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친해지기

올겨울 놓치지 말아야할 전시가 있다면 2010/01/30

딸기21 2023. 9. 1. 19:17

다른 이들도 그랬겠듯, 나 역시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이 작품 사진을 보고 바로 그의 팬이 되었다.

 

 

뭐랄까, 정말 말 없이 사람을 빨아들이는 얼굴이었다. <지원의 얼굴>이란 작품 제목과 권진규란 작가의 이름이 그냥 뇌리에 박혀버렸다.
 
감수성 예민한 10대 고등학생이었기에 더욱 저 작품에 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에 저 작품 사진을 봐도 늘 똑같은 울림이 느껴졌다. 언제나 조각가는 권진규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자코메티를 봐도, 로댕을, 부르델을 봐도 권진규처럼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진 않았다.
 
나중에 이 작가가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알았다. 교과서에 작품이 실렸으니 최고로 인정받으며 성공한 작가였으리라 막연하게 추측했는데, 그에 대해 나온 글들은 권진규를 `비운의 천재' `비극의 주인공'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에게는 재미있는 이력도 있었다. 그가 이 영화와 인연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더 재미있기도 했다.

 

 

일본 대중문화 최고의 아이콘 중 하나인 `고지라'다. 
권진규는 1950년대에 나온 <고지라의 역습> 영화에 참여해 배경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일본 시절의 `알바'였던 것인데, 당시 고지라 영화가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나온 엘리트에게 작업을 맡겼을 정도란 점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우리의 권진규가 고지라에 한몫 힘을 보탰다는 점이 더 놀라웠지만.
이후 권진규란 이름을 마주치면 <지원의 얼굴>과 <고지라>를 동시에 떠올리며 그 기묘한 조합에 혼자 웃음짓곤 한다.
 
올 겨울 덕수궁미술관에서 2월28일까지 열리는 권진규전을 보면서 처음 미술이란 것에 관심이 생기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봤다. 그리고 진품도 아닌 교과서 속 사진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나를 사로잡았던 권진규의 힘을 새삼 떠올려봤다. 
 
이번 전시회는 권진규에 대해 처음으로 `제대로' 열리는 전시회라 할 수 있다. 그의 일본 시절 남긴 작품들이 국내에 첫선을 보이는 등 거의 중요한 모든 작품이 다 포함됐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작품은 역시나 <지원의 얼굴>일 것이다.

 

 

이 지원의 얼굴 하나만으로도 이 전시회를 행복하게 봤다는 분들도 많았다. 그만큰 인기있고, 앞으로도 계속 한국 조각사의 걸작으로 남을 작품이 틀림없다. 특히 다른 <지원의 얼굴>도 함께 전시되어 비교해볼 수 있어 좋았다.

 

 

<지원의 얼굴>은 현재 확인된 것이 모두 6개다. 제자 장지원을 모델로 한 이 작품을 권진규는 여러 번 만들었다. 흙으로 구운 재질감이 표정에 깊이를 더해 오묘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그 분위기는 작품마다 다르면서도 같다.
 
권진규는 여성 얼굴에 매혹되었던 작가였다. 그런데 그가 좋아했던 얼굴들은 공통점이 있다. 얼굴 폭이 좁고 얼굴의 들어가고 나온 부분들이 도드라진 모습들이다.


다른 작품 <애자>도 보자.

 

 

권진규는 자의식이 유달리 강했던 예술가였다. 자기 자신을 그처럼 열심히 작품 주제로 한 이도 없었다. 자기 얼굴을 빚은 수많은 `자소상'들을 보면 저 먼 곳을 향해 세상을 초월한 예술가의 모습이 느껴진다.

 

 

1967년작인 자소상이다. 그의 자소상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일 듯하다. 머리카락도 눈썹도 사라졌다. 그리고 강인한 표정이 남았다.

 

 

이번에는 붉은 가사를 걸친 자소상이다. 그의 자소상 중에서도 이 자소상은 특별하다. 생김새도 특별하지만, 창조자인 권진규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자소상 바로 이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작품은 고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1973년 5월, 권진규는 자기 자신을 담아 만든 이 작품을 보고 돌아와 서울 성북구 동선동 자기 작업실에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저 작품속 자기 얼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괴롭힌 수전증 때문에 목숨을 끊었던 것일까? 왜 목숨을 끊었는지 아무런 이야기도 남기지 않은 작가처럼 저 자소상의 입술은 단호하게 닫혀 있다.
 
그는 동선동 아틀리에에 있던 작품들을 모두 자기를 보도록 돌려 놓고 그 가운데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자기 분신들이 자기를 보게 작품을 하나 하나 가져다 놓는 그 심정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는 참 독한 이였던 모양이다.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그리고 철사로 목을 매었다는 점도 참 놀라웠다. 작가들에게 철사란 실과 같지만, 그래도 마지막 육신에 더해질 고통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다.
 
전시회에 맞춰 권진규의 동선동 아틀리에도 요즘 관람 신청자에 한해 개방하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 가봐야지 하고 벼르던 그 곳에 처음으로 가봤다. 

 

 

권진규는 1959년 일본에서 돌아와 197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곳에서 작업을 했다. 14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보석같은 작품들이 이 곳에서 탄생했다. 지금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권진규의 작업실이 보존되고 있고, 작가들의 작업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외관은 새로 고쳐 오래된 맛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쉽지만, 내부는 당시 모습을 비교적 잘 보여준다.
 
저 입구의 문은 2개인데, 오른쪽 문으로 드나들 수 있다. 왼쪽 문은 권진규가 작업실로 바로 가는 문으로, 권진규만 드나들던 문이란 의미에서 늘 잠가 놓고 있다고 한다.

 

 

마당은 추운 날씨에 꽁꽁 얼어있었다. 왼쪽 구석으로 작업실 입구가 있다.

 

 

저 좁은 문 안으로 들어가면 드디어 권진규의 공간이다.

 

 

키 큰 작품들을 만들 수 있도록 천장을 높게 한 작업실은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난방이 제대로 될 리 없는 옛날집 특유의 한기가 겨울에 대단했을리라. 그의 대표작들을 전시하고 있고, 가마 옆에는 벽에 영상물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가마.

 

 

권진규가 한국 조각사에 남긴 족적이 바로 `테라코타'란 기법으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지만 그래서 더 감성적인 테라코타를 그처럼 잘 다뤘던 달인도 없었다. 저 작고 초라한 가마에서 그렇게 놀라운 작품이 나왔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벽의 메모들. 전화 번호 국번이 두자리인 점, 지금은 세종대가 된 수도사대란 이름을 보면 연대를 짐작케 한다.
 
저 작업실로 들어가기 전 조그만 문이 하나 있다. 권진규가 기거하던 단칸방이다.

 

 

직접 가본 권진규의 아틀리에는 예상 이상으로 작고 초라했다. 그 속에서 홀라 작품에만 파고들었던 그의 모습과, 무엇때문인지는 몰라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그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권진규의 작품말고 인생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엇갈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에 오히려 대중들은 열광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가 살아 생전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가 사후 꽃을 피웠다고 보면서 언론은 그를 `비운의 천재'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반면 이번 전시회를 준비한 학예사를 비롯한 연구자들 중에선 그가 생전에도 상당한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결코 `비운의 작가'였던 것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대중적 호기심을 덧씌운 가공의 이미지를 벗어내야 진정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대중들은 그가 고흐처럼 비극속에서 예술혼을 꽃피운 작가, 기구한 운명의 작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순교자 같은 작가로 기억하려 할 것이다.
 
그의 운명이 실제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작업실을 보면서 잠시 예술과 인생, 운명 같은 무거운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물었던 그는 자기 운명에 대한 답을 얻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답을 찾지 못해 저 세상으로 가려했던 것일까.
 
비록 이 어려운 질문에 답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권진규가 작품을 주무르고 굽던 곳을 직접 방문할 수 있어 잠시나마 행복했다. 올 겨울 최고의 전시는, 누가 뭐래도 내겐 권진규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