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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피했던 기사-거리의 생로병사 2009/02/08
    도시 속 탐험하기 2018.09.28 15:35

    최근 어느 건축가분이 이 블로그를 보시고는 ‘왜 도시론은 다루지 않느냐’고 물어보셨다. 

    털어놓자면 내가 다루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내 실력으론 도시란 거대한 주제를 제대로 바라보기 어려워서 못다루고 있는 것이다. 

    겁없는 어린 기자 시절, 무식해서 용감했기에 도시 문제를 다뤄보려 한 적이 있었다. 기사를 쓰고 난 뒤 깜냥을 깨닫고 도시에 관한 문제는 정말 확신이 서기 전까지 다루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 뒤로 도시에 관한 기사나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도시론 물음에 문득 그 때 글이 떠올랐다. 지금보니 거의 습작 수준이어서 쑥스러울 지경이다. 반성의 의미와 개인의 자극을 위해 기록을 해둔다.


    거리의 죽살이를 통해 본 서울의 변천사… 현대화 물결에 따라 뜨고 지는 대표적 거리들 

     

    어느 날, 아무 별다른 것 없는 거리에 ‘무엇’이 들어온다. 그 무엇은 가게일 수도 있고, 또는 관공서일 수도, 회사일 수도 있다. 그 ‘무엇’이 의미를 지닐 때 그곳을 찾아 거리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거리와 의미있는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이야기가 생겨난다. 이야기가 퍼지면 사람들이 모이고 그때부터 거리는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수유리는 특정 세대가 지배하는 대표적인 거리이다. 가출청소년들이 모이던 거리에 성인 유흥업소도 들어서고 있다

    도시의 핏줄은 거리다. 그리고 그 거리는 살아 있다. 거리는 사람과 자본을 먹으며 자라고, 변하고, 병들거나 죽기도 한다. 도시라는 몸뚱이 속을 씨줄 날줄로 엮으면서 거리는 사람과 물자를 이어주며 스스로 생명을 유지한다. 잘 자라난 거리에선 사람냄새와 돈냄새가 공존하고, 권력과 문화의 냄새도 묻어난다. 

     

    인구 1천만이 넘는 대도시 서울의 거리는 늘 활발하다. 넓디넓은 서울 곳곳에서 지금도 거리가 태어나고 한편으론 죽어간다. 수백년 동안 생기를 잃지 않고 장수하는 거리도 있고, 사람보다 죽살이가 짧은 거리도 많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이곳에는 다른 거리에 없는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 ‘낡음’과 ‘오래됨’이다. 모든 것이 새것, 서양의 것들로만 뒤덮인 서울에서 인사동은 우리나라만의 옛것들을 간직함으로써 역설적인 새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거리다.   

     

    사람과 자본을 양식 삼아 생로병사

       

    인사동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 안동 김씨 등 권문세가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개화기 들어 조선왕조가 무너지면서 인사동에 살던 명문대가들도 함께 몰락하면서 이들의 재산이 내다 팔리기 시작한다. 목가구와 도자기, 그림들이 쏟아지면서 고미술품 가게들이 인사동의 주역으로 들어선다. 돈도 함께 뭉텅뭉텅 돌면서 돈맛을 즐길 공간인 요정도 따라서 생겨났다.

     

    낡은 것의 미덕을 간직한 인사동에 개발의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미술관과 화랑들은 차츰 인사동에서 밀려나 경복궁 옆길로 옮겨갈 태세다

    70년대에는 미술이 인사동 거리에 다른 색깔을 덧씌웠다. 화랑들이 두집 세집 건너 하나씩 들어서면서 요정은 한식집으로 바뀌고, 전통차의 구수한 내음을 풍기는 자그마한 찻집들이 화랑 옆에 생겼다. 90년대 후반, 인사동은 이전의 몇배나 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로 불쑥 성장한다. 

     

    그러나, 성장과 동시에 치유하기 힘든 병을 앓게 됐다. 시인묵객들이 주로 찾아와 치열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불끈 솟아나는 취기를 터뜨리던 이 거리에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 발길에 채여 생긴 상처는 금방 곪아서 이젠 터지기 직전이다. ‘차없는 거리’가 시행되면서 밀려든 인파와 함께 임대료가 오르고, 이 바람에 인사동의 매력포인트인 작고 올망졸망 붙어 있는 공방과 찻집, 표구사, 골동품 가게들이 인사동을 떠날 위기에 처했다. 낡은 집들이 헐리고, 그 자리엔 주변 건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재개발을 둘러싼 논란은 해답없이 계속 논란을 낳고 있다.   

     

    늙고 병든 인사동 거리는 대신 새로운 공간을 잉태했다. 길 건너편 종로구 사간동과 팔판동 일대로 이어지는 경복궁 옆길이 요즘 본격적으로 태동을 시작한 것이다. 기무사와 국군수도통합병원이 이 거리의 중간에서 맥을 끊고 있었지만 최근 이전을 결정하면서 인사동쪽에 있던 미술 관련 기관들이 이 거리로 몰려갈 태세다. 이미 많은 인사동 화랑과 가게들이 이곳 땅을 사놓은 상태다. 얼마 뒤면 사간동이 인사동을 대신해 ‘미술의 거리’로 바뀔 조짐이다.   

     

    문화의 거리를 점령한 대형 신축건물들   

     

    미술이 인사동을 살찌웠듯, 문화는 거리에 가장 매력적인 개성을 부여하는 요술쟁이다. 무게와 권위를 앞세우는 권력과, 눈앞의 돈을 노리는 자본이 거리의 숨통을 되레 조이는 반면, 문화는 자본과 유행이 쉽사리 만들지 못하는 강한 흡입력을 자생시킨다. 

    서울의 진산 남산 기슭 중구 예장동이 그렇다. 검고 어두운 느낌으로 시민들을 위압하던 안기부가 강남으로 떠나면서 이 언덕길은 새로운 활력을 수혈받았다. 지난해 문을 연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어린 학생들을 끌어모으고, 원래부터 영화 시사회장이 있어 영화팬과 영화계 인사들이 몰리는 남산빌딩, 끼와 발랄함이 넘치는 서울예대가 나란히 이어지면서 차츰 문화의 향기가 짙어지고 있다.   

     

    그러나, 남산길처럼 ‘문화의 거리’가 반드시 행복한 성장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랜 세월 숙성해야 그윽한 매력을 풍기는 문화는 거리를 만드는 또다른 요인인 자본에 쉽게 휘둘리는 약한 존재다. ‘연극의 거리’ 서울 동숭동 대학로는 자본이 문화를 구축하는 전형적인 거리의 성장사이클을 보여준다. 

     

    원래 연극계에는 “특정지역을 발전시키려면 연극인을 모으면 된다”는 말이 있어왔다. 연극인이 연극을 알리기 위해 시내 곳곳마다 포스터를 붙이다보면 연극 거리는 금세 널리 알려져 사람을 끌어모으기 때문이다. 몰려온 연극팬들이 쓰는 돈을 흡수하는 식당과 유흥업소가 뒤따라 생기면서 거리가 만들어지면 연극팬이 아닌 이들도 몰려 거리가 발전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연극으로 태어나 자란 거리는 이내 부메랑처럼 연극인의 뒤통수를 때린다. 임대료가 마구 올라가 극단 운영이 힘들어지고, 주변에는 비싼 식당들만 늘어나 호주머니가 가벼운 연극인들이 뒤풀이나 회식하기도 버거워진다. 그러면 다시 연극인들은 하나둘씩 다른 곳을 찾아 떠나고, 다시 새 거리가 만들어지는 윤회과정이 반복된다.   

     

    연극인들도 대학로를 떠나고 있구나 


    대학로에 자리잡은 연극의 거리가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사람들이 몰려오자 대형 식당과 유흥업소가 극장 자리마저 꿰차고 있다

    지금의 대학로는 연극인들에게 알맞은 거리를 벗어난 지 오래다. 극단 백수광부 대표 이성열씨는 “극장 임대료가 한달 1천만원이나 하는 실정”이라며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대학로를 떠나는 극단들도 나오고 있다. 극단 미추가 장흥으로 터전을 옮겼고, 이윤택씨가 이끄는 연희단거리패는 경남 밀양으로 떠났다. 물론 이들은 돈문제 때문이 아니라 상업화된 대학로를 떠나 새로운 연극의 장을 개척하는 경우다. 그러나 다른 연극인들은 대부분 새 연극 거리가 있다면 언제라도 떠나고픈 심정들이다. 처음 신촌과 명동에 모여 있던 연극인들이 비싼 임대료 때문에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될 즈음 대학로로 이주했고, 대학로가 다시 상업화되면서 다시 연극인들이 대학로를 떠날 고민을 해야 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대학로와 인사동 같은 특정 문화의 거리는 다른 외국의 주요도시에도 있게 마련이다. 도시에서 이런 문화거리는 필수불가결한 동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울에는 다른 외국도시에는 없는 특이한 거리들이 있다. 대부분 도시의 거리는 보통 경제적 계층에 따라 분화된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연령에 따라 노는 거리가 분화되는 외국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현상이 함께 진행되고 있다.   

     

    생존경쟁 치열한 10대들의 거리   

     

    돈암동, 화양리, 잠실 신천, 노원역 주변과 수유리, 새롭게 뜨고 있는 도곡동 옛 그랜드백화점(현재 롯데백화점) 뒷골목과 철산동 등은 오로지 10대들의 해방구이자 일탈공간이다. 

    반면 10대와 20대가 공존하는 강남역과 신촌, 20대와 30대의 거리인 청담동, 30대 이상의 유흥가인 영등포와 장안동 등 대표적인 서울의 유흥가들은 나이별 구분이 확실한 편이다. 그리고 이들 유흥가는 서울 지역마다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특성도 함께 보인다. 

     

    미사리는 요즘 여유있는 30대의 휴식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맨 위). 염천교 구두거리(가운데)와 충무로 인쇄골목(맨 아래)은 생명력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같은 10대의 거리라고 해도 이들 거리는 서로 경쟁을 통해 생존경쟁을 벌인다. 전통적으로 가출청소년들이 모이던 수유리는 최근 몇년 사이 훨씬 거리의 규모가 커졌다. 인근 10대 거리인 노원역 부근과 ‘시너지 효과’까지 생겨나면서 이젠 성인 유흥공간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급 유흥거리인 압구정동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의 매력으로 ‘뒷구정동’이란 애칭을 얻으며 자라난 잠실 신천역 뒷골목도 비슷하다. 반면, 이들 라이벌 거리에 밀리고 있는 돈암동 성신여대 부근과 화양리는 날로 쇠락하는 추세다.   

     

    다른 연령층 거리와는 달리 10대들의 거리는 그 생로병사가 훨씬 빨리 진행된다. ‘물좋다’는 소문만 나면 금세 북적거린다. 하지만 호황도 잠시일 뿐이다. 10대들은 싫증나면 매정하게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또 이들 거리의 죽살이는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 먼저 중저가 의류점들이 생겨 유동인구가 늘어나면서 유흥업소들이 뒤따르고, 유흥업소들은 유흥업소들끼리 경쟁하며 발전과 쇠퇴의 생로병사를 겪는다. 

     

    노원역에서 단란주점을 운영하는 이아무개(34)씨는 장사를 통해 몸으로 체득한 ‘삐끼의 법칙’으로 유흥가의 흥망성쇠를 설명해준다. “유흥가에서 삐끼가 생겨나면 그 유흥가가 발전과정에서 절정을 맞았다는 이야기다. 삐끼가 등장하면 그 시점부터 서서히 하락한다고 보면 된다. 많은 업소가 몰리면서 임대료가 올라가고, 그 임대료를 뽑기 위해 손님을 더 많이 끌어들여야 하니까 어느 한 업소가 삐끼를 고용하고, 다른 업소들도 모두 삐끼를 고용한다. 그러면 삐끼에게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당연히 술값을 올리게 되고 그러다보면 손님들은 ‘바가지’쓰는 것을 알고 차차 그 거리를 찾지 않게 된다. 그 다음 삐끼는 사라져도 다시 최고의 호황기로 되돌리긴 힘들다.”   

     

    이처럼 각각의 특징을 지닌 독특한 서울의 거리들은 대부분 강북에 자리잡고 있다. 골목이 많고 조그마한 가게들이 밀집하기 좋기 때문이다. 반면 강남 거리는 바둑판처럼 각이 잡혀 있고 널찍해서 시원해보여도 사람맛나는 거리가 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대형건물이 들어서고 보행공간이 넓어지면 거리와 사람이 교감을 맺기 어렵기 때문이다.   

     

    큰 빌딩이 이어지는 강남 거리에는 ‘휴먼 스케일’이 없다. 휴먼 스케일이란 사람들이 생활하고 활동하기에 알맞은 공간개념이다. 여러 채의 작은 건물이 ‘ㅁ’자 형태로 구성된 한옥의 가운데 빈 공간은 각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사적인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을 정도로 멀고, 식구들이 서로 불러서 의사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기도 하다. 바로 이런 공간개념이 휴먼 스케일이다. 일률적인 개발로 단숨에 이뤄진 강남의 거리는 골목 같은 휴먼 스케일적 요소들이 없어 거리를 거니는 재미와 인간의 냄새가 없다. 거리는 사람과 자본이 공존해야 살아나지만, 강남의 거리는 사람을 오로지 소비의 객체로만 여기는 자본의 힘만이 지배한다.   

     

    단절의 공간 강남…강남의 상징 테헤란 밸리


    한국 벤처기업의 산실로 자리잡은 테헤란 밸리. 천정부지로 솟은 임대료 부담에 수명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대신 강남에는 강남만의, 강남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거리가 있다. 바로 벤처기업이 밀집해 태어난 테헤란로의 ‘테헤란 밸리’다. 지난해부터 급격하게 성장한 테헤란 밸리는 한국적 벤처의 속성에서 태어나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건 벤처기업들이 테헤란로를 최적의 장소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고 아직은 그저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거리의 등장에는 사회경제적인 정교한 메커니즘 속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작용했을 것이란 점이다. 

     

    테헤란 밸리의 경제지리학적 분석작업을 진행중인 서울시립대 남기범 교수(도시경제학)는 “테헤란로란 거리 자체가 기업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겉치레를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회사 위치가 지방이면 명함내밀기가 어렵지만, 테헤란로에 있는 회사라고 하면 믿을 만한 회사로 봐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남 교수는 주택가와 밀접한 테헤란로의 지리적 특성이 더욱 중요한 원인이라고 본다. 

    남 교수는 “벤처산업 같은 지식기반형 산업의 입지요건은 거주지와 회사, 그리고 직원들이 여가를 즐기면서 다른 회사 직원들과 만나 활발히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가까워야 한다”며 “테헤란로는 이런 조건을 모두 총족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신생거리인 테헤란 밸리의 수명은 그 성장처럼 짧을지도 모른다. 이미 천정부지로 치솟은 임대료와 점점 더 혼잡해질 교통이 활동성을 생명으로 하는 벤처기업들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환경이 더욱 악화되면, 벤처들은 또다시 새로운 거리를 찾아 떠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테헤란로란 거리는 남아도 벤처 밸리라는 거리는 사라지는 셈이다. 테헤란 밸리도 다른 모든 거리처럼 태어나서 자라다 결국은 죽게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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