of-place artifacts’의 약자다. 있지 않아야 할 곳에 있는 유물이란 뜻이다. 삼엽충이 없을 지층에서 삼엽충 화석이 나온다든지 하는 것 되겠다. 고고학에서 이런 것으로 대표적인 사례가 중남미에서 여럿 발견된 수정해골이다. 요즘 기술로도 가공하기 어려운 능력으로 가공한 수정이 연대가 만지 않는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다. 어디서 본 듯한 해골 이야기라고? 바로 지난해 개봉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4편>의 소재가 된 그 크리스털 해골이다.

쿠틉 미나르 유적지에도 일종의 오파츠가 있다. 바로 이것.

 



저 철기둥은 우선 녹이 슬지 않는 철기둥으로 유명하다. 바깥에 노출되어 있는데 신기하게도 녹이 안슨다. 그리고 또 한가지로 유명하다. 쿠틉 미나르는 700여년 전에 지었는데, 저 철기둥은 1600여년전 쇠기둥으로 판명됐다. 기이할 따름이다. 그래서 오파츠다.

쿠틉 미나르를 둘러싼 유적들은 인도 최초의 이슬람 사원의 잔해들이다. 힌두교 사원이 있던 곳에 이슬람 사원을 지으면서 기존 건축물의 자재를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유적이란 참 묘하다. 멀쩡하고 깨끗한 것보다는 허물어진 것, 있던 것이 사라진 곳이 더 강한 울림을 준다는 점이다. 잘 지은 큰 절 보다는 사라진 옛 절터가 더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반쯤 부숴진 신전과 건물이 더욱 역사의 흥망성쇠를 강하게 보여준다. 


멀리 해외로 갈 필요도 없다. 미륵사지나 거돈사지를 보라. 불국사나 해인사보다 더 묘한 상념이 물결치게 만든다. 우거진 수풀, 그 속에 군데 군데 남은 건물의 잔해들, 그리고 바람소리 같은 것들이 역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폐사지나 허물어진 유적지는 해질녘 혼자 퍼질러 앉아 하염없이 앉아서 지켜봐야 제 맛이다. 저무는 날빛 속에서 놀에 물드는 폐허 유적지의 풍경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힘을 갖는다.

 

폐허 속에 홀로 우뚝 선 쿠틉 미나르 탑은 그래서 더 묘하고, 주변의 폐허는 탑과 대비되어 더욱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마침 저녁이어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잔디밭 벤치에 앉아 저녁해가 부리는 요술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탑을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았다. 멋진 건축, 멋진 빛, 그리고 그 속에 역사가 세월을 뛰어넘어 방문객들과 교감하고 있었다. 좋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