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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었던 신도시 2009/02/03
    도시 속 탐험하기 2018.09.28 15:19

    황제는 말했다. 

    “우리나라 서울을 옮긴다. 시크리란 곳에 새 수도를 지어라.”

    1569년, 백성들은 새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주변을 돌아봐도 야트막한 산 하나 안보이는 내륙 평야지대의 유일한 구릉 위에 거대한 사원, 그리고 화려한 궁전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주위를 백성들의 집들이 둘러쌌다. 

    2년 뒤, 제국의 수도는 새 도시로 바뀐다. 천도를 축하하듯 제국이 치르던 전쟁도 승리로 끝났다. 시크리에 지은 새 서울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승리의 도시 시크리’란 뜻의 ‘파테푸르 시크리’로 바뀐다.

     

    그런데, 고작 14년 뒤 황제는 다시 명령했다. 

    “다시 서울을 옮긴다. 원래 살았던 옛 수도로 돌아가자.”


    얘들아, 이 도시가 아닌갑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서울을 옮겨야 할만한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수도를 옮길 수 밖에 없었던 치명적인 이유가 있었다.

    새 도시에는 물이 부족했다. 우물 스물몇개로 수십만명 도시가 살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도 부족한데다 전염병도 돌았다. 황제는 결국 자기의 도시를 포기해야 했다.

     

    인도를 지배했던 무굴왕조의 서울은 그렇게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아그라로 되돌아갔다. 타즈 마할의 도시 아그라는 야무나강이란 젖줄을 지니고 있었기에 다시 영광을 되찾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강가와 동떨어진 곳에 도시를, 그것도 수도를 지은 왕의 잘못이 컸던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버림받은 신도시 파테푸르 시크리의 운명은 ‘외면’과 ‘방치’ 그 자체였다. 이후 400여년 동안 이 신도시는 텅 빈 채 남았다. 유령도시, 또는 거대한 폐허로 지금까지 남았다. 

     

    그런데, 운명이란 참으로 역설적이다. 

    버려진 도시 파테푸르 시크리는 문화유적이 동사무소 건물처럼 널려있는 인도에서도 몇 안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일찌감치 지정됐다. 

    아니, 그건 또 도대체 왜? 

    당연한 이유가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우니까!  



     

    파테푸르 시크리는, 이슬람 사원인 자미 마스지드와 황제의 궁전, 두 부분으로 이뤄져있다. 마을을 굽어보는 언덕 위에 거대한 저 문이 있다. 모스크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의 이름은 ‘승리의 문’. 전쟁 승리를 기념해 크고 높게 고쳐지었다. 높이는 무려 54미터. 

     

    문 입구에서 내려다 보는 너른 평원이 인상적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문을 본다. 높다. 그리고 아름답다. 은근한 화려함을 장중함이 압도한다.

     



    그런데, 저 동그랗게 파인 아치 천장에 뭔가 이상한 것들이 달라붙어 있다. 

    얼핏 보면 버섯처럼, 또는 거머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50미터 아래에서 봐서 저만한 버섯이나 거머리가 있을리 없는 법.

     



    거대한 건축물에 붙은 것은 바로 곤충의 건축물 벌집이다. 저 높이에 저 정도 크기로 보이니 장난이 아닐 듯하다.

     

    이제 사원 안으로 들어갈 차례다. 왕궁은 주인이 떠난 뒤 철저하게 버려졌지만, 사원만큼은 아직도 살아있다. 이슬람 사원이어서 사원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착하게도 사원 입장은 무료다. 대신 신발을 맡아주는 이에게 돈을 내야 한다. 

    사원 전체가 돌바닥이어서 여름에는 뜨거워서 발을 델 지경이고, 겨울에는 시리도록 차서 꼭 양말을 가져가야 하는 곳이다. 




    거대한 문의 나무 문짝에는 독특하게 말발굽을 붙여 장식을 했다.

    문의 망루는 성벽과 이어져 거대한 복도를 이룬다. 기둥이 줄지어선 모습이 장관이다.

     



    그리고, 눈 앞으로는 너른 공간이 시원하게 펄쳐진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곳은, 바로 정면의 저 햐안 대리석 건물이다. 

     


     

    저 건물을 기도하는 사당이기도 하지만 실은 무덤이다. 과연 누구의 무덤일까?

    저 무덤의 주인이 바로 무굴제국의 백성들에게 이곳에 수도를 짓는 고생을 시킨 장본인이다.

     

    그러면 황제의 무덤인가? 

    아니다. 황제로 하여금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한 계기를 만든 사람이다. 이름은 셰이크 살림 치스티. 

    그는 성자였다. 무굴제국의 3대 황제이자 역사에 유명한 인도 대표 황제랄 수있는 악바르는 이 성자에게 감사해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결국 물이 모자라 수도를 14년만에 되돌리는 어처구니엇는 헛수고가 나온 황당한 이야기의 시작이 이 하얀 대리석 건물에 담겨 있다.

     

    악바르 황제에겐 엄청난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을 후사가 없었던 것이다. 황제인 그에게 왕자가 없는 것은 제국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다. 할아버지 바부르가 세우고, 아버지 후마윤을 거쳐 자신에게 이어진 무굴제국이 고작 3대만에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 전체를 통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북부를 장악한 악바르 황제는 정복당한 세력들을 감싸안으며 내부 통합을 이뤄야했다. 이슬람 교도였던 황제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힌두교 세력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힌두세력을 대표하는 라지푸트족 공주(들)과 결혼을 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주특기였던 사돈맺어 관리하기 전략이다. 그래서 힌두 공주와 결혼했는데, 왕자가 태어나지 않으면 장차 제국의 구도가 깨질 가능성이 컸다.

     

    황제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한 소식이 들렸다. 수도 아그라에서 가까운 시크리에 정말 예지력이 대단한 성자가 있다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황제는 성자 살림 치스티를 찾아가 의논을 하기로 했다. 이슬람 수피 성자 하나 만나러 황제가 몸소 벌판으로 떠났다.

    치스티 성자는 말하자면, 디오게네스같은 이였나보다. 동굴에서 살던 그는 황제를 보더니 씩 웃으며 손가락을 세개 펴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황제네 본가는 세 식구가 됐다. 라지푸트 공주인 아내 조다 바이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아들이 없어 미칠뻔 했던 황제, 어찌 미치도록 기쁘지 않았겠는가. 그 바람에 온 국민을 개고생시킨 그 명령을 내렸다. 아들의 탄생을 일러준 위대한 성자 치스티가 사는 시크리로 수도를 옮기자고 말이다. 14년 단명한 신도시 수도는 그래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 성자, 살림 치스티를 모신 사당은 이후 인도 여인들이 와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명소가 되었다. 지금도 많은 인도 아줌마들이 저곳에서 아들 소원을 빈다. 그 앞에서 저렇게 인도 아저씨들이 공연을 벌이기도 한다.

     

    저 무덤은 창문이 예술이다. 돌에 구멍을 뚫어 거의 망사처럼 정교하게 만들었다.

     



    저 구멍이 모두 돌을 조각해서 뚫은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편집증 수준으로 잘게 창문에 구멍을 낸 것은 단순히 보기 멋지고, 내부에 빛들이 멋진 장면을 연출하라고 한 멋내기 목적만은 아니라고 한다. 

    망사처럼 잔 구멍을 낸 것은 실제 망사천의 효과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얼굴 앞에 망사를 드리우면 망사로 얼굴을 가리면서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건물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있지만 바깥에선 안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모스크 내부 곳곳을 둘러보자. 기하학적인 인도 건축의 매력을 질리도록 맛볼 수 있다. 인도의 주류를 이루는 힌두사원들과는 다른 인도식 이슬람 사원의 매력이 진하다.

     



    헌화하는 꼬마들의 모습이 귀엽기 그지 없다. 

    대신 어른들은 좀 널브러져 계신 분들이 많다. 사원에서 누워도 되는 것, 그것도 참 묘하다. 




    그런데, 아까 앞에서는 분명 이곳 파테푸르 시크리를 ‘폐허의 도시’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폐허냐 싶으실 것 같다. 폐허처럼 남아있는 이 도시의 또다른 절반, 악바르의 궁전으로 들어갈 차례다. 저 문을 나서면 바로 왕궁이다. 

     

    살아있는 이 사원과 달리 죽음처럼 고요한 왕궁은 버려진 도시만의 독특함을 내뿜는다.

     

    인간이 소거된 절대적인 고요의 미학-악바르의 궁전

     

    악바르의 궁전은, 인도 특유의 붉은 사암 건축 중에서도 붉은 색조가 두드러진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붉은색 석조건물들이다. 광궁 건물들은 생김새가 기하학적이고 단순해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조각한 장식들이 무척 화려해 한참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다.




    가운데 네 망루가 솟은 건물은 파테푸르 시크리의 간판 스타격인 건물이다. 인도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주 쓰일 정도다. 건물 용도는 왕의 알현실. 내부의 기둥 구조가 무척 인상적이다.




    저 건물 위에서 왕은 앞 돌마당을 내려다 보면서 인도 장기를 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장기말은 다름 아닌 시녀들이었다. 갑순이 시녀야, 두 칸 건너가 을순이를 잡아먹거라, 뭐 그랬을텐데 그 바람에 이 건물은 더욱 유명해졌다.



     

    한 건물 벽에 새겨진 부조가 아름답다.  




    저 가운데 줄지어선 무늬를 보는데 지나가던 인도 아저씨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동양 양반, 이게 뭔지 아나? 이게 인도 귀걸이야, 귀걸이.” 오호, 감사할 따름.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위에 찍은 요렇게 생긴 건물이 나오고, 그 앞으로 ‘ㄷ’자 모양으로 이렇게 긴 줄기둥이 펼쳐진다. 아주 매력적인 공간이다. 




    저 긴 복도 공간의 내부는 이렇다.




    나중에 설명을 들으니 저 웅장한 복도는 실은 마굿간이라고 한다. 




    튀어나온 창문 처리가 너무나 예쁜 이 건물을 지나 저 하얀 모자 같은 망루가 줄지어선 성벽쪽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건물과 주변 풍경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 보고 있는데, 건물 사이 난 작은 문에서 무언가가 졸졸졸 줄지어 나온다.




    목가적인 풍경이란 이런 것이다 싶은 정경이다. 그리고 저 바깥으로는 넓디 넓은 대평원을 바라보는 폐허 유적들이 다시 펼쳐진다. 


    파테푸리 시크리의 왕궁과 성곽 주변은 폐허지만 왕궁 내부는 400년 동안 방치되었음에도 큰 파손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폐허와 왕궁이 어울리는 모습, 그 속에 담긴 절대적인 정적감, 버려진 공간이 주는 묘한 느낌... 그런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파테푸르 시크리는 다른 어떤 유적과도 다른 느낌을 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공간 특유의 분위기, 그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파테푸르 시크리는 꼭 가봐야 할 건축, 꼭 가봐야 할 유적으로 꼽힌다.

     

    누구나 인도를 대표하는 건축물, 명소라면 타즈 마할부터 떠올린다. 

    분명 맞는 말이다. 타즈 마할은, 인간을 초월하고자 한 극한의 건축이다. 인도가 아니라 인류를 대표할만한 건축물이다. 

    그 타즈 마할이 있는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도시 아그라는 인도 여행의 1번지다. 

    아그라에서 타즈 마할을 봤다면, 다음은 강 건너편 아그라성에서 멀리 타즈 마할을 다시 한번 음미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1시간쯤 차를 달려 이곳 파테뿌르 시크리로 올 일이다.

     

    파테푸르 시크리는 신전과 궁전, 화려한 지배자의 건축과 허름한 시골 마을, 제국의 영광과 몰락, 산 공간과 죽은 공간, 온전한 것과 허물어진 것들이 짝패로 맞물린 묘한 운명의 도시다. 이 버려진 신도시가 뿜어내는 묘한 매력은 건축 차원을 넘어 도시와 인간, 역사가 버무려져 만들어내는 인간사에 대해, 그리고 운명은 황당했지만 세계의 문화유산이 된 이 도시의 기이한 풍경과 아름다움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악바르, 그를 오해하진 마세요

     

    사실 앞에서 이 곳에 신도시를 짓자고 한 부분만으로 보면 악바르 황제는 대단히 무책임한 황제처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아그라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14년만에 옮긴 황당한 일화는 인도를 조롱하는 사례로 종종 쓰이기도 한다고 한다. 인도가 얼마나 전제적이며, 즉흥적이었는지 이보다 더 극명한 사례가 어딧냐는, 그런 꼬집기다.

     

    그러나 악바르는 이 실수만 빼면 실로 위대한 황제였다. 그는 단순한 황제가 아니라 ‘대제’로 불린다. 악바르 대제. 그가 이런 칭호로 불리는 것은 그가 무굴제국의 기틀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치면 강희제며, 우리로 치면 세종쯤 될까? 건국 초기, 나라를 세운 태조의 뒤를 잇는 위대한 황제가 있어 새로운 왕조는 장수할 수 있다. 무굴제국은 악바르에 의해 장수 왕조가 된다.

     

    그는 앞서 말했든 이민족, 이교도 백성들을 찍어누르기보다는 선정을 베풀어 진심으로 충성하게 만드는 전략을 썼다. 이민족 공주와 결혼해 양쪽 피를 이어받은 후계자를 낳았다. 그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세금을 걷었던 다른 황제들과 달리 자기는 이슬람 신자였지만 힌두 신자들에게도 인두세를 내지 않고 종교를 믿게 해줬다. 벼슬도 출신을 가리지 않고 능력 위주로 주었다. 

     

    알고 보면 대단한 황제, 악바르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누구나 실수는 한다. 황제도. 백성들은 죽어나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는 백성을 사랑한 황제였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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