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사창가 초토화한 나비작전의 그곳, 숨은 옛 골목을 가다 2008/11/03
    도시 속 탐험하기 2018.09.12 20:33

    도시가 나뭇잎이면 길은 잎맥이다. 사람과 물자, 문화와 정보가 길을 따라 흘러주기에 도시는 생명력을 수혈받는다. 

     

    예전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건축을 소개할 때 도시를 만화에 빗댄 적이 있다. 도시와 만화는 구조적으로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만화의 핵심은 네모칸 안의 그림이지만 만화에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네모칸들 사이에 빈 홈통처럼 나있는 빈공간 틈새다. 이 빈 통로를 지나 한 그림에서 다음 그림컷으로 넘어가면서 장면이 연출되고 독자들은 그림과 글속에 없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비어있기 때문에 만화를 만들어내는 이 빈 홈통의 기능은 실로 신비한 것이다.


    만화와 도시의 공통점

     

    도시에서 길이 바로 이 만화의 홈통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길은 비어있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전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공간이 된다. 생명이 강을 따라 흐른다면 도시의 모든 것은 길을 따라 흐른다. 

     

    그런데 이 길에는 묘한 특성이 있다. 무조건 넓다고 좋은 것이 아니란 점이다. 인간의 본성, 그러니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생기는 특성이랄 수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강남의 넓은 길들은 보기부터 좋다. 찻길도 여러 차선이어서 반듯하고 사람이 걷는 인도도 넓다. 길가의 상점들도 크고, 쇼윈도도 커서 시원시원하다. 그런데 실제 이 강남 대로를 거니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베이징의 옛 서민층 집단거주지 골목인 ‘후통’은 건축적으로 중요한 공간일뿐만 아니라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많은 후통이 파괴되었다. 일부는 리노베이션으로 카페 등으로 변해 새로운 운명을 맞았다.


    반면 강북의 골목들은 어떤가. 길도 좁고 꼬불꼬불 하며 가게도 작다. 그런데도 강남보다 많은 사람들이 골목을 오간다. 왜 사람들은 더 많은가? 단순히 오래된 거리라서가 아니다. 넓기만한 대로보다 복작대는 골목이 사람들에겐 더욱 즐거운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길에는 알맞은 ‘부대낌’이 있어야 사람이 찾는다. 알맞게 사람들끼리 부대끼면서 다닐 수 있는 ‘즐거운 좁음’이 있어야 사람들은 그 길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강남의 넓은 길들은 처음부터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다. 차를 위한 길일 뿐이다. 반듯하고 넓어도 사람들은 다니고 싶어하지 않는다. 복작거림, 부대낌, 오밀조밀함, 숨어있는 재미 같은 것들이 없는 탓이다. 사람 중심의 척도인 ‘휴먼 스케일’이 결여된 것이다. 반면 골목은 좁고 불편해도 사람들의 행동 범위에 맞는 사이즈다. 

    파리 샹제리제의 넓은 길이 비록 유명하다 해도 한번 지나치는 재미를 줄 뿐, 하루 종일 쏘다니고 돌아다니는 재미는 주지 못한다. 그런 재미는 구도심의 좁은 골목길에서 만끽할 수 있다. 자동차들이 다니기 전에 사람들이 만들어낸 좁은 골목길들, 오랜 시간이 중첩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런 골목들은 그 자체로 문화적 공간이자 유산이며 소중한 관광자원이다. 

     

    서울 종로 피맛길. 피맛길이 소중한 이유는 이 공간이 수백년째 이어지는 서민들의 삶터였다는 점이다. 대형빌딩들 속에서 명맥을 이어온 이 길이 요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전세계 어느 도시에나 구 도심에는 이런 골목길이 있다. 바로 구 도심에. 선진국 골목길들은 중요한 공간으로 대접받으며 생명을 이어간다. 반면 개발도상국들은 이런 소중한 골목을 도시의 치부로 여기고 없애버린다. 베이징의 오랜 골목길 후통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이미 다 없애버렸다. 그나마 남아있는 것도 바로 요즘 같은 시대 살리기는커녕 없애고 있다. 서울 도심 골목길의 대명사 ‘피맛길’도 지금 공사에 몸살을 앓는다. 관광과 문화,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아진 최근 몇년새 골목들은 오히려 사라져 간다.

     

    인사동과 가회동에 가려 숨어있는 옛 골목, 낙원상가 일대를 가다

     

    많은 이들이 서울의 중요한 골목길로 피맛길, 그리고 인사동과 북촌 한옥골목을 꼽는다. 그런데, 이런 옛 골목 못잖게 흥미로운 골목길이 서울에 또 있다. 인사동과 피맛길 바로 코앞에 있는 길임에도 사람들이 즐겨찾지 않는 숨은 골목길들이다. 탑골공원과 낙원상가, 그리고 돈의동과 익선동 일대에 숨어있는 소중한 뒷골목들이다.

     

    지난 토요일, 모처럼 이 골목들을 찾았다. 문화단체 문화우리가 마련한 프로그램을 따라나섰다. 이 답사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동행을 결정한 것은 강사로 나선 이가 건축가 조정구씨였기 때문이다.

    한옥을 짓는 현대건축가 조정구씨는 서울 시내 거의 모든 동네를 조각조각 매주 한차례씩 몇년째 골목을 답사해왔다. 조선시대 전통 한옥 못잖게 일제시대 한옥이 도시화한 서울 가회동 등의 도심형 한옥들에 관심이 많아 서민들의 공간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이다.

    (그의 대표작은 최초의 한옥 호텔인 경주의 라궁으로, 이 블로그에서 다루기도 했다.) 

     

    한옥으로 현대건축을 하는 건축가 조정구씨. 베토벤 머리 스타일이 잘 어울린다. 그는 오랫 동안 서울 곳곳을 술래잡기하듯 답사해온 연구자형 건축가다.


    답사는 탑골공원에서 시작했다. 덕분에 몇 년 만에 탑골공원을 들어가봤다. 수없이 앞을 지나쳤지만 안에 들어가 본 것은 서너차례 뿐이다. 많은 이들이 탑골공원을 노인들만의 공간으로 여겨 들어가길 꺼린다. 그러나 탑골공원처럼 들어가봐야할 이유가 많은 곳도 없다.

     


    우선 이 공원은 독립선언을 한 민족의 성역이다. 또한 누구나 다 아는 그 유명한 국보 1호 남대문과 달리 아는 사람 찾아보기 힘든 국보 2호가 있는 곳이다. 국보 2호는 바로 원각사지 10층 석탑. 부식과 훼손 때문에 유리집 안에 들어가 있는 안타까운 보물이다. 바로 이 탑 때문에 탑골공원이란 이름도 생겼다. 

    그리고 이 공원의 뒷쪽은 도심속에 숨어있는 골목길의 보고다. 다니는 사람들만 다니는 골목이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잊혀진 골목이기도 하다.

     

    골목 답사는 탑골공원 담길 옆 골목을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됐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곳, 노인들만 존재하는 짧은 골목이다. 서울에서 가장 싼 100원짜리 자판기 잔술을 파는 가게가 있는 동네가 또 있을까. 잔술은 소주를 한 병을 살 여유가 없는 노인들을 위해 한 잔에 몇 백원 받고 파는 술이다. 마치 예전에 담배를 낱개로 팔던 ‘까치 담배’를 연상하게 한다.

     


    이 탑골공원 담길 골목은 노점상들의 골목이기도 하다. 노점의 판매 품목은 모두 노인들을 상대로 하는 것들이다. 군용 점퍼부터 돋보기 안경, 온갖 잡동사니들을 노인들이 들여다본다. 40대 이하는 잠시 찾아볼 수 없는 이 골목을 지나면 바로 이 건물이 나온다.

     


    얼핏 보기에도 제법 신경쓴 디자인의 건물이다. 고시원을 저렇게 지었을 리는 없는 법. 바로 옛 ‘파고다극장’이다.

    지금의 30대 중반 이상 남성들에게 파고다극장은 ‘잘못 혼자서 영화보러 갔다가 난감해지는 곳’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 극장과 부근이 서울 남성 동성애자의 메카였기 때문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시인 기형도가 숨을 거둔 곳’일 것이다. 질투가 자기의 힘이었고, 잎속에 검은 잎이 돋아난다고 노래했던 시인은 1989년 3월7일 새벽 이 극장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사인은 뇌졸중. 불과 스물여덟살이었다. 

    파고다극장은 또한 80년대 중후반 한국의 메탈키드들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공연장이 부족했던 아마추어 메탈 밴드들은 이곳을 빌려 합동공연을 열곤 했다. 그룹 레인보우와 쥬다스 프리스트, 오지 오스본을 받들던 친구들의 강권에 못이겨 공연 티켓을 사서 파고다극장에서 풋내나는 록밴드 공연을 봤던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

     

    극장은 이제 고시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행히 건물은 그대로였다. 고시원이란 신종 유행공간은 정말 묘한 곳이다. 얼마전 중국 동포 여성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 고시원이었듯이 요즘 고시원은 저소득층, 뜨내기, 방랑자들의 장기 투숙공간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번화한 종로 한복판, 큰길 바로 뒤에는 이런 고시원들이 곳곳에 있다. 

     

    이 파고다고시텔을 지나면 ‘현대판 쪽방’인 고시원들의 원조, 진짜 쪽방들이 모여있는 쪽방촌이 나온다.


    쪽방촌으로 가는 골목 입구에 그려져 있는 벽화. 한 러브호텔을 알리는 그림이다. 감히 ‘서울에서 가장 아름답고 풋풋한 러브호텔 간판’이라고 품평해본다.


    러브호텔을 지나면 골목길이 잠시 확 넓어지고 갑자기 새 건물이 나온다. 지은 지 적어도 30년씩은 된 듯한 건물들만 있는 그 한가운데에 있어 더욱 두드러지는 이 빌딩은 바로 유명한 한의원 춘원당이다. 건축가 황두진씨가 최근 설계한 신작이다. 탕약 설비를 마치 생맥주 양조시설처럼 드러나게 한 것이 인상적이다.

     

    유일하게 ‘럭셔리’한 건물 춘원당 한의원. 최고의 건축전문 사진가 박영채씨의 사진.




    이 춘원당을 지나면 이제 쪽방촌이다. 앞에서 사람이 오면 몸을 돌려야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이 생선 가시처럼 이어진다. 

     



    쪽방촌 건물들은 필요에 따라 증축을 계속해 비정형으로 자라난 모습들이다. 아래 면적보다 윗층 면적을 넓게 하기 위하여 2층들이 튀어나온 것은 기본이고 배관이며 설비가 건물 바깥으로 노출된 집들이 대부분이다.

     



    이 쪽방촌은 하루 묶는 데 7000~8000원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도 머물 수 없게 되면 노숙자로 전락하게 된다. 홀몸인 사람들이 기거하는 최후의 주거공간인 셈이다.

    이 쪽방 건물들은 구조가 매우 흡사하다. 1층은 주인이 사는 살림집. 그리고 2층은 일세, 그러니까 하루 단위로 세를 놓는 방들이 서너개씩 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정말 가파르다.

     



    이 쪽방 건물들의 이런 구조는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 

    조정구씨는 조심스럽게 ‘옛 사창가 건물들의 구조’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한다. 1층에서 술을 마신 뒤 2층 각 여성들의 방에서 매춘을 했던 옛날 이 지역 사창가 건물들이 자연스럽게 쪽방으로 바뀌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아저씨 놀다 가세요~” 이 한마디에 이튿날 나비작전이 시작됐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서울의 한복판 종로 한가운데에 사창가가 있었다는 것이 새롭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50대 이상 세대들에게 ‘종삼’이란 단어는 곧 지금의 미아리 텍사스와 같은 말이었다. 일제 시대부터 유흥가였던 서울 종로 2가부터 종로3가 지금의 종묘앞까지 거의 1킬로미터에 이르는 일대에 전국 최대의 사창가가 번성하고 있었다.

     

    서울시 주요 직책을 지낸 손정목씨는 저서 <한국도시 60년의 이야기>에서 이 종삼이란 집창촌을 “역전도 유곽자리도 기지촌도 아니라 수도 서울의 중심에서 생겨난 실로 희한한 존재”였다며, “아마도 세계 매춘의 역사에서 종삼만큼 규모가 크고 번창했던 예는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적은 바 있다.

     

    이 종로3가 뒷골목 사창가는 해방 즈음만해도 아주 소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쟁 통에 모든 것을 잃은 여성들이 매춘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50~60년대 급속도로 번창했다. 좁은 골목들이 이어지는 거리 특성상 집들이 ㅁ자나  ㄷ자로 생겼고 방이 여러개여서 방 하나에 매춘 여성 한 명이 자리잡고 장사를 하기 좋아서 이리로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최전성기에는 매춘 여성만 1000명 넘게 이 곳에서 영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거대한 집창촌이 하루 아침에 사라진다. 이 역시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 시장은 김현옥이란 양반이었다. 온 서울을 파헤쳤던 불도저 시장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데, 아마도 김현옥 시장이 한수 더했을 것이다. 서울 시내 산꼭대기에 즐비했던 시민아파트들이 모두 이사람의 작품이다. 

    왜 편한 평지 놔두고 굳이 산꼭대기에 지었냐고? 누군가가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돌아온 답은, “야, 그래야 각하(박정희 대통령)가 보실거 아냐!”였다고 한다. 

     

    김현옥 시장은 군인 출신으로 “까라면 까”로 전 서울을 파헤쳤다. 관급 공사에 처음 공기를 들먹인 시장이기도 하다. 자기 임기내에 무조건 지으라는 것이 김시장의 특기이자 특징이었다. 그 이전 시장들은 그런게 없었다.

    이 무지막지한 김시장이 벌인 일 가운데 그래도 나중에 잘한 것으로 평가되는 거의 유일한 것이 바로 이 종삼 사창가를 없앤 것이다. 그런데 그 사연과 과정이 무척 재미있다.

     

    1968년 9월26일 김시장은 당시 종로에 짓고 있던 세운상가 건설현장을 수행원과 함께 찾아갔다. 그런데 예지동 뒷골목으로 가는 김시장을 왠 여자가 갑자기 튀어나와 붙잡는다. 그리고는 “아저씨 놀다가세요.”라고 호객을 했다. 종삼의 매춘여성이었던 것이다. 

    불도저 김시장은 당시 강한 충격에 크게 분노했었던 것 같다. 그는 그자리에서 종로구청으로 들어가 관계자를 소집했다. 그리고 종삼 소탕작전을 펼치라고 지시했다. 이름도 정했다. 바로 ‘나비작전’.

     

    작전의 전략은 이랬다. 

    -10월1일부터 이 일대를 출입하는 자를 적발해 명단을 공개한다. 

    -포주에 대한 채무관계를 일체 무료화하고 이에 호응하지 않으면 구속한다. 

    전략의 핵심은 매춘여성보다도 매춘하러 오는 이들을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전이 시작됐다. 김현옥이 열받은 바로 그 다음날부터였다.

     

    이튿날인 9월27일부터 한전 직원을 총동원해 종삼 매춘 골목 입구에 밝은 전구를 수도 없이 달았다. 놀러오는 남성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손님이 골목에 들어서면 숨어있던 공무원과 경찰관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름과 주소를 물어댔다. 

    이런 고난을 뚫고 매춘을 하러 올 이들이 있을리 만무한 법. 손님들은 바로 발길을 끊었다. 

    애초 종삼을 소탕하는 데에는 한 달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포주들의 힘과 숫자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이 사창가 소탕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몇년 전 미아리 텍사스 소탕작전이나 최근 장안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찰과 포주들관의 전면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비작전은 단 1주일! 만에 종결됐다. 포주와 여성들은 전국으로 흩어졌고, 종삼이란 단어는 서울시에서 사라졌다. 1968년 1주일 동안의 일이다. 사창가 단속사에 길이 남을 특공작전으로 꼽힌다. 물론 여기서 밀려난 매춘여성들이 미아리며 천호동에 들어가서 새로운 홍등가를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좌우지간 이 나비작전은 김현옥이 얼마나 무지막지함했는지 보여주는 일화인데, 이 작전이 성공한 것은 도심 한복판 집창촌이 바뀌어야 한다는 시대적 공감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은 시인은 소설 <나의 청동시대>에서 “그러므로 종삼의 나비작전은 시장의 결단이 아니라 시대의 다른 단계가 시작된 것을 표항하고 있다”라고 쓰기도 했다.

     

    종삼의 흔적은 이제 표면적으로는 사라졌어도 그 건축적 유전자들은 지금의 이 쪽방촌 건물들에 남아 오늘에도 전해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종삼이란 역사적 과거는 이 일대가 이렇게 낙후된 채로 이어져 온 이유이기도 하다. 

    골목을 나오는 입구에는 좀 번듯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이름도 쪽방이 아니라 ‘게스트하우스’였다. 주머니가 가벼운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쪽방이 업종을 변경한 것이다. 

     


     

    저 쪽방들은 분명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생활 공간일 것이다. 새로운 쪽방인 고시원과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콘크리트 건물로 지은 고시원이라고 해서 저 쪽방들보다 나을 것도 없다. 요즘 고시원들은 코딱지만한 창문조차 없지만 저 쪽방들은 그래도 손바닥만한 창문이라도 있다는 점에서 더 못하다고만은 할 수 없지 않을까.

     

    경운궁 피맛길도 있다-좁디 좁은 골목과 익선동 한옥마을


    건물이 생물처럼 자라면서 작은 창자처럼 꼬일대로 꼬인 쪽방촌 골목을 벗어났다. 이제 익선동으로 향할 차례다. 종로3가역 출구가 있는 비교적 큰 네거리가 있지만 이곳의 동네모양은 복잡하기만 하다. 지번이 복잡하게 쪼개진 탓이었으리라. 정말 묘한 건물도 보인다. 모양만으로는 그 유명한 건축사의 주요건물 ‘플랫 아이언 빌딩’을 연상시키지만, 참으로 난감한 모양새다.


    종로에서 만난 이쑤시개형 빌딩. 유명한 건축물인 미국의 플랫 아이언 빌딩(오른쪽)을 연상시킨다. 플랫 아이언 빌딩은 건물 단면이 다리미처럼 생겼다고 붙은 이름으로, 현대 고층건물의 효시로 꼽힌다.



    이제 길을 건너 익선동과 돈화문로 쪽으로 건너간다. 이 일대는 예전 실개천을 따라 형성된 골목길과 돈화문로 피맛길이 있다. 광화문~종로3가 피맛길이 경복궁으로 향하는 궁중과 고관대작들의 행차를 피하기 위해 형성된 길이라면 이쪽 피맛길은 창경궁과 창덕궁을 오가는 나으리들의 행차를 피햐려고 마련된 길일 것이다. 실제 조신시대 임금들이 이쪽 궁에서 더 오래 생활한 것을 감안하면 이 길이 더욱 서민들이 많이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좁은 골목길이 갈리는 분기점이다.




    사진 저 고깃집 왼쪽 골목이 건천 따라 형성된 골목이고, 오른쪽이 피맛길이다. 우리는 왼쪽 골목으로 향했다. 저 고깃집이 있는 골목 어귀는 저녁이면 샐러리맨들이 부대끼는 곳이다.


    골목 속에선 심심찮게 점집을 볼 수 있다. 점집은 오래 모신 집보다는 새로 모신 집이 ‘점발’이 더 세다고 말하는 법.


     

    좁디 좁은 골목은 절대 차가 다닐 수 없다. 대신 사람들은 골목길을 꾸민다. 화분이며 덩쿨식물이 좁은 골목길에 사람사는 온기를 느끼게 해준다. 

    이 좁은 골목을 따라 끝까지 가면 이제 제법 큰 길이 나온다. 종로세무서 앞 요정 골목. 몇 곳 남은 요정들, 그리고 그 요정 종업원들을 상대하는 맞춤 한복집들, 요정에서 공연을 하면서 형성되었을 악기상과 전통악기 강습소들도 있다. 




    이 요정집들을 지나 서울 시내의 또다른 한옥촌, 세무소 뒷쪽 익선동 한옥마을로 들어간다.

     

    익선동 한옥마을은 전통한옥으로 보존 대상은 아니다. 이 곳 한옥들은 30~40년대 도심 집장사 한옥들이다. 조정구 건축가는 “한옥이 근대 도시에 적응하며 만들어낸 골목과 삶”을 보라고 제안한다.  


    익선동 골목길은 시간이 정지한 곳 같다. 옛 서울시 마크가 선명한 맨홀도 보인다.


    익선동 한옥골목의 집들은 미학적이나 건축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골목의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 골목은 비록 좁아도 다양한 식물들로 예쁘게 꾸미려는 마음씨는 넉넉하다.




    지붕과 지붕이 만나는 곳에는 낙수 홈통을 달았다. 홈통에는 간혹 풀들이 자란다.



     

    길지 않은 익선동 한옥 골목을 헤매다 나오면 멀지 않게 낙원상가가 보인다. 

    낙원상가는 참 묘한 곳이다. 세운상가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지만 세운상가처럼 관심도 못받았고, 또 세운상가처럼 도심의 문제 해결대상으로 연구되지도 않는다. 실제 어떻게 지어졌는지 등등이 알려져있지 않다. 




    그럼에도 낙원상가는 세운상가 못잖게 서울 시민들에게 친숙한 곳이다. 허리우드극장과 돼지국밥 골목이 있는 곳.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최고의 악기 메카다. 그룹사운드를 꿈꾸는 록 지망생이든, 밤무대에서 취기를 돋우는 프로 밴드든, 와이키키 브라더스든 한국의 대중음악인들은 모두 이곳에서 수십년 동안 악기를 사며 음악의 꿈을 키웠다. 

     

    9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여기서 악단 인력시장도 열렸다. 건축노동자 인력시장처럼 새벽에 사람들이 모이면 악단에서 와서 “유성온천 무슨 크럽에서 1달 200만원” 식으로 조건을 부르면 원하는 연주자들이 즉석에서 팀이 꾸려져 지방으로 떠나곤 했다. 서울의 새벽 인력시장이 하나둘 사라졌듯 여기 인력시장도 사라진 지 오래다.

     

    낙원상가는 구조상으로도 묘하다. 길 위 허공에 건물이 떠있고, 길 아래 지하에는 상가가 있다. 낙원상가는 원래 시장이 있던 곳에 지어졌다. 지어진 것은 세운상가와 거의 동시인 1968년이었다. 시장이 있었던 곳에 지어진만큼 지하에는 시장의 축소판인 상가가 들어섰다. 이름도 그대로 낙원시장으로 지금까지 이어진다. 




    낙원시장 상가는 들어가는 길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는 주차장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시장이 됐다. 70년대 지하상가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다. 조용히 순대며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 마시고픈 이라면(물론 대낮에) 한번 들어가 봄직한 곳이라고나 할까.

     

    지하상가에선 아쉽게도 사진을 못찍었다. 찍을 수 있을 때 찍어놔야 하는데 늘 부족하게 남겨놓고 오게 된다. 아쉽지만 이제 낙원상가의 상징인 허리우드극장으로. 예전 사라졌던 극장이 아트영화 전용관 겸 고전영화 전용관으로 돌아왔다.



     

    극장을 오가는 낙원상가 엘리베이터 입구는 예전 그대로다. 물론 속도도 그대로다. 정말 느리다. 4층을 올라가는데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4층에 내리면 갑자기 개방 공간이 있고 아파트동과 극장이 나온다.




    바로 옆 고급 레지던스 빌딩과 대비되는 낙원상가 아파트 건물. 세운상가와 거의 쌍동이다.




    낙원상가에서 내려다 본 인사동. 이 중요한 길목에 들어선 이 건물은 과연 이 장소에 맞는 건축적 미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좋은 디자인일까? 아마 좋은 점수를 주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세운상가 못잖게 중요한 건물인데 정말 전격적으로 들어서 오랜 세월 버티고 있다. 




    아파트 내부로 들어가보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포기하고 허리우드극장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입구쪽으로 내려갔다. 

    좁은 골목에서 강한 냄새를 풍겨대 여성 관객들을 꺼리게 했던 선술집들이다. 문득 1984년 이곳에서 본 <고스트버스터즈>가 떠올랐다. 수도 없이 많은 영화를 이곳 허리우드극장에서 봤는데 왜 이 영화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이제 다시 탑골공원. 거의 다니는 사람이 없는 돌담길이다. 천막 점집들의 길이다. 

    예전 이 담장은 한때 아케이드 건물이었는데 80년대 초반 독립성지인 탑골공원의 위상을 해친다고 철거했다. 잘한 일이긴 하다. 아마 기억 못하는 서울 시민들도 많을 것 같다.

     



    커피 한잔 까지 하면서 탑골공원에서 시작해 쪽방촌, 돈의동과 익선동 골목길들을 굽이굽이 돌아보는데 걸린 시간은 두 시간 남짓. 오랫만에 왔으나 변한 것은 없었다. 아마 서울 시내에서 이렇게 변하지 않는 곳도 없으리라. 개발하기에는 주변이 열악하고, 보존하기에는 아직 역사문화적 가치에 대한 동의가 적은 곳. 그래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만드는 동네다.

     

    아직 이 일대 골목길은 잘 남아있다. 사는 이들은 이곳을 떠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이 일대는 서울이란 도시를, 그 속에 담긴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곳이다. 우리 근현대사를 관통했던 서민들의 삶이 이 속에 있다. 그래서 소중한 곳이다.

     

    문득 정말 좁은 서울의 골목을 만나고 싶다면, 

    조금은 지저분해보여도 골목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다면, 

    서울 한복판에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싶다면

    낙원상가와 탑골공원 일대의 옛 골목길을 돌아보면 어떨까. 


    평생 서민들의 얼굴을 찍었던 사진가 최민식씨는 이렇게 말했다. 서민들의 삶 속에는 “허튼 수작으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게 만드는 절대적인 빛이 있다”고. 종로의 저 오래된 골목에서는 그런 빛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 

     

    PS/ 답사 코스


    댓글 0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