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한국에서 가장 슬픈 나무, 가장 웃기는 나무가 함께 있는 곳 2008/05/20

딸기21 2018. 9. 3. 12:01


 

“남쪽 나무에 이상한 열매가 달렸네.”

재즈의 명곡 <Strange Fruit>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비운의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의 대표곡이자 전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 노래다.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는 늘 슬프지만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정말 슬픔이 뚝뚝 묻어나는 것 같다. 

가사는 계속 이어진다. “이파리에도 뿌리에도 피가 묻었네. 검은 시체들이 남풍속에 흔들리네. 포플러 나무에서 흔들리는 이상한 열매.”

 

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끔찍한 노래라 할만하다. 인종 차별이 여전히 극심했던 1930년대말, 한 흑인 청년이 미국 남부에서 백인들이 흑인을 나무에 매달아 죽인 모습을 보았다. 루이스 알렌이란 그 흑인 청년은 이란 시를 썼고, 이 시가 노래가 되어 빌리 할리데이가 불렀다. 노래는 그 자체로 처절한 고발이 되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흑인의 주검들이 매달린 당시 사진이 있지만 너무 끔찍해 이 그림으로 대체한다.



나무에 매달린 시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다. 인종을 차별하는 야만이 극에 달했던 미국 남부에서나 벌어졌던 이야기라고 여기고 빨리 다른 생각으로 돌리고 싶어지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상한 과일’이 달리는 일이 벌어졌다면? 그런 끔찍한 열매가 열렸던 나무가 실제로 있다면?

 

한국에도 그런 나무가 실제로 있다. 고대 부족국가의 제례의식 때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100여년 전에 벌어진 이야기다. 충남 서산 해미읍성에 있는 회화나무, 지역 사투리로 ‘호야나무’라고 부르는 나무 이야기다.

 

호야나무가 있는 해미읍성은 종교적으로는 천주교 성지이고, 건축적으로는 사적이다. 한 때 전국 곳곳에 있었던 읍성들이 거의 다 사라져 이제 남아있는 몇 안되는 읍성 중 한 곳이 해미읍성이다. 또한 100년 넘게 박해 받았던 천주교인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던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해미읍성 안 감옥에 잡혀갔고, 감옥 앞에 있는 호야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당하며 목숨을 잃었다. 

 



해미읍성은 정문 진남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진남문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너른 벌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저 멀리 홀로 우뚝 솟은 커다란 나무가 보인다. 한옥집을 뒤로 하고 나무가 서있는 모습이 제법 운치가 근사하다. 

 

그러나 나무 뒤에 자리한 저 집은 감옥이었고, 옥에 갇혔던 수많은 신자들이 짐승처럼 끌려가 저 나무에 매달렸다. 오순도순 정겹게만 살아왔을 것 같은 조선시대, 마을 한복판 어르신들이 그늘 아래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을 것만 같은 큼직한 나무에 곤장으로 피범벅이 된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뚝뚝 핏방울을 흘렸다. 

 



지금 보이는 저 감옥은 해미읍성을 복원하면서 다시 지은 것이다. 그 입구에는 왠 보초가 서있다. 진짜 보초가 아니라 플라스틱 모형 포졸이다. 


안으로 들어가보자. 곤장을 때리던 형틀이 마당에 있고, 감옥 모습이 보인다. 또 모형 보초가 서있다. 저 모형을 놓는 바람에 가뜩이나 새로 지어 현실감이 떨어지던 역사의 리얼리티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같은 곳에서도 느끼게 되는 문제인데, 모형으로 당시 벌어졌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은 분명 설명 효과가 확실하다. 동시에 오히려 고정화한 이미지로 주입되는 측면이 있다. 그나마 만듦새가 괜찮은 모형일 때의 이야기다. 저 해미읍성의 모형처럼 굳이 설치 안해도 되는데 억지로 설치한 모형들, 만듦새가 어설픈 모형들은 그런 기능은커녕 분위기를 확실하게 망치는 효과를 낸다. 

 

저같은 허접한 모형이나 인형은 관광지나 역사유적지를 유치하고 싸구려처럼 보이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럼에도 지자체들은 무언가 티를 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저런 것을 설치해댄다. 역사적 장소가 지닌 아우라는 저런 조잡한 보조물 때문에 사라지고 만다.

 



감옥에서 바라보면 담장 바깥으로 우뚝 서있는 호야나무가 왠지 더 음산해 보인다. 감옥에 갇힌 교인들은 바깥 호야 나무에 같이 미사 드리던 신도들이 매달리고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두려움 속에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동료들을 고문하는 소리를 듣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외쳐대는 절규를 듣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동료들이 매달린 저 나무가 저승사자나 야차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호야나무는 사람들에 의해 피를 뒤집어쓰는 나무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당시 천주교인들의 머리를 매달았던 철사줄 자국이 패여 있다. 감옥에 가둔 교인들을 저 나무에 매달기를 무려 90년. 179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100년 가까이 사람을 매달았다. 이곳 해미읍성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이 1866년 병인박해 때에만 1000명이었다. 1000명을 한 해에 죽이려면 세끼 때마다 한 명씩 12달 내내 죽여야 한다.

미국 흑인들에게 벌어졌던 ‘이상한 과일’이 열리는 끔찍한 풍경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종교의 차이만으로 피부색깔도 같은 한 동네 사람들끼리 죽이기를 우리나라에서도 100년 동안 계속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아픔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나무를 바라보는 마음은 처연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 때문에 저주받을 운명을 갖게 된 호야나무 역시 나무에 사무친 원한 탓인지 심한 수난을 겪는다. 1940년대엔 동쪽 가지가 태풍으로 부러졌고, 1969년 다시 가운데 줄기가 태풍에 크게 상처입었다. 이후 나무가 시들고 부분적으로 썩어들어 여러차례 수술을 받고 지금 간신히 보호관리 중이다. 

 

해미읍성 나들이는 저 슬픈 나무를 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픈 사연을 먼저 접하는 부담이 크지만, 그래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풍광과 느낌이 조금이나마 마음을 달래준다. 호야나무와 감옥을 보고 나면 그 다음은 동헌을 볼 차례. 그리고 동현 옆 계단으로 올라가면 읍성 전체에서 유일하게 높은 언덕이 나온다. 언덕 위에는 정자가 있고, 그 뒤로는 전혀 예상못한 또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제법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로 가는 도중, 또다른 뜻밖의 ‘나무’를 만나게 된다. 

전혀 예상못한 모습에 웃게 되고 마는 나무다. 저 나무 도대체 뭐야, 절로 말이 튀어나온다.

 


 

애초에 좀 옆으로 기운 나무가 있었을테고, 아예 그 나무를 저리 만든 것이리라. 물론 볼수록 재미는 있다. 호야나무를 보면서 나무에게 가졌던 무서운 마음이 이 나무로 잠시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무란 곧게 자라야 할 것일텐데 저 나무 역시 운명이 편치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저 웃기는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잠시 쉰 뒤 소나무 숲길을 지나면 다시 너른 벌판이 나온다. 서문 계단으로 성벽 위에 올라가 읍성을 굽어보며 성벽을 거닐어볼 차례다.

 

해미읍성의 성벽은 높이가 5미터에 전체 길이는 1.8킬로미터 정도다. 성벽 전체를 한바퀴 도는 데는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아직도 읍성 안에 주민들이 거주하는 순천 낙안읍성의 오래된 분위기, 그리고 낙안읍성의 널찍한 성벽을 거니는 맛에는 못미치지만 해미읍성 성벽 역시 그 위를 걷는 정취가 매력적이다. 성벽 거닐기는 읍성에서만 즐겨볼 수 있는 재미다. 

 


 

성벽 따라 걸으며 아래를 내려다본다. 너른 벌판이 시원하게 트여 있다. 보기만 해도 좋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기분이 그만이다.

 


 

성벽 위를 20분 쯤 걸었을까, 어느새 진남문으로 되돌왔다. 해미읍성은 쉬엄쉬엄 돌아도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읍성 전체를 돌아볼 수 있다. 무엇을 굳이 보겠다 강박 가질 필요 없이 그냥 돌아보면서 너른 터와 성벽을 느껴주면 된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해미읍성은 폐허가 됐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 안에 있던 동헌과 감옥이 사라진 자리에는 우체국과 학교가 들어섰다. 그러다가 1970년대부터 보수하면서 해미읍성은 거의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이제 그 당시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호야나무는 홀로 그대로 남아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묵묵히 전하고 있다. 

 


 

해미읍성을 구경하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속에 서린 슬픈 역사를 접하는 나들이 길이다. 

때론 슬픔을 만나는 답사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럴 때 한번 해미를 찾아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