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지고 놀기

책의 세계4-자서전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 2007/10/30

딸기21 2018. 6. 22. 10:40

자서전처럼 분명한 자기 자리와 형식을 가지고 있는 글 양식도 드물다. 개인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하고, 과오와 고생 그리고 성공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자서전은 서양의 경우 고대 로마 때부터 <고백록> <참회록>이라는 양식으로 발표되며 문학장르의 하나로 구축되어 이어져왔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자서전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산문이 부진한 국내 출판시장에서도 자서전은 가장 ‘장사 안 되는’ 아이템으로 손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흐름 속에서도 어느 시대나 자서전은 꾸준히 발표되고 또 독자들의 호응을 얻는 자서전들도 계속 이어져왔다. 그리고 베스트셀러가 된 자서전들은 모두 당대의 사회상과 동시대인들의 욕망을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이 강해지면서 우리나라에서 자서전은 어떤 책이 성공하면 곧바로 아류 자서전들이 유행처럼 이어지는 현상을 만들며 사회적 유행에 가장 민감한 출판물로 꼽히기도 한다.

기업 총수들의 자서전엔 월급쟁이의 꿈이…

본격적으로 자서전이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것은 80년대 들어서다. 84년 번역된 리 아이아코카 크라이슬러 회장의 자서전은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둔 뒤 국내에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자서전을 필두로 그뒤 한동안 국내 출판시장에서 히트한 자서전들은 너나없이 대부분 경제인들의 자서전이었다. 고도성장기 누구나 경제분야의 승자를 꿈꾸던 시절 샐러리맨들에게 맨주먹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경영자의 성공담은 ‘나도 언젠가는’이라는 꿈을 대리만족시켜주는 판타지소설과도 같았다.

정주영 회장 자서전 출판 기념회 모습

이런 경향은 이어 국내 기업가들이 잇따라 자서전을 내는 90년대 초반에 절정에 달했다. 89∼90년 모두 150만부 이상 팔리며 두해 연속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위의 기록을 세운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국내 자서전 시장계의 새로운 판도를 연 책이다. 인기를 넘어 당시 신드롬이 됐던 이 책을 전면 비판한 박노해씨의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까지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기도 했다.

<세상은…>에 이어 국내 대표적 재벌기업 총수들과 경제인들의 자서전이 봇물처럼 이어져 나왔다. 그해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구자경 LG그룹 회장도 <오직 이 길밖에 없다>등, 당시 30대 그룹 총수 가운데 자서전을 내지 않은 사람이 한명도 없을 정도였다.

당시 줄줄이 나왔던 이들 기업인들의 자서전은 무엇보다도 드라마틱한 일생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궤적을 보여줘 많은 직장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저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기업에서 경쟁적으로 책을 사들여 ‘조작된’ 베스트셀러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경제인들의 자서전 출간은 급속한 하강곡선을 그었다. 90년대 초 최고에 달했던 경제거품이 빠지면서 성공신화의 허구성이 베일을 벗게 된 것이다.

90년대 들어 경제인들이 빠진 자리는 여성들의 성공담으로 메워졌다. 91년 닥종이 인형작가 김영희씨의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는 그 신호탄이 된 작품이다. 출판시장의 주소비자들인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인들이 동경하고 관심가질 만한 독특한 이력의 여성의 일생을 그린 자전소설들이 자서전의 주류로 등장한 것이다. 90년대 중반 베스트셀러가 된 현대무용가 홍신자씨의 <자유를 위한 변명>도 이런 흐름을 반영하는 책이다.

이런 경향은 90년대 중반 이후 더욱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스물세살에 마흔아홉살 미국인 신부와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 비즈니스계에 진출한 조안리씨의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이나 이정순씨의 <강한 여자는 수채화처럼 산다>, 전여옥씨의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되라> 등 여성으로서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남성들 못지않은 성공의 길을 걸은 중년 여성들의 자서전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즈음 교보문고의 한 서가 전체가 미소짓는 여성의 얼굴표지로 가득 차기도 했다.

단순 역경극복기보다는 처세술적 에세이 강세

당시 유행한 성공한 여성의 자전적 에세이는 여성의 사회진출 일반화와 흐름을 같이한다. 이런 작품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뒤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의 사회적 성공에 대한 야심과 신분상승의 욕구가 투사돼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미화와 합리화, 그리고 한철 장사를 노린 상업주의적 기획의 산물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자서전 시장의 주류를 이루는 ‘여성 자서전’의 흐름을 형성하게 됐다. 당시 프랑스 망명객 홍세화씨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남성 필자가 쓰는 자서전으로는 이례적으로, 독특한 지은이의 이력과 다소 진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런 여성의 자서전은 이후 변형된 양상을 낳기도 했다. 젊은 여성들에게 역할 모델이 되는 스타 여성들의 자서전이 처세 매뉴얼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상이다. 역경 극복기에 식상한 여성들에게 아나운서 등 전문직 여성들의 자전에세이들이 이런 코드로 먹혀들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 이후 자서전 시장의 또다른 새 경향은 대중스타들의 저서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98년, 뒤늦게 인기를 얻은 만년 조연 탤런트 전원주씨의 <영원한 이등 인생은 없다>, 역시 중견탤런트인 박원숙씨의 <열흘 운 년이 보름은 못 울어> 등이 화제가 되면서 한동안 중년 여성연기자들의 자서전이 쏟아졌다. H.O.T, 유승준, 핑클 등도 갓 성인이 된 나이에 앞다투어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런 대중스타들의 자서전은 물론 세계적 추세이긴 하지만 유난히 한철 장사에 매달리고, 또 책의 내용이 아니라 표지로 팔기 위해 출판업계가 만들어낸 지나친 장삿속이라는 비판도 혹독하게 일었다. 10대 스타들의 자서전은 오로지 10대 팬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책으로 멤버들의 학교생활과 어린 시절 사진 등 신변잡기로만 채워졌지만 10대 열성팬들의 인기에 힘입어 톡톡히 수지맞는 장사로 끝났다.

2000년대 이후에는 또다른 변화가 일었다. 그 하나는 장애나 좌절을 이겨낸 과정을 보여주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다. 사지없는 장애인으로 태어나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한 일본인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오체불만족>이나 어릴 적 이지메를 견디지 못하고 탈선하기 시작해 야쿠자의 아내로 10대에 아이까지 낳았다가 변호사가 된 오히라 미쓰요의 자서전인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그리고 반신불수에 걸렸지만 끊임없는 재활노력으로 삶의 꿈을 접지 않는 영화 <슈퍼맨>의 주연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절망을 이겨낸 슈퍼맨의 고백> 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주목할 점은 세권 모두 번역서라는 것이다. ‘역경’이라는 단어는 국내 자서전에도 많이 등장했지만 앞의 세작품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들의 역경은 성공 드라마를 좀더 극적으로 만드는 데 이용된 소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자서전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장애나 좌절을 가감없이 보여주면서 경쟁자가 아닌 자신과 싸우는 모습을 진솔하게 써내려가 성공담에 신물이 난 독자들에게 어필을 한 것이다.

세속적 성공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자서전으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스콧니어링 자서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한기호 소장은 국내 자서전 문화의 질이 여전히 바닥수준에 가까운 이유를 “기록문화의 부재 때문”이라고 본다. “일제의 지배, 군사정권을 거치며 감시 속에 살아오면서 흔적을 남기는 것을 꺼려하는 풍토가 자서전의 발전을 가로막았다”고 분석한다. 한씨는 “당대의 생생한 기록에 기반한 정리가 아니라 급하게 과거를 재창조하는 자서전에서 진실한 내면의 고백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라고 덧붙인다.

진실한 고백을 기대하기 어려울지라도…

이런 흐름속에서 자서전 시장에서 주목할만한 변화였던 것이 <스콧 니어링 자서전>이 호응을 얻어낸 점이다.

세속의 모든 명예와 부를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 최소한의 노동으로 자급자족하며 여생을 보낸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은 국내 인기 자서전에서 늘 중심에 있어왔던 세속적 의미의 성공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최초의 베스트셀러다.

스콧 니어링 자서전의 선전은 IMF 이후 산산조각난 성공신화들이 생존과 경쟁,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에 제동을 걸면서 새로운 좌표를 찾는 사람들에게 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 다가간 것으로 풀이된다.

국민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한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우리 독서계에서 자서전의 흐름은 분명 당대 사람들의 관심사와 욕망을 대신 보여준다. 우리 사회의 변화가 빨랐듯 인기 자서전의 부침은 더욱 순간적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을 초월해 늘 사람들의 사표가 되는 장수 자서전도 있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다.

한 개인의 자서전에서 이제 온 국민의 필독서가 된 이 자서전은 1947년 출간된 뒤 여러 출판사에서 20여종이 출간돼 반세기 넘게 꾸준히 팔리며 세태를 뛰어넘는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