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가구의 세계

밴쿠버와 왕십리의 공통점은? 2010/02/21

딸기21 2025. 3. 3. 18:26

# 밴쿠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 개스타운, 그곳의 명물
 
한국 빙상 선수들에게 약속의 땅이 되어주고 있는 겨울 올림픽 개최지 밴쿠버. 세계적으로 이름난 항구도시이자 살기 좋은 도시로 늘 꼽히는 이 밴쿠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거리가 개스타운입니다.



개스타운은 밴쿠버란 도시에서 처음 형성된 거리입니다.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가게들, 레스토랑과 술집들이 잘 어울리는 밴쿠버 관광의 1번지입니다. 꽃으로 치장한 가로등이 아주 예쁜 거리로, `세계의 아름다운 거리 베스트' 순위에서 늘 상위권에 오르는 길입니다.
 
이 개스타운 최고의 명물이 바로 이 것입니다.


 
오래된 서양 거리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저 시계탑이 바로 개스타운 최고의 볼거리입니다. 1870년대 개스타운 거리가 정비될 당시 만든 시계탑입니다.
 
예쁘고 잘 만든 시계탑이지만 어떻게 보면 뭐 그리 대단한가 싶기도 합니다. 이 시계탑에는 그러나 다른 시계탑과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지요.



시계탑 머리 부분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풍깁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계탑은 증기로 움직이는 세계 최초의 증기 시계탑입니다. 1875년 이 거리에 들어섰으니 벌써 135살 먹은 노익장입니다.
넓지 않은 거리에 있고 그리 커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높이가 5미터, 무게가 2톤 짜리이니 만만찮은 덩치입니다. 시계를 움직이는 증기 동력은 저 시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2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나옵니다.
 
저렇게 김이 올라오는 때는 정해져 있습니다. 15분 마다 증기를 뿜으며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란... 음 그렇게 웅장하거나 감동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저 모습 하나로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캐나다 밴쿠버의 중요한 관광 자원이라 하겠습니다.


 
저 증기시계탑을 보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첫번째는, 잘 만든 거리 가구 하나가 유명한 문화 유적 못잖은 힘을 지닌다는 점입니다.

거리 가구(스트리트 퍼니처)란 거리에 놓이는 각종 설비들입니다. 그 자체로는 거리의 조연일뿐이지만 거리의 매력을 살리고 죽이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저 증기시계탑처럼 특색있고 잘 만든 거리가구는 거리의 주인공 역할까지 해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는 없는 독특함, 그리고 거리와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지닌 거리가구는 그 자체가 관광자원이란 것을 저 시계탑은 보여줍니다. 세계에 수많은 시계탑이 있고, 그 규모도 대단한 것들이 많지만 저 시계탑처럼 유명하진 않습니다.



두번째는 저 시계탑을 완성하는데 걸린 기간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시계탑을 처음 만든 것은 1875년, 그러나 저 시계탑이 완성된 것은 1977년이었습니다. 무려 102년이 걸린 것입니다.
완성이 늦어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런 세월이 걸렸다는 이야기 자체가 저 시계탑에 나름의 `아우라'와 `이야기'를 더해주었습니다.
 
뭐든지 만드는데 빨리 걸린 것보다는 오래 걸린 것들이 더 눈길을 끄는 법입니다. 100년 훌쩍 넘게 짓고 있는 중인 바르셀로나의 명물인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의 경우 바르셀로나 시는 결코 완성을 서두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부러 천천히 짓고 있습니다. 아직도 짓고 있다는 것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동력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이런 세월 자체가 문화와 관광에서는 돈주고도 못사는 `이야기'가 되어줍니다. 이야기가 깃들어 있느냐 없느냐는 어떤 장소, 어떤 사물이 매력적인 볼거리가 되는데에 결정적 차이를 만듭니다.
밴쿠버의 시계탑은 그런 점에서 거리 가구도 관광 자원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금메달이라 하겠습니다.
 
뭐든지 후딱 지은 것을 자랑으로 삼는 우리 풍토에서는 저 시계탑 하나에도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도시는 뭐든지 쉽게 빠르게 들어서서는 바로 헐리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런 도시는 정상적인 도시가 아닙니다. 도시란 들어설 때는 천천히, 없애거나 용도를 바꿀 때도 신중히 결정할 때 안정감이 생겨나고 고유의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세계 모든 주요 관광 도시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이런 수순을 밟는데 서울을 비롯한 한국 도시들만 때려부수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습니다.
 
# 왕십리, 그곳에도 시계탑이 있었네
 
몇전 전까지만해도 왕십리는 서울에서도 낙후된 지역, 그리고 70~80년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변두리 느낌의 부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자역사가 들어선 뒤 왕십리역 주변은 상전벽해란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크게 바뀌었습니다. 물론 정말 극단적인 상업성이 빚어낸 괴물같은 풍경입니다만 말입니다.
 



이 왕십리역 앞 광장에 있는 거의 유일한 볼거리가 바로 이 시계탑입니다.



이 시계탑은 2008년 9월19일 이 곳에 들어섰습니다. 이름하여 `사랑의 시계탑'입니다.
 
왕십리에 이 시계탑이 생기게 된 것은 서울 성동구가 미국 조지아주 칸 카운티와 자매 결연을 맺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 시계는 미국의 시계 장인이었던 세스 토마스가 1813년 만들었던 시계 디자인을 일렉트릭 타임이아른 시계회사가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모양은 클래식인데 위성 지피에스로 시간을 맞추는 첨단 시계이고, 시계판은 아크릴로 만들었는데 광전지로 밤이 되면 자체 조명을 합니다.

 

 



저 시계탑이 한국, 그것도 왕십리란 곳에 들어선 데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미국 동포인 고 박평님(1924~1988)씨의 가족들이 6만 달러를 들여 저 시계를 기증했다고 합니다. 돌아가신 박평님씨가 서울에서 왕십리에 사셨다고 하네요. 기증자의 뜻이 이 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상징이 되어주길 바랐다고해서 사랑의 시계로 이름붙였다고 합니다.



밴쿠버 개스타운 증기 시계에 비하면 저 왕십리 사랑의 시계는 신생아 수준입니다. 어떤 시계가 더 아름다운지, 저 왕십리 시계가 왕십리에 어울리는지 의견은 여러가지일 겁니다.
그래도 기왕 들어선 시계가 좀더 사랑받기게 되기를, 또 서울 시내에 더욱 개성있으면서도 이야기를 담는 새로운 명물 거리가구들이 늘어나길 기대해봅니다만, 사실 마음은 좀 무겁습니다. 지금 서울시가 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지요.
 
지금이라도 서울시와 각 구청들만 정신차리면 우리도 밴쿠버 증기시계탑 못잖은 우리의 명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작고 아담한 것이라도 시민들이 호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도시의 명물이 되고 한국의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상하고 촌스런 것들이나 새로 만들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저 웃기는 광화문 광장과 금빛 번쩍거리는 시대착오적 동상을 보며 지금 뿌듯해 한다면 뭐 두 손 들고 항복하렵니다. 대신 디자인으로 올림픽을 한다는둥 디자인 수도라는둥 잘한다고 자랑해서 손발이 오그라들게 하지는 말아주시길. 디자인에 수도와 지방이 어디 있으며, 디자인으로 올림픽을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