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한국 건축 역사상 가장 논란이 된 건물은? 2008/05/07

딸기21 2018. 9. 3. 11:44

건국 이래 가장 큰 논쟁에 휩싸인 건물


한국 건축을 말할 때 정말 지겨울 정도로 거론 되는 이름이 1세대 양대 스타 건축가인 김수근과 김중업이다. 그 두 명 중에서도 더욱 유명한, 그러니까 한국 건축역사상 가장 유명한 건축가는 단연 김수근이다.


김수근(1931~1986)이 누군지 모를 수 있어도 대한민국 국민이면 김수근의 작품을 접하지 않기가 불가능하다. 건축 전문가들은 미학적 기준을 중시해 김수근의 대표작으로 서울 원서동의 공간사옥이나 경동교회 등을 꼽지만 김수근을 더 쉽게,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건물들은 굵직굵직한 대형 국가적 건물들이다. 위의 사진에서 김수근의 뒤에 있는 올림픽주경기장이라든지 종로의 세운상가, 대학로 문예회관, 서대문에 있는 경찰청, 서초동 법원청사, 그리고 남산 자유센터와 타워호텔 등이 모두 그가 남긴 작품들이다.


대한민국에서 초기 가장 유명한 건축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국가 주요 건축물을 참 많이도 맡아 설계했다. 그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것도 김수근이었다. 김수근으로선 그곳에서 박종철을 고문해 죽일 것을 알 도리가 없었겠지만, 그가 하도 많은 정부 건물을 설계했고 대공분실까지 그의 작품이다보니 김수근은 훗날 독재권력과 유착했던 것이 아니냐고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된다. 


이 김수근의 여러 대표작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해진’ 건물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건물이 스스로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유명해졌고, 지금은 정반대로 거의 완전히 잊혀진 건물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건물의 용도 역시 처음 지을 때의 목적과는 달리 다른 것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건축 역사상 가장 기구한 팔자의 건물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 건물이다.




저 건물은 지금은 국립문화재연구소 건물로 쓰이는 옛 부여박물관 건물이다. 어느새 40년이 넘은 건물이다. 김수근이 저 건물을 지은 것은 1967년, 그의 나이 불과 서른일곱살 때다.  30대 혈기 넘칠 나이에 추구할 법한 디자인 티가 확실히 나는데, 지금 봐도 뭔가 독특하고 다른 느낌을 확실하게 주는 건물임은 분명하다.


보는 김에 좀 더 건물 이모저모를 들여다보자. 측면 입구부분이다.




이번엔 정문쪽 모습. 강한 조형성에 비해 입구는 작고 좁은 편이다.




이 건물 디자인의 핵심은 사람 ‘人’자 모양으로 만나는 지붕 선이 만들어내는 모양이다. 보면 알겠지만 이 건물은 실은 2층짜리 낮은 건물이다. 내부도 넓지 않고 좁다. 그럼에도 웅장하고 커보인다. 강한 지붕 디자인이 웅장함을 강조하는 덕분이다.


1960년대 후반, 이 건물은 건립 과정에서 대단한 사회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건축 역사상 이 건물처럼 시끄럽게 논쟁이 펼쳐진 건물도 없다고 한다. 건축계 원로들은 “건축에 대한 관심이 적은 한국에서 건축이 신문 톱기사로 올라간 예는 부여박물관과 독립기념관 밖에 없었다”고들 말한다.


독립기념관이 왜? 공사중 불이나서 지붕이 홀랑타는 바람에 부실공사로 톱뉴스가 됐다.


그러면 이 건물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논란이 된걸까.


바로 ‘왜색’ 논란이었다. 이 건물이 일본의 신사 건물을 연상시킨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일본 신사를 베낀 것 같다, 그런 이야기였다.


당시 이 건물의 디자인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2가지였다. 첫번째로 지붕 모양이 일본 신사의 ‘지기’(千木)을 닮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기’는 일본 신사(신궁 등) 건물의 천장에 X자로 나무가 교차하는 부분이다. 한국이나 중국 건축물과 달리 일본 전통건축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생겼다. 




지붕 가장 자리 기둥이 더 길게 튀어나와 교차하기도 하고, 따로 장식으로 만들어 얹기도 한다. 저 지기란 장식이 일본 신사건물을 다른 건물들과 구별짓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 다시 부여박물관(현 문화재연구소) 건물을 보자. 지붕 모서리 장식부가 일본식 ‘지기’를 닮았다는 것이 당시 미학적 논쟁의 핵심이었다.




비슷한가? 지나친 비난인가? 닮았다고 해도 그 이유만으로 그렇게 비난 받아야 하는 걸까? 다른 문제도 아니고 왜색 논란이면 훨씬 더 혹독하게 비판받아야 마땅한 걸까?


각자의 관점과 가치관에 따라 서로 다른 해답이 나오겠지만 일단 다시 넘어가자.


두번째 문제가 된 것은 건물 입구 문 모양이었다. 역시 일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리이’(鳥居)를 닮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도리이는 일본에만 있는 상징물이다.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표지다. ‘하늘 천’자 모양을 땃다고도 하고, 그 유래에 대해서는 고대 인도의 트라나의 영향이란 설부터 한국의 솟대에서 영향받았다는 설까지 다양한 설들이 있다. 좌우지간 이게 있으면 신성한 곳이로구나, 생각하면 된다. 일본 어디를 가나 이 도리이를 쉽게 볼 수 있다.




왼쪽 위에 있는 수상 도리이가 가장 유명한 미야지마 도리이다. 일본의 대표하는 이미지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도리이다.  그 옆 오른쪽 위 사진은 일본 최대의 도리이라는 도쿄 메이지신궁의 도리이다.


아래 사진속 박물관 정문 입구 위에 올린 장식이 일본의 도리이와 비슷하다는 것이 논쟁거리였다. 일단 문 먼저 보시라.




뭐가 도리이랑 비슷하냐고?


저 사진으로만 봐선 그러실만한데, 논란이 된 뒤에 위로 등나무 등 올리는 장식을 달아 문을 가려놓아서 잘 안보인다. 덩쿨 지지대로 가린 부분을 선으로 표시하면 이렇다.




어떤가. 비슷한지 아닌지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바로 이 두 가지 디자인 때문에 부여박물관은 일대 논쟁에 휩싸였다. 한국을 대표할 박물관 건물이 불과 20여년 전까지 한국을 지배했던 일본의 건물을 본떴다는 논란이 나왔으니 얼마나 문제가 되었겠는가. 요즘 지었다고 해도 논쟁이 될만한 일이다.


김수근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왔기에 더욱 사람들은 ‘심증’을 굳혀갔고, 논쟁은 점점 커졌다. 박물관을 없애야 한다는 강경한 의견까지 대두되고, 조사위원회까지 꾸려졌다.


결론은 과도하게 일본느낌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맺어졌다. 결론이야 어쨋든 건축물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논란을 일으킨 최초의 사례였다.


이 유명하고 말도 많았던 건물을 얼마 전 직접 가서 보았다. 부여에서도 약간 변두리여서 입구를 들어갈 때는 정말 이곳에 이 건물이 있을까 의심이 절로 들 정도였다. 


연구소로 들어가서야 드디어 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말로만 들었던 그 건물을 직접 마주하자 감정이 묘했다. 그 때 그렇게 시끄러웠지만 지금 건물은 그야말로 조용히 연구소 건물로서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 어느새 40년전의 그 논란도 거의 잊혀진 상태여서 지금 이 건물을 보는 이들은 이 건물이 그렇게 유명한 과거가 있는지 짐작도 못할 듯했다.


내 눈으로 확인한 옛 박물관은 분명 디자인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왜색 디자인에 대한 느낌도 확실했다. 내 멋대로 추측하기에는 강한 상관관계가 있는게 분명해보였다.


훗날 김수근은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이나 프랑스에 유학한 건축가들이 돌아와 서양 건축물을 디자인 모티브로 삼거나 오마주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되고, 내가 일본 건축의 영향을 받은 것만 문제가 되느냐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불과 20년 밖에 지나지 않은 광복의 슬픈 역사를 생각하면, 저 신사를 연상시키는 건물을 보면서 사람들이 느낄 수 밖에 없었던 심정을 생각하면, 분명 김수근의 디자인 선택은 비판받을 법 했다고 생각한다.


김수근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었지만 건물은 훗날 김수근 건축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저 건물로 겪은 아픔을 딛고 그는 더욱 건축에 정진했다. 쏟아지는 비판으로 충격을 받은 김수근은 이후 우리 전통 건축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고, 70년대 들어서는 한층 새로워지고 진일보한 건축세계를 선보인다. 


그의 초기 60년대 작품들인 남산 자유센터와 경향신문사 건물, 타워호텔 등을 보면 콘크리트란 소재와 강한 조형성을 강조하는 매력과 동시에 지나치게 모양에 집착하는 젊은 건축가로서의 한계도 분명히 보여줬다.


반면 7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은 작아졌어도 훨씬 빼어나고 차분해졌다. 영원한 대표작이 될 서울 원서동 공간사옥을 비롯해 마산성당, 문예회관을 설계하며 그의 건축은 만개했다. 


그런 점에서 저 부여박물관 논란은 국민들에겐 상처와 짜증을 주었지만 김수근 개인에겐 예술가로서 밑거름이 된 난관이었다고 하겠다. 위기와 아픔을 쓴 보약 삼아 자신을 키워냈다는 점에서 김수근은 분명 대단한 작가다.


최근 들어 김수근이 설계한 주요 건물이 하나 둘씩 사라져간다는 소식이 <한겨레>에 실렸다.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건물 자체의 수명이 다한 경우도 있겠지만, 늘 새 건물로 다시 짓는 우리 풍토 탓이 아무래도 크리라. 


기사를 읽으며 김수근에 대해, 그리고 건축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한국 건축이 많이 발전했고, 우수한 건축가도 많이 늘었다고 하지만 건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아직도 적다. 오히려 예전보다 덜할지도 모른다.


80, 90년대까지만 해도 김수근이나 김중업이란 이름은 일반 시민들에게도 제법 유명한 이름이었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우리 건축가 이름을 한 두명이라도 대보라고 했을 때 쉽게 대답할만한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시민들의 탓은 물론 아니다. 그래서 더 아쉽다. 건축이 오히려 더 건설, 부동산, 재테크의 관점에 종속되어가는 사회적 분위기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동시에 정말 우리가 자랑할만한 건축가들이 더욱 많이 나오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이제 분명 시대는 바뀌었다. 김수근이 활동했던 시대에는 김수근도, 시대도 한계가 분명했다. 건축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지금, 김수근의 장점만을 계승하며 김수근처럼 대중들을 사로잡는 건축가들이 속속 늘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의 홍살문, 일본의 도리이, 그리고 중국의 화표


일본의 도리이는 신성한 곳을 알리는 기능과 생김새가 모두 한국의 홍살문과 닮았다. 그러면 중국에는 어떤 것이 한국의 홍살, 일본의 도리이와 비슷한 기능을 할까?


전주 경기전의 홍살문. 홍살문은 신성한 곳이 시작됨을 알린다.



바로 ‘화표’(華表)라는 것이다. 주로 묘 앞에 많이 설치된다. 아래는  베이징 천안문 앞에 있는 화표다. 중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화표는 그 기능은 비슷하지만 생김새는 한국의 홍살과 일본 도리이와 확연히 다르다.


중국과 일본에 갈 때 화표나 도리이처럼 우리나라와 같으면서도 다른 부분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건축과 문화를 즐기는 또다른 재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