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지고 놀기

책의 세계2-명예로 승부하는 책들 2007/10/15

딸기21 2018. 6. 19. 19:41

출판사 학고재가 출판사 등록을 마친 지 얼마 안 된 신생출판사 시절이던 지난 91년 어느 날 밤, 우찬규 사장은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동석했던 한 미술평론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연신 술잔을 기울이던 그 미술평론가는 우리나라 문화재 연구계의 태두 혜곡 최순우 선생의 전집이 상업성 때문에 출판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을 계속 토해냈다. 출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팔릴 책은 아니었고, 본전조차 건지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미술과 우리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꼭 필요한 책이라는 점만은 분명했다. 밤새 고민한 끝에 우 사장은 일을 저질러보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이듬해 다섯권짜리 <최순우 전집>은 세상에 선보였다.


창비의 자존심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책이 나온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최순우 전집>은 판매량은 아직 미미하다. 반면 초기 투자비용은 당시 1억원이나 들어갔다. 그렇지만 우 사장은 상업적 측면으로 보면 처절하게 실패한 이 전집을 출판사 학고재를 대표하는 책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익성보다는 꼭 필요한 책이라는 소신에서 찍은 책이었고, 그래서 이 책은 출판사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대변해주면서 독자들에게 학고재의 이미지를 심어준 초석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학고재는 이제 적어도 미술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미술·문화재 전문출판사로 확실한 자리를 굳혔다.



세상의 모든 산업은 이윤을 목적으로 한다. 기회비용 이상의 이윤을 낼 가능성이 불투명한 상품을 시장에 내놓는 사업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윤을 낼 가능성이 희박해도 제품을 생산하는 업종이 있다. 바로 ‘출판’이다. 상품인 ‘책’이 한정된 소비자들에게 꼭 필요하고, 또 그 책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만드는 이에게 보람을 주기 때문이다. 경제적 관점으로 본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어도 물질적 이익 못잖게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적인 측면이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산업이 바로 출판인 것이다.


물론 어느 출판사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법인이기 때문에 장사가 되는 책을 찍어내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출판하는 그 자체가 가치를 지니는 책’들을 함께 발간한다. 그리고 이런 책들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완성도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독자들보다는 같은 출판업종 종사자들 사이에서 더욱 인정받는 책들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완성도가 높아 책을 필요로 하는 독자들로부터도 당연히 좋은 평가를 얻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출판사의 자부심과 이미지는 바로 이런 책들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책들이 출판업계의 ‘선수끼리’ 알아주는 책일까. 출판사들이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담아낸 책으로 직접 꼽는 책들은 어떤 것들일까.


창작과비평사(창비)가 펴낸 E. P.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준비과정부터 출판계의 화제가 됐던 책이다. 창비에 들르는 다른 출판사 직원들이 “도대체 그 책은 언제 나오냐”고 물어보곤 했을 정도로 이 책은 오랜 준비를 거친 뒤에야 출판됐다. 서양사 전공학자 6명이 무려 10년에 걸쳐 번역작업을 벌였다. 그래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비록 많이 팔리진 않아도 뛰어난 외국 저작물의 우리말 본들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출판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출판사의 ‘품위’를 만드는 전집류


특히 이런 학술적 번역물들은 다른 책들에 비해 훨씬 많은 수고와 준비기간을 필요로 한다. 번역에도 전문가가 필요하고, 자료부분이 많아 일반 책보다 몇 차례씩 더 교열을 봐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중요한 외국의 학문적 성과를 ‘국내 최초’로 들여오거나 그동안 제대로된 학술서가 없던 분야에 처음으로 주요한 저작을 출판하는 일은 출판인들에게는 가장 보람과 매력이 큰 도전대상이다. 다른 수준작들에 비해 팔릴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도 전문가집단으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책들은 대부분 이런 책들이다.


생태분야를 사상적 측면에서 거의 처음 다룬 <한국의 생태사상>(돌베개)이나 민속문화에 대한 대중서의 선구자인 대원사의 <빛깔이 있는 책들>, 도서출판 까치가 펴낸 프랑스 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등은 대부분 판매실적은 저조해도 출판계에서는 매우 높이 쳐주는 책들이다.



부부가 운영하는 단출한 소규모 출판사인 이산은 이처럼 경제적으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책 자체의 가치가 높은 책만 고집하는 회사로 유명하다. 회사 이름부터 중국 고전 <열자>에 나오는 산을 옮기는 어리석은 사람의 고사 ‘우공이산’에서 따왔다. 중국과 일본 전문출판사인 이산은 이런 고집 덕분에 언론사 출판담당 기자들로부터 “이산 책은 믿을 만하다”는 지지를 받고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 펴낸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와 <도쿄이야기>, <현대 중국을 찾아서> <천안문>등이 모두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어도 언론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들었다. 출판업계서도 단기간에 가장 확실하게 자기 색깔과 위상을 구축한 출판사로 꼽힌다.


단행본에 비해 규모가 훨씬 방대한 전집과 대형기획물 시리즈는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출판사들로서는 더욱 쉽게 달려들지 못하는 분야다. 그러나 그만큼 전집과 시리즈는 출판인과 편집인들이 더욱 도전해보고 싶어하고, 책을 읽는 전공자들이나 마니아들로부터 더 인정받기 때문에 그 문화적 의미가 크다. 전집 분야에서는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집 23권을 비롯해 마야코프스키와 푸시킨 전집 등을 계속 펴내온 열린책들이 대표적인 출판사로 이름이 나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내기 위해 출판사를 차렸다는 홍지웅 사장의 집념이 얻어낸 결과이다. 책세상이 올해 시작한 니체와 릴케 전집도 출판사의 고집과 의지가 만들어낸 화제작이란 점에서 아무 출판사나 하지 못하는 기획이란 자부심을 채워주고 있다.


인문학 시리즈로 정평이 나있는 한길사는 양서 시리즈물에 관한 한 단연 확고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특히 외국 고전물들을 소개하는 ‘그레이트북스’ 시리즈는 출판계와 전문가들 모두가 인정하는 기획물이다. <우파니샤드>, <슬픈 열대> 등 가장 인기좋은 책들도 1만부 넘기기가 힘들지만 한길사가 이 시리즈에 거는 자부심과 애정은 다른 어떤 책보다도 우선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대하소설 <혼불>이란 스테디셀러로 내는 수익의 대부분을 한길사는 이 시리즈에 쏟아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길사, 창작과비평사, 문학과지성사 등이 매출액이나 베스트셀러 소유 숫자면에서는 대형 출판사들보다 훨씬 뒤쳐지면서도 우리 출판계를 대표하는 출판사로 첫손꼽히는 것은 이처럼 출판사 전체의 품위와 색깔을 빛내주는 책들을 과감하게 출판하는 저력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필자 관리와 이미지 상승의 효과도


종합출판사가 아닌 특정분야에 집중하는 전문출판사들 사이에서는 이처럼 돈은 안 되도 ‘꼭 필요한 책’들을 내는 경우가 더 많다.


미술서적과 우리 문화 기록물로 이름난 열화당의 이기웅 사장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지난 85년 출간한 <경주남산>이다. 15년 동안 겨우 2천여부만이 팔렸을 만큼 그야말로 소수의 독자들에게만 관심을 끌었지만, 5년 넘는 준비기간을 뒀을 정도로 열정을 기울였던 책이다.


사회과학 전문출판사로 유명한 두레의 신홍범 사장도 소중한 책으로 손해를 각오하고 출판한 <다석 유영모 명상록>을 꼽는다. 함석헌 등 걸출한 사상가를 길러낸 인물이었지만 전혀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못했던 다석 유영모의 사상세계를 다룬 이 책은 판매부수는 적어도 “두레만이 낼 수 있는 책”이란 말을 들었을 만큼 주목받았다.


이처럼 책이 동시대의 지적 성과를 골라내 후대에 전달하는 기록자의 역할을 할 때 출판인들은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더군다나 좋은 책이라고 믿고 밀어붙여 펴낸 책이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을 때의 희열은 출판종사자가 아니면 모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돈벌 생각보다는 좋은 책이란 판단에 낸 ‘소신출판’ 책이 대박을 기록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기본적으로 책의 내용이 좋으면 독자들도 알아보기 때문이다.


푸른숲 출판사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과 <시간박물관> 두책은 예상치 못한 대표적 베스트셀러들이다. 직접 책을 기획한 편집부에서조차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책이었지만 초판을 겨우 1천부 찍었던 <괴테의…>가 무려 10만부 가까이 팔렸고, 권당 4만9천원의 고가인 <시간의 박물관>도 출간 직후에 수천부가 팔렸다.


실천문학사의 <스콧 니어링 자서전>과 <체 게바라 평전>도 큰 기대를 안했던 베스트셀러다. 농민운동가 천규석씨의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역시 상당히 팔리며 ‘소신 출판’의 보답을 받았다.


현암사가 가장 내세우는 시리즈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우리 문화 100가지> 시리즈의 경우 첫 번째로 나온 우리꽃 책이 수십만부 팔려준 덕분에 이 시리즈를 유지하는 원동력 노릇을 얻은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출판사들이 이런 책을 낼 때 처음부터 손해를 각오하고 찍는다고 볼 수만은 없다. 예상 독자가 적으면 손익분기점을 낮춰 적게 찍어내는 방식으로 손실 가능성을 줄이기도 하고, 실제 손해가 나더라도 우수한 필자를 확보하는 측면에서 차기작에서 더 큰 성공을 기대하고 책을 내는 경우도 많다. 이름난 필자들의 경우 출판사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공들이는 책을 내는 것이 출판사 이미지를 높여주고 신뢰감을 강화해주는 등 무형의 부수효과가 크기 때문에 경제적 손해를 상쇄한다고 보는 경우도 많다.


팍팍한 시류에도 누군가 해야할 일


그나마 요즘에는 이런 시도가 한층 힘들어지고 있다. 살기가 더욱 팍팍해지는 세태와 순수한 것에 무관심해지는 유행의 흐름 때문이다. 한 인문학 서적 편집자의 개탄은 이런 현실을 대변한다. “우리 지성사회를 이끌어간다는 교수들의 연구실을 한번 살펴보라. 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산 책을 빼고 그뒤 사서 읽어 늘어난 장서가 얼마나 되는지. 좋은 책을 내면 사서 보려하지는 않고 기증받을 수 없냐고 전화하는 교수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는 책으로 출판할 좋은 성과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출판이 다른 산업과는 달리 인간적이고 공익적인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는 본령을 믿고 실천하는 출판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다. “누군가는 내야 되는 책”이란 명제를 따라 아직도 많은 출판인과 편집인들은 대중성에 구애받지 않고 출판 가치만을 보고 책을 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책의 가치를 알아줄 독자들을 기다린다. 소리쳐 부르지는 않지만, 좋은 책의 은은한 향기를 알아채고 찾아올 독자들이 아직은 많다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