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친해지기

성폭행을 응징한 역대 최고의 복수는? 2008/07/09

딸기21 2018. 9. 10. 17:32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끔찍한 명화를 뽑는다면?

아마 이 그림이 1위가 되지 않을까. 사실감 넘치는 ‘살인의 순간’에 절로 오싹해진다.

 



한 여자는 침대 위에서 발버둥 치는 남자를 꼼짝 못하게 붙들고 있고, 또 한 여자는 남자 머리를 붙잡아 목을 쓱쓱 베고 있다. 칼이 이미 목의 절반을 지나 목이 몸통에서 분리되기 일보직전이다.

 

그림 속 여자를 보면 살인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작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목을 베는 여자는 칼질을 하면서 몸을 뒤로 빼고 있는데, 끔찍해서가 아니라 피 튀는게 싫어서인 것이 틀림없다. 팔 소매를 이미 걷어부친 것이 그런 사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듀엣으로 목을 따고 있다는 것이 이미 이 두 여자가 의도된 킬러임을 알려준다.

 

저 그림속 살인하는 여자 이름은 유디트다. 유디트에게 목이 잘리는 남자는 홀로페르네스.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에 쳐들어간 앗시리아의 장수였다. 유대 여자 유디트는 하녀와 함께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찾아가 이스라엘을 함락시킬 묘책을 들려주겠다며 유혹해 그를 헬렐레하게 만들고는 잠이 들자 목을 뎅강 잘랐다. 

당연히 그녀는 유대의 영웅이 됐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당당하게 이름이 올랐다. 성경 내용이므로 그림이 저리 끔찍해도 용서가 될 뿐만 아니라 높은 평가를 받고 지금까지 명화로 꼽히고 있다. 기술적 면에서도 생생한 장면을 연출해낸 작가의 공력이 대단한 그림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여성들에겐 지옥이 열린다. 병사들은 야수가 되고 여성들은 희생양이 된다. 어느 전쟁에서나 마찬가지다. 

고대 전쟁에서나 그랬다고? 유고 내전을 보라. 자기 민족의 씨를 늘리겠다고 다른 나라 여자들을 가둬놓고 집단 강간을 해댔다. 

전쟁 그 자체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등장한 이래 가장 이성화되고 계몽되었다는 현대인 20세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전쟁은 결코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닐 뿐만 아니라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니다. 한국은 전쟁의 관점에서 보면 휴전국가다.

 

좌우지간 이 지옥이 되는 전쟁기에는 가끔 여성 영웅이 등장한다. 중국에는 아예 전장에 나선 여자도 있었다. 화무란이란 중국 발음보다는 ‘뮬란’이란 영어식 발음으로 더 유명하지만. 그러나 이 뮬란이나 잔다르크같은 좀 지나치게 특별한 캐릭터들은 예외로 하자.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여성이 영웅이 되는 경우는 유디트처럼 성욕을 이용해 적장을 저격하는 팜므 파탈형들이다. 동서고금 여성이 영웅이 되는 공통적인 스토리라인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여성이 있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전쟁이 벌어졌으므로 당연히 이런 여성 영웅이 있었다. 그 이름은 계월향. 이름에서 이미 느낌이 전해졌겠지만 일반적인 여성이 아니라 기생이었다. 영웅이 된 기생. 그래서 ‘의기(義妓) 계월향’이다. 임진왜란이 낳은 거의 유일한 여성영웅이다. 

 

계월향은 평양 기생으로 평안도 병마절도사 김응서의 애첩이었다. 왜군이 쳐들어 오고 평양성은 함락된다. 계월향은 적장의 수청을 들어 잠을 재운 뒤 김응서가 적장의 목을 베게 하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여성이고, 또 기생이어서 이 이야기는 훗날 민중들에게 사랑받는 조선시대 인기 이야기 레퍼토리가 된다. 우리 고전 소설 <임진록>에 이 이야기에 민중 상상력이 더해져 아예 소설로 만들어져 실렸다. 대충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계월향이 평양성이 함락되자 연광정에서 왜장의 수청을 들면서 물긷는 노인에게 몰래 편지를 김응서 장군에게 전한다. 김응서는 변장해서 왜군 눈을 피해 연광정으로 들어가고, 계월향은 애교로 적장을 녹여 술을 퍼먹여 잠들게 한다. 김응서는 잠든 적장의 목을 베어 들고 계월향을 데리고 말을 타고 탈출한다.

그런데 성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말이 높이 뛰지 못해 위기에 빠진다. 계월향은 이때 “나리 손에 죽는게 깨끗하니 저를 죽여주소서”라고 간청한다. 장군은 눈물을 머금고 계월향을 칼로 벤 뒤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다는, 그런 이야기다.

 

일단 계월향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지는데, 이 계월향을 그린 그림이 있다. 사실주의 사조가 지배하던 시기 그림이 아니란 점을 감안하시길.




조선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적장을 척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당연히 계월향은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기생의 대표격이자 평양 미인의 대명사가 된다. 

저 그림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생겼는지 왜 미인인지 짐작하기 어려우나,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꼭 연구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 얼굴전문가 조용진 교수가 지난해 연구해 발표한 조선시대 팔도미인의 얼굴 특징 분석에서 평양 미인의 대표로 삼은 미인이 계월향이었다. 

 

잠간 옆길로 새서 조 교수의 분석을 보면  평양미인은 얼굴이 전체적으로 고구마형이고 살집이 없어 탤런트 최지우씨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당시 밝혔다. 계월향은 최지우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당시 다른 지역 미인들 중에서 장성 미인은 눈이 가장 크고 눈썹이 길고 볼이 약간 통통해 아담한데, 요즘 탤런트로 비교하자면 ‘송혜교 형’이라고 한다. 

 

좌우지간 계월향은 국가적 영웅이 되었고 후대에 널리 그 공을 알리기 위해 기념화된다. 나라에서 계월향의 영정까지 만든 것이다. 저렇게 영정도 만들고 후대까지 그를 모시고 제사도 지냈다고 한다. 

영정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여기기 쉬운데, 당시 조선시대 영정은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사회윤리의 기본 뼈대인 숭현사상에 따라 사묘에 봉안하는 것이어서 국왕과 일반 사대부 중에서도 일부만이 영정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여성의, 그것도 기생의 영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그게 바로 저 영정이다. 1815년 그려 평양 장향각에 봉안했던 것이다. 그림 뒤로 써있는 글에는 관련 일화를 다루고 있다.

 

조선의 여성 영웅은 유대의 유디트처럼 직접 적장의 목을 베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실행력이 떨어졌던 것은 아닐 듯하다. 자기 애인인 장수에게 베게 하는 것이 물론 더 효과적이었을테니말이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보면 계월향은 분명 결심이 대단한 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계월향은 오히려 저 이스라엘의 유디트보다도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황진이와 논개는 유명해도 계월향은 덜 유명하다. 왜 그럴까? 오히려 그게 더 신기하다. 

 

그리고 계월향을 그린 저 그림 역시 그동안 일반인들과는 만날 수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국내에서 사라져 일본에 팔려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한 고미술품 수집가가 2007년 일본 교토에서 구입해 한국에 들여왔다. 이를 다시 국립민속박물관이 구입해 2008년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그토록 추앙받은 의기였건만, 영정의 운명은 일본에 팔려나갈만큼 기구했고, 귀환 역시 조용하기 짝이없었다. 짧은 단신들이 전부였다.

 

우리는 지금 눈으로 저 초상화를 보기에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지 감을 잡울 수 없어하고, 또 왜 저리 정교하게 못그렸냐고 여기지만 옛 사람들이 정교한 실물 묘사능력이 없어서 저리 그린 것은 아니다. 온갖 그리는 법칙이 정해져 있는 탓에 규칙을 그대로 따라 그렸던 것이고, 그 형식이 지금 우리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실제 저런 공식 초상화들은 대단한 문화재다. 그 수도 적고 또 가격면에서도 상당한 고가다. 저 그림 역시 중요한 문화재다. 




저 초상화 얼굴 부분이다. 자세히 보면 얼굴 윤곽선과 코, 목덜미 등의 부분에 붉게 그림자를 넣었고, 인중 등 특정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음영법은 19세기 초상화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드문 표현방식이라고 한다. 

또한 머리를 크게 올려 꾸민 헤어스타일과 저고리에 달린 노리개 등을 통해 당시 복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도 자료로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런 기법상, 문화재 특성상의 중요성보다도 남성 중심 자료만 남아전하는 유교 국가 조선의 공식 자료에 여성 영웅 계월향의 그림도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더욱 기억해두어야 할 일이 아닐까. 일본과 맞서 싸웠던 계월향의 영정이 일본에 흘러들어가야 했던 저 그림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계월향의 영정이 돌아온 것은 더욱 반갑고 다행스럽다.

  

성폭행을 응징한 최고의 복수

 

저 끔찍한 유디트 그림을 그린 작가는 여성이었다. 남자들만 그림을 그리던 서양미술사에서 처음으로 이름이 등장하는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2)다.

젠틸레스키 이전에도 유디트 이야기는 성경 그림의 인기 소재였다. 그러나 젠틸레스키의 그림과는 달랐다. 남성 화가들이 그린 유디트는 예쁘고 관능적인 모습, 아니면 종교적 미감으로 표백한 성녀의 이미지였다. ‘여성’이란 의식이 확고했던 시대를 앞선 여성 젠틸레스키는 강한 유디트를 새롭게 창조했다. 새로운 유디트의 모델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젠틸레스키가 당시 여성으로서는 선구적으로 화가가 되었던 것은 지독하게도 어려운 난관과 굴레를 극복한 결과였다. 

화가의 딸이었던 젠틸레스키는 어린 시절 일찌감치 그림에 재능을 보인다. 아버지의 친구인 화가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이 스승이 문제였다. 친구의 어린 딸을 덮쳤던 것이다. 결국 이 짐승같은 스승은 고소를 당했다. 그러나 이게 오히려 더욱 젠틸레스키에게 상처를 입혔다. 사람들은 오히려 젠틸레스키키가 음란해서 유혹한 것이 아니냐고 그녀를 공격했다.

 

젠틸레스키는 이런 시련 속에서 예술가로 자신을 키워냈다. 남자만이 화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 그는 온갖 편견에 맞서 싸우는 전사가 되지 앟을 수 없었다. 그런 자의식을 담아 그린 자화상이 바로 이것이다.




시대와 사회 때문에 강한 여자가 되어야 했던 젠틸레스키는 자신을 성폭행한 스승에게 통렬하게 복수를 했다. 화가만이 할 수 있는 복수, 그리고 가장 오래가는 복수였다. 

 

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에서 목이 잘리는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을 자신을 덮친 스승의 얼굴로 그려넣었다. 

그 목을 치는 유디트의 얼굴이 젠틸레스키 자신을 닮았던 것은 물론이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을 비웃은 성직자를 자기 그림속에 추하게 그려넣었던 것을 훨씬 능가하는 화가 복수 버전이다. 

복수는 예술이 됐고, 제자를 능욕한 스승의 악명은 영원히 전해지게 됐다. 복수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복수다. 

 


 

이 이야기는 1997년 영화 <아르테미시아>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화는 픽션이 더해져 전해지는 사실과는 어느 정도 달라졌지만, 이 파란만장하고 특별했던 여성의 이야기는 세월을 뛰어넘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