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친해지기

전시장이 이래도 되나요?-황당해서 재미있는 전시회 2010/01/20

딸기21 2023. 6. 22. 16:55

 

틀림없이 전시 안내 글이 붙어 있습니다. 서울 홍대앞 복합문화공간 상상마당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입니다.


카운터에는 안내 담당자도 앉아 있고..., 그런데 안에는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전시장에 전시하는 것이 없어 순간 당황하게 되는데, 자세히 보면 전시장 안으로 빨간 줄들이 쳐져있습니다.


그것 뿐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저 빨간 줄들은 스피커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뭘까요?
 


스피커에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소리들이 나옵니다. 휘잉거리는 차가운 겨울 바람 소리, 가끔 새 우는 소리,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의 잡담...
 
이 전시회는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소리'를 전시하는 전시회입니다. 이른바 `사운드 아트'입니다.
올해로 3회를 맞아 착착 연륜을 쌓아가고 있는 서울국제사운드아트페스티벌이 `서울의 소리'를 주제로 마련한 전시입니다.
이 전시는 홍대앞 갤러리상상마당, 그리고 이태원의 `공간 해밀톤' 두 곳에서 열립니다.
 
이곳 갤러리상상마당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호주 사운드 아티스트 제프 로빈슨의 작품 <한국, 서울, 삼청공원, 전망대와 서울 성곽의 접점>이란 작품입니다.


서울의 소리를 주제로 작가는 삼청공원이란 공간을 골랐습니다. 도심과 자연이 만나는 공간이란 점에 흥미를 느껴 보름 동안 공원 다섯 곳에 녹음기를 달아 소리를 채집했습니다. 그 다섯곳의 거리, 그리고 녹음기를 달았던 높이를 비율 그대로 축소해 전시장에 재현한 것이 저 작품입니다. 자세히 보면 스피커마다 높이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리고 스피커를 잇는 빨간 선들은 그 사이의 거리를 보여줍니다. 외부 공간을 그대로 내부에 들여온 것입니다.
 
전시 모습이 이렇다보니 웃지 못할 일도 종종 벌어집니다. 전시중이 아니라 공사중인 것으로 오해해 발길을 돌리는 이들이 속속 생기고 있습니다. 전시장에 와서는 어떻게 전시를 감상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합니다. 저 역시 처음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들어보니 이 전시는 다른 미술 전시보다도 훨씬 이해하기도 쉽고 즐기기도 편했습니다. 우리가 친숙한 주변 소리를 이런 공간에서 다시 듣는 것은 참 새로웠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늘 무의식적으로 들어왔던 것들을 의식적으로 듣는 것은 참 새롭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또 다른 전시장 `공간 해밀톤'은 상상마당 전시장보다 더 황당하고 더 재미있습니다. 일단 이 공간 해밀톤이 있는 입지부터 전시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서울 이태원 폴크스바겐 전시장 뒷 골목으로 언덕쪽으로 주택가를 가다보면 이런 곳이 나타납니다.
 

  
간판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이 공간을 드러내주는 표식입니다.
 


저 오른쪽 셔터가 입구입니다. 그냥 창고인줄 알고 지나칠뻔 했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작품 속으로 바로 진입하게 됩니다.
작가는 다양한 활동으로 미술계에서 유명한 양아치, 작품 이름은 <달콤하고 신 매실이 능히 갈증을 해결해줄 것이다>입니다. 작품 제목 참 독특한데, 작품은 더 독특합니다.
 

  
저 작품은 세가지 소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암동 소리, 그리고 협업한 노이즈 뮤지션 유한길씨의 노이즈 뮤직, 마지막 하나는 머리를 빗어 넘기는 소리입니다.
 


이 줄지어선 스피커와 그 앞에 맞춰 의자를 마련해 앉아서 잘 들어보라고 하는 소리는 부암동에서 채집한 소리입니다. 부암동은 작가가 사는 동네인데, 그 지형이 움푹해서 서울의 소리가 모이는 곳으로 작가는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스피커들이 아주 낡은 것이고, 어디서 본듯한 마크가 붙어 있습니다.
 


저 오래된 스피커들은 군 기무사에서 쓰던 것들입니다. 이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바뀌게 될 경복궁옆 기무사 건물에서 지난해 열린 전시회에 작가 양아치가 참석했다가 버리는 스피커들을 가져와 이 작업에 쓴 것입니다.
저 스피커들에게도 나름의 역사와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기무사내에서 했던 수많은 방송, 지시, 알림이 저 스피커로 기무사 사람들에게 전해졌겠죠. 작가 양아치는 그동안 디지털 시대 국가의 감시장치에 관심이 많았다는데, 이번 작업에서는 기무사 스피커가 묘하게 이어졌습니다.
 


앰프 위에 놓은 이 새는 또 뭘까요? 부암동 새소리를 채집했으니 새도 한마리 올려놨답니다.
 
그 옆에는 스피커로 만든 탑이 있습니다.
 

  
스피커 탑 위에는 복사용지상자며 버리는 듯한 종이들이 올려져 있습니다. 저 종이 쓰레기들은 이 전시장 주변에서 작가가 채집한 것이라고 합니다. 소리를 채집하듯 공간의 흔적들도 채집한다는 맥락이겠죠.
저 스피커에서는 노이즈 뮤직이 흘러나옵니다.
 


그 옆에는 스피커 우퍼 위에 쇳조각들을 올려 소리내는 진동에 따라 달그락 거리게 장치를 해놨습니다. 소리가 파동이란 것을 더욱 강조해서 눈으로 보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짜 이상한 전시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전시장 역시 내부를 뜯어내다 말아 전시장이 맞나 싶은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2층 전시장은 더욱 황당합니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어두운 계단에서는 귀신이 우는 듯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대만 작가 앨리스 후이성 창의 <세계는 뒤집힌 것 같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는 역시나 이상한 이름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일종의 즉흥 연주로, 작가가 스스로 개발한 독특한 발성법으로 `언어 이전의 목소리' `인간 목소리가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보여주는 소리'를 냅니다.
 
이 2층 계단을 올라가면 드디어 2층 전시장입니다. 정말 사운드 아트스러운 전시 모습이 펼쳐집니다.
 


정말 보이는 것이라곤 빗자루 하나가 전부입니다. 설치작가로 유명한 김승영씨와 사운드 디자이너 오윤석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의 공동 작업인 <쓸다>입니다.

 


작가는 서울의 소리란 어떻게 딱히 정의내리기 어려운 소리이며, 그 본질이란 `시끄러움'으로 봤습니다. 그 소리를 빗자루로 쓸어내는 소리로 모으고 밀어내는 행위 자체를 보여주고자 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저 빗자루로 김승영씨가 쓰는 소리를 오 교수가 녹음, 가공해 저 전시장에서 다시 틀어주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소리와 빗자루만 있는 완벽한 무의 공간 같지만 자세히 보면 약간의 공간 연출이 숨어 있습니다. 저 형광등도 일부러 색깔을 골라 교체한 것이고, 스피커도 하얗게 칠을해 눈에 안뜨이도록 숨겼습니다.
 


이번 사운드 아트전은 일단 값도 무료이고,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사운드 아트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전시입니다.
사운드 아트는 미술계에서 비주류인 미디어 아트 중에서도 비주류인, 그러니까 비주류 중의 비주류 예술입니다. 미디어 아트와 현대 음악 중간 쯤 되는 예술이라 하겠습니다.
소리를 녹음해 재생하므로 소리를 채집하고 가공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과정의 예술'이라고도 불립니다.
 
처음에는 난감하지만 전시장 자체가 워낙 독특해 볼 것이 없어도 보는 재미가 솔찮습니다. 작품 감상도 생각보다 쉽게 빠져듭니다. 소리를 계속 듣다보면 점점 더 다음 소리에 관심이 가서 쭉 듣게 됩니다. 별 생각없이 듣기만 해도 되니 감상법도 따로 없습니다.

전시기획자 양지윤 큐레이터는 "우리가 평소 주변 소리를 들을 때 별 생각없이 듣듯 들으면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전시를 본 다음에는 무심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던 우리 주변 소리들에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모처럼 전시장 가보고 싶은 분들, 새로운 전시를 보고 싶은 분들, 특별한 문화 체험을 원하는 분들께 권합니다.
공간 해밀톤에선 31일까지(월요일 쉼, 031-420-1863), 상상마당은 2월10일까지(2월1일 쉼, 02-330-6223)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