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만만건축 2회] 파괴가 만들어낸 예술 2009/01/15

딸기21 2018. 9. 16. 16:52

코번트리. 인구가 한 30만명쯤 되는 영국 도시입니다. 이 도시의 상징은 뜻밖에도 벌거벗고 말탄 여인네입니다. 

애마부인? 아닙니다. 고다이버 부인이란 이랍니다. 그 유명한 고다이버 부인입니다.


<고다이버 부인> 존 콜리어 그림



고다이버 여사는 1000년쯤 전, 이곳 영주의 부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주 돈독이 오른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세금을 너무 심하게 걷어 백성들이 죽을 지경이었다고 하네요. 부인 고다이버 여사마저 남편을 말렸습니다. 세금 좀 작작 걷으라고. 그 말을 들은 남편, 과연 뭐라고 했을까요? “뭐? 나보고 돈을 덜 걷으라고? 그럼 당신이 발가벗고 한번 동네 한바퀴 돌아봐. 그럼 한번 생각해볼께.” 

 

자기 부인을 조롱하는 꼴을 보니 영주 수준이 저질 싸구려네요. 그러나 부인은 명품이었습니다. 고민하던 고다이버 부인, 정말 그걸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발가벗고, 말타고, 동네를 돌기로 한 거죠. 


그 여자, 고다이버 부인의 도시 코번트리의 명물


그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고다이버 부인이 퍼포먼스에 나선 날, 코번트리 사람들은 모두 창문에 커튼을 치고 부인의 나체로를 훔쳐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영주 남편은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세금을 줄여줬다는, 그런 이야기지요.


그리고 이 전설엔 영주 남편말고도 또 한명 X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영주 부인 몸매가 어떤지 혼자 훔쳐본 톰이란 사람이었습니다. 벌을 받았는지 눈이 멀었다는데, 그 이름을 후대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peeping Tom’, 그러니까 엿보기쟁이 톰인데, 이후 관음증 환자같은 사람들을 지칭할때 쓰는 영어 관용구가 되어버렸습니다. 한번 엿봤다고 처절하게 엿먹은 사나이군요.

 

이 유명한 전설의 고장이니 당연히 고다이버 부인은 코번트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코번트리 사람들은 이런 동상도 세우고,

 



일찌감치 이런 기념행사도 벌여왔다고 합니다. 


<라이프>지의 사진가였던 마크 카우프만이 찍은 1948년 행사.


 

그런데 이 코번트리에는 고다이버 부인말고도 또다른 상징이 있다고 합니다.

코번트리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세인트 마이클 대성당, 그러니까 성 마이클 대성당입니다.



 

자세히 보면 저 건물이 좀 어딘가 이상합니다. 창문 너머로 그냥 하늘이 보입니다. 오른쪽 건물들은 중세 건물이 아니라 요즘 건물 같습니다.

 


 

내부를 보면 폐허가 된 건물을 정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폐허를 그대로 놔뒀네요. 그리고 그 옆으로는 현대식 건물이 붙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두 건물이 이어져 한 건물 두 컨셉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 성당은 왜 이렇게 생기게 된 걸까요?

 

파괴된 랜드마크, 다시 영국의 간판이 되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11월 14일 밤이었다고 합니다. 이날 코번트리 시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어버렸습니다. 코번트리의 자랑이었던 성 마이클 성당은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습니다.




웅장하던 성당은 첨탑과 일부 벽만 남고 나머지 부분들은 모조리 망가졌습니다. 국가대표급 문화재가 저지경이 되었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당시 수상이었던 그 유명한 윈스턴 처칠경이 현장을 돌아보는 표정이 실로 침통합니다.

 


 

붕괴 4년이 지나고서야 전쟁은 끝났고, 그 뒤로 5년이 더 흘러 1950년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코번트리 대성당을 새로 짓는 계획이 시작됩니다. 

유서 깊은 성당이었으니 난다긴다는 건축가들을 경쟁시켜 최후 승자를 봅았습니다. 설계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남은 탑이나마 보존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이 공모에서 뽑힌 건축가는 배질 스펜스 경. 경이 붙었으니 한건축 하시는 분이 틀림없었겠지요.

 

배질 스펜스는 폐허 성당 옆에 붉은 돌성당을 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붕괴 현장은 그대로 남겨 공원으로 꾸몄습니다. 성당이 완성된 것은 12년만인 1962년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옛 성당과 좋은 짝을 이루는 모던한 새 성당이 탄생했습니다. 축성식에선 영국의 현대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이 작곡한 <전쟁 레퀴엠>이 초연되어 울려퍼졌습니다.


테두리선 왼쪽이 배질 스펜스경의 새 성당, 오른쪽이 폭격으로 무너진 옛 성당이다.


 

배질 스펜스는 자신을 뽑아준 보답을 했습니다. 11세기 만들어졌던 성당이 박살이 나버렸지만 배질 스펜스는 다시 새 성당을 붙여 그 못지않은 랜드마크를 코번트리 시민들에게 돌려줬습니다. 모더니즘 새 성당과 폐허가 된 옛 성당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도 성공했습니다. 단숨에 대성당은 영국 현대건축의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코번트리 성당을 지으면서 배질 스펜스경이 가장 주력한 것은 건물 자체의 설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걸출한 예술가들에게 새로 짓는 성당에 설치할 작품들을 일일이 부탁해 성당에 볼거리르 더했습니다.



 

벽에 붙어있는 저 조각은 역시 ‘경’ 칭호를 받은 제이콥 엡스테인의 작품 <사탄을 물리치는 성 미카엘>입니다.




성당 내부의 멋진 스테인드 글라스도 빼놓을 수 없는 이 성당의 간판 스타입니다. 파이퍼란 작가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실내 한 벽 전체를 채우고 있는 이 태피스트리도 그레이엄 서덜랜드의 작품입니다. 이 아름다운 장식들은 성당의 가치를 더욱 빛내주고 있습니다.


코번트리 대성당은 전쟁의 흔적을 건축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건축을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아픈 상처를 그대로 남기면서 전쟁과 전후, 전통과 현재, 고딕과 모더니즘이 하나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전쟁과 건축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파괴는 가슴 아프지만, 그 역시 건축의 일부가 될 수있음을 코번트리 대성당은 훌륭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괴는 건축의 적이나, 건축은 파괴조차 품을 수 있습니다. 저 성당처럼 말입니다. 


베를린을 대표하는 폐허 교회, 시민참여로 살아남다


그러면 코번트리 대성당에 폭탄을 퍼부어 망가뜨린 독일은 어땠을까요? 

독일도 연합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건축물들이 파괴됐습니다. 베를린의 주요 건물이었던 1895년 지어져 베를린의 랜드마크였던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가 1943년 코번트리 못잖게 박살이 납니다. 원래 빌헬름 황제 기념교회는 이랬습니다. 



 

높이가 100미터 넘는 탑이 웅장합니다. 그런데 전쟁 탓에 이모양이 되고 맙니다.




처참하지요? 하필 주탑 윗부분이 뎅겅 날아가 더욱 흉물스럽습니다. 그리고 저 뒤에도 좀더 박살난 모양입니다. 가장자리 탑들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후 저 건물의 별명은 ‘속 빈 이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2차대전의 상징, 베를린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59년 왕십리, 는 아니고 59년 베를린 모습입니다.




주변에 다른 건물들은 열심히 지어지고 있는데 빌헬름 황제 교회만 외롭게 남아있습니다. 베를린시는 결국 저 교회를 새로 짓기로 합니다.


앞서 영국은 모더니즘 양식을 잘 보여주면서도 폐허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성당을 지은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면 독일 사람들은 어떤 건축을 시도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단 없애버리는 것도 중요한 방법 중 하나겠지요. 베를린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왜 부수냐, 저런 건물도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자 우리의 소중한 공유물이다,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서명운동이 일어나 수만명이 참여했습니다. 베를린시, 제대로 한방 먹습니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베를린 최고의 건축가로 꼽혔던 에곤 아이어만이었습니다. 건물을 철거하자고 했다가 그 역시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저 흉칙하지만 시민들이 남기기로 한 성당에 어떤 건물을 지어야 어울릴까, 그는 고민에 빠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 교회를 지었습니다. 1957년 시작한 프로젝트가 1963년 완성됩니다. 코벤트리 성당 완공보다 꼭 1년 뒤입니다.

 



아이어만의 선택은 폐허가 된 기존 교회와 가장 거리가 먼 모양의 새로운 건물을 바로 옆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순수함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의 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개의 건물을 양 옆에 세웠습니다. 사진속 왼쪽에는 육각형 탑을, 오른쪽에는 팔각형 교회 본당, 그리고 뒷쪽에 세례당을 돌아가며 지었습니다. 똑같은 각도에서 밤에 본 모습입니다.




아이어만이 지은 새 교회는 철근 건물에 유리 벽돌을 끼워 전혀 다른 질감, 전혀 다른 모양새로 폐허 옛 교회와 기묘한 짝패를 이룹니다. 코번트리 대성당이 폐허와 새 건물이 엇비슷하게 공존한다면, 이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는 너무나 상반된 두 건물이 서로의 특징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듭니다. 강력한 대비만큼 인상이 대단합니다. 한번 보면 잊지 못할 강한 기억을 남겨줍니다. 

이 강한 대비가 이 작품을 걸작으로, 또는 괴상망칙한 졸작으로 평가하게 만듭니다. 취향따라 평가는 다르겠지만 적어도 확실한 인상을 주는 점에선 누가 뭐래도 단연 탁월하다고 하겠습니다.

 

콘크리트는 창녀라고 말했던 건축가

 

에곤 아이어만은 자기 철학이 대단히 분명했던 양반이었습니다. 

그는 강철을 좋아하고 콘크리트를 싫어했습니다. 콘크리트는 죽처럼 미끈거리는 덩어리란 거죠. 실제 건축가들은 철과 콘크리트에 대해 상반된 선호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콘크리트를 좋아하는 건축가들은 건축가가 의도하는대로 모든 모양이 가능한 콘크리트의 특성을 좋아합니다. 


반면 강철 선호 건축가, 특히 아이어만 같은 이들은 원하는대로 모양을 바꾸는 콘크리트는 ‘시키는대로 하는 창녀같은 소재’ 라고까지 말하며 싫어하기도 합니다. 반면 가공과 변형이 쉽지 않은 철을 줏대있는 소재라며 예찬하지요. 


아이어만이 “콘크리트는 창녀”라고 했던 것은 콘크리트의 달인이었던 르 코르뷔제를 조롱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존심 센 분들은 서로를 싫어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법입니다.

 

좌우지간 현대건축 최고 스타 르 코르뷔제가 콘크리트 애호파의 대표라면, 아이어만은 강철 애호파의 대표라고 하겠습니다. 강철 구조로 만든 저 각형 건물들을 보면 그의 성향이 짐작되지요. 그렇지만 콘크리트를 전혀 쓰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어서, 저 유리판 구멍이 송송 뚫린 망판은 어쩔 수없이 콘크리트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건축가면서도 “건축이란 근본적으로 끔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이냐 싶은데, “신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뭐 그럴듯한 말이기는 하군요.

좌우지간 천상 디자이너였던 사람이어서 죽기 전에 자기 관도 미리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교회란 창문으로 빛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건축장르입니다. 저 건물의 내부를 보시죠.



 

이 건물은 저 강한 인상으로 순식간의 베를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일단 저 근처에 가면 저절로 눈에 확들어옵니다. 저렇게 독특한 건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유명해졌습니다만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지은 지 22년 지난 1984년부터 온갖 보수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그 꼼꼼하고 확실하기로 유명한 독일이라고 해서 건물 공사가 완벽하진 못한 모양입니다. 우리만 이 모양이 아닌 것 같아 오히려 웃게 되는 이야기 같군요. 보수는 계속 이어졌는데 90년대 중반에는 보수 비용 100만 마르크가 모자라 교회가 문을 닫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기부금이 들어와 위기를 넘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속은 썩였지만 어찌됐든 랜드마크는 분명합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이런 불꽃 축제도 이 교회에서 벌어지곤 하는 모양입니다. 




빌헬름 황제 기념교회는 엇비슷한 시기 등장한 코번트리 대성당과 함께 전쟁의 참화가 낳은 독특한 건축물들입니다. 두 건물 모두 같은 목적으로 같은 모더니즘 현대건축 새 건물을 지어 새롭게 재탄생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보셨듯 사뭇 다릅니다. 영국과 독일의 차이, 해석의 차이, 디자인의 차이 등 여러가지 흥미롭게 비교해볼 부분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더 옳고 좋고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 차이 이상으로 두 건물은 공통점도 많습니다. 건축의 세계란 참으로 다양하고, 또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들어가는 것을 이 두 건물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망가진 건물은 망가진 대로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너무 완벽하고 깔끔한 건물보다는 오히려 부서지고 황폐한 흔적이 더 묘한 힘을 갖습니다. 그런 폐허의 힘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현대건축의 아름다움을 시도한 것은 두 건물 모두의 매력입니다. 

 

파괴와 폐허 속에서 탄생한 두 유명 건축물은 있는 곳은 달라도 서로 통합니다. 그리고 실제 두 건물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도 있습니다. 빌헬름 황제 기념교회의 옛 건물에는 그리스도 상이 서 있습니다. 전쟁속에서 살아남은 이 그리스도상 오른쪽에 대못으로 장식한 십자가가 있는데, 이 십자가가 바로 영국 코번트리 성당에서 가져온 대못으로 설치한 것이라는군요. 

서로를 파괴한 독일과 영국의 악연을 우정으로 이으면서 두 성당은 전쟁의 끔찍함을 아름다움을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