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가구의 세계

대한민국 최고의 화장실 2010/02/03

딸기21 2025. 1. 1. 15:38

1년에 한번쯤, 종로를 지나다가 갑자기 `발동'하면 이곳으로 불쑥 들어간다. 라파엘 비뇰리가 설계한 독특하지만 정은 안가는 이 건물로 말이다.
 


 
어느새 저 건물이 종로의 상징이 된 지도 십여년이 지났다. 그래도 첨단 하이테크 분위기가 뿜는 포스는 여전히 대단하다. 다만 내 맘에 들지 않을뿐.
대신 건물 앞 개방 공간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죽죽 솟은 잘 생긴 나무로 미니 숲을 만들고 그 사이에 의자를 놓아 사람들이 쉬어가도록 했다. 저 건물이 생길 당시만해도 저런 조경은 그리 흔치 않았다.



잠깐 옆으로 새자면, 이 건물에 대해 굉장히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건물 뒷편 주차장 입구에 올라서있는 묘한 탑에 대해서다. 바로 요 황금탑.



금속빛깔 첨단풍 건물과 누렁 금색탑이 공존하는 모습은 참으로 오묘하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한 희한한 풍경이다. 저 탑의 정체가 궁금하다고 적으니 바로 댓글에서 가르쳐주신다. 최정화 작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인터넷이란 참 대단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저 삼성 종로타워 이야기를 좀 하자면, 많은 분들도 공감하시겠지만 이 독특한 빌딩 최고의 매력포인트는 바로 저 꼭대기의 레스토랑, 그 레스토랑 안의 화장실일 것이다.
33층 탁트인 전망을 제대로 즐기라고 전면을 유리로 한 화장실은 등장 당시 상당한 화제였고, 지금 가봐도 역시나 좋다.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화장실을 배치한 결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훌륭한 결정이었다. 그런 과감함이 명소를 만든다.

이 화장실이 생긴 뒤로 1년에 한번쯤, 종로 거리를 내려다보고 싶을 때 저 화장실에만 올라간다. 혼자서 레스토랑에서 밥 먹을 일이야 없으니 물론 화장실로 직행이다.



종로는 아직까지 높은 빌딩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30층대의 빌딩으로는 SK서린빌딩이 있고 이 종로타워 정도다. 그래서 두 빌딩 높은 층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정말 뛰어나다. 북쪽으로는 경복궁 종묘 창덕궁 등이 코 앞에 펼쳐진다.
이 종로타워 꼭대기 레스토랑 화장실은 그 각도가 좀 아쉬워 백악산쪽 궁궐들 모습을 볼 수 는 없다. 대신 서울의 중심가 종로의 축선을 그대로 내려다볼 수 있다.



위에서 보면 종로는 참 넓은 길이다. 한때 한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삼일빌딩이 오른쪽으로 보이고 왼쪽으로는 푸른 숲이 중간 중간 등장한다. 가장 앞쪽에 있는 숲은 탑골공원, 그 위로 보이는 숲은 종묘, 그리고 맨 위쪽 가장 먼 숲은 바로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다. 얕은 구릉이어서 평소 인식하지 못하지는 위에서 보면 그 모습이 드러난다.
 
저렇게 서울 종로에서 보이는 세 곳의 푸른 숲은 도시에서 녹지대가 얼마나 소중하고, 또한 얼마나 부족한지를 실감하게 한다. 종로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는 아주 작은 녹지대 하나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의 현실이다.



조금 더 줌으로 당겨보면 탑골공원이 가깝게 다가온다. 자세히 보면 중간에 왠 유리집이 있다. 우리의 국보 2호 원각사지 석탑이 하도 공기오염에 시달리는 바람에 저 유리장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조금 더 위쪽으로 시선을 향하면 푸른 숲 속에서 홀로 버티고 있는 종묘 정전의 긴 용마루가 보인다. 한국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이자 가장 위대한 건물로 평가받는 건축물이다.
 
저 푸른 숲의 띠가 북한산에서 내려오다 세운상가에서 막혔다. 세운상가가 철거되면서 남산까지 그 축을 새로 있는 녹지축 개선 사업이 진행된다. 서울시가 엄청난 치적으로 홍보하는 이벤트다.

문제는 대신 그 녹지축 양쪽으로 수십층 빌딩 재개발을 해주는 점인데, 그건 쏙 빼고 알린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 코앞에 거대한 빌딩들이 줄지어서는 것이 과연 녹지축인지는 누가봐도 빤한 립서비스다. 그런 부동산 장사 없이 푸른 숲길이 남산까지 빌딩에 가리지 않고 이어진다면 얼마나 멋질까.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본다. 삼일빌딩이 먼저 들어온다.



한때 삼미, 그리고 산업은행 이름이 붙었던 저 건물은 또 이름표가 바뀐 모양이다.
1970년대, 저 검고 모던한 빌딩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란 자리를 제법 오래 차지했다. 서울의 상징이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이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저 빌딩을 볼 때마다 마음은 편치 않다. 과연 저 건물의 디자인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삼일빌딩 디자인의 특징이자 힘은 모던함이다. 근대 모더니즘 건축의 국제주의 양식을 대표한다. 건물 표면의 장식은 철저하게 없애고 최소한의 표현으로 기하학적 처리를 했다.

저 건물의 원조는 미국에 있다. 바로 이 건물.



그 유명한 미스 반 데어로에의 뉴욕 시그램빌딩이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아니, 차이를 찾기가 힘들다.
두 건물을 동시에 보자.



김중업 같은 거장이 표절을 할 리야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건축이란 원래 다른 장르와 달리 양식과 사조가 있어서 표절을 적용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엇비슷한 한옥 건물들을 보고 표절이라 할 수 있겠는가. 유럽의 비슷비슷한 그리스식 석조 건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삼일빌딩을 보기는 앞서 말했든 편치 않다. 오마주든 한국에 저런 디자인을 보이고 싶었든 간에 저렇게 비슷하게 했다는 점은 참 거시기하다. 미스의 제자인 다른 건축가분의 거의 똑같은 건물들이 따로 서울에 있기도 해서 표면만 보면 쌍둥이인 건물들이 여럿이어서 더욱 씁쓸하다. 물론 내 개인적인 느낌이니 지나친 반격은 사양한다.


 
또다시 얘기가 옆길로 샜다. 
소설가 조경란씨는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에서 저 화장실을 중간에 언급한다. 주인공이 둥근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서울 거리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유리로 만들어진 비행선을 타고 우주를 유람하다가 지나는 길에 잠깐 이곳을 비행하고 있는 거란 느낌에 휩싸이고 있었다." 
동감한다. 나 역시 종로를 지나다 저 곳에 오르면 그런 기분을 느끼곤 한다.

저 화장실이 등장한 지도 제법 지나면서 저기보다 더 `럭셔리'하고 더 `간지'나는 화장실은 수두룩해졌다. 그러나 저 화장실처럼 전망 좋은 화장실은 아직 없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아직은 이 화장실을 최고로 치고 싶다.

그래도 어떻게 남의 식당에 식사도 안하며 레스토랑에 들어가냐고?
다행히 저 화장실은 레스토랑 안이 아니라 바로 입구에 있다. 들어가는데 눈치 안봐도 된다.

서울에서 5분만 탈출해 거리를 내려다볼 곳이 또 어디 있으랴. 그곳이 화장실이라면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