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렌즈 같은 눈을 가진 21세기 풍속화가 최호철 2008/03/15

딸기21 2018. 8. 24. 16:44

97년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여의도 서남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그림 <와우산>을 봤다.

온갖 군상들을 잔뜩 집어넣어놓고는 그 속에서 주인공 월리를 찾아야 하는 독특한 숨은 그림 찾기 책 `월리를 찾아라'를 1990년대 대한민국 도시 서민 버전으로 바꿔놓은 것 같았다.

 

최호철 <와우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여러가지 시점에서 본 이미지를 조합한 다시점 그림이다. 초광각 렌즈로 본 것처럼 세상을 재구성하는 것이 최호철씨의 특기다.

그림 안에는 홍대옆 와우산에서 한강쪽으로 내려다보는 각도로 본 서울 서북쪽 전체가 한 폭 안에 기막히게 담겨 있었다. 하도 꼼꼼하게 그림을 그려 정말 대단한 인내심을 가진 작가거나 아니면 편집증적 기질이 있는 작가일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와우산> 왼쪽 아래부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꼼꼼함에 질릴 정도다.


그러나 그 철저한 꼼꼼함이나 기술적 완성도가 중요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림을 보면 너무나 친숙한 이웃들의 모습에 절로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을 전해받으며 이미 마음속에선 결론이 나 있었다. '이 그림, 맘에 드네'라고.

 

그 작가가 최호철(43, 청강문화산업대 교수)였다.

당시 전시장에서 직접 작품을 보기 전에도 그 이름은 전해 들었다. 95년 열렸던 `만화는 살아있다' 전시회에 이 그림을 전시했는데, 정말 괴물처럼 꼼꼼하게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그려리는 작가가 등장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직접 보니 실감이 났다.

 

최호철이란 작가가 자기 이름을 확실하게 미술계에 알린 작품은 <을지로 순환선>이라고 할 수 있다. 95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시카프)에서 선보인 그림이다.

 

최호철, <을지로 순환선> 93년부터 그리기 시작해 95년 처음 선보였고, 2000년에 비로소 완성한 작품이다. 가로길이가 2미터가 넘는 대형 그림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우리는 네모틀로 세상을 보지만 그는 광각렌즈처럼 넓게 세상을 본다.

이 현대판 풍속화는 2호선 열차 안 승객들의 모습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창밖 동네 풍경은 봉천동 고개와 신도림역을 합쳐 작가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커다란 공장, 빈민촌, 다세대주택가, 골목길...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잘디잘게 촘촘히도 그려넣었다.

 

<을지로 순환선> 부분. 셀 수조차 없을만큼 많은 인물이 구석구석 숨어있다. 지하철 열차 안 아저씨와 아줌마 사이 유리창 너머로 버스 운전사 아저씨가 보이고, 다시 그 뒤로 건물 속 사람들 위에 유리창 닦는 아저씨까지 집어넣었다.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최호철은 그저 주변사람들을 그리는 것이 좋고, 그린 그림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좋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야학교사를 하면서 교재를 만화로 그려도보고, 학교 안에서 걸개그림과 벽화도 그리면서 대학을 마친 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보통 사람들 그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그림은 `풍속화'를 닮아갔고, 그림을 나눠주는 것이 좋아 화풍도 복제가 손쉬운 펜화가 됐다.

그러다가 20대 후반 발표한 작품이 바로 위의 <와우산>과 <을지로 순환선>이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만화로 보기도 하고 회화로 보기도 한다. 전태일 열사를 그린 만화책 <태일이>를 펴냈기 때문에 만화계에선 그를 만화가로 본다. 반면 미술관들은 그를 화가로 보고 전시에 초청한다. 정작 본인은 자기 그림의 성격에 무관심하다. 그냥 그림일뿐이란 것이다.

그는 좀처럼 화풍이 변하지 않는다. 더욱 변하지 않는 것은 그가 그리는 소재다. 그는 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만을 그린다. 마치 풍속화같은 서민들의 삶을 정말 꾸준히도 그려왔다.

 

최근 그의 작품들을 모은 책이 나왔다. 대표작을 따서 이름도 <을지로 순환선>이다.

이 책은 최호철이란 작가를 소개하는 첫 책이다.

그가 대학교수고,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었으며, 여러 전시회에 초청받았다고 하지만 사실 그는 대중들에겐 아직 생소한 편이다. 묵묵히 그림만 그려온 탓이다.

그러나 이제 이 책으로 대중들이 그의 작품을 손쉽게 만날 수 있게 됐다.

 

책은 지난 10년간의 주요작들을 모았다. 수록하고 있는 그림 몇 점을 소개한다.

 




그의 작품 <3월의 초등학교 앞>은 정말 3월 초등학교 앞 그대로다. 문방구 앞 오락기에 앉아있는 녀석들, 그리고 교문 뒤에 숨어서 반쯤 얼굴을 내민 녀석, 손주를 기다리는 할머니...

 

다음 그림은 제목은 뭘까?

 



 

처음엔 그냥 골목 풍경이겠거니 했는데 제목을 보니 왠지 가슴이 아파졌다.

제목은 <불황 속 창업>. 요란스런 도우미들의 춤과 음악에 귀를 막는 뒷집 아주머니, 전단지를 거절하는 아저씨, 전단지를 권하는 아저씨까지.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다. 어느 골목이나 새 식당이 들어서고, 망하고, 또 들어서고, 또 망한다. 저 그림속 만두집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 사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그의 그림은 만화처럼 쉽고 부담없이 볼 수 있지만, 그리는 과정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본 것'만 그리기 때문이다. 직접 봐야만 느낄 수 있고 그래야 제대로 이미지 속에 담겨있는 관계를 전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가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 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있다. 바로 이것이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은 스케치북인데, 꼭 저렇게 끈을 달아 어깨에 메고 다닌다. 이제는 노트가 없으면 불안해서 못다닐 정도라고 한다.

 

저 노트를 메고 그는 거리로 나선다. 거리에서 보는 것들을 그리고, 생각나는 것들도 그린다. 취재일지이나 자료집이요, 일기장 겸 오락기라고 할 수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포착했을 페이지를 보자. 재미있게도 잠에 취해 늘어진 학생의 얼굴이 꼭 최 작가를 닮았다.

 



그는 자신이 보고 그린 이미지들을 크로키 노트에서 꺼내 조합하며 작품을 그린다.

그는 직접 본 것들만 그리고, 이미지 뒤에 있는 관계를 전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더욱 현장을 가야만 이미지가 보이고 느낌이 온다고 한다. 매향리며 노근리에 직접 가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게 10여년 그린 노트가 120여권에 이른다. 21세기 풍속화가 최호철은 혼자서 몰래몰래  우리 사는 모습을 노트에 그려 담아 늘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