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서울에 숨어있는 또다른 궁-진짜 잘생긴 한옥 2008/11/29

딸기21 2018. 9. 14. 15:27

시멘트 덩어리 도시 속에서 전통의 느낌을 접해보고 싶을 때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 인사동과 가회동 일대다. 그러면 이 전통 문화의 지역에서 제대로 된 조선시대 한옥을 보고 싶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사실 인사동에는 옛 건물은 거의 없다. 요즘엔 오히려 새로 지은 모던한 건물들을 보러갈만한 곳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북촌 가회동 한옥마을도 따져보면 좋은 한옥은 적다. 가회동의 오래된 한옥들은 실은 20세기 초반 지은 집장사 한옥들이다. 여기에 최근 지은 한옥들이 섞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진짜 잘 생긴 한옥, 제대로 된 한옥이 딱 한 곳 남아 있다. 조선시대 최고 세도가의 집, 그래서 제대로 멋을 부린 최고급 저택이다. 그것도 인사동과 가회동 중간이어서 아주 찾아가기 쉽다. 바로 운현궁이다.


뜻밖에도 인사동이나 가회동을 찾아 거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운현궁에 가본 사람들은 아주 많은 편이 아니다. 운현동은 지하철 안국역 부근, 낙원상가의 뒤편에 운현궁이 있다. 고층 빌딩 숲속에 홀로 남아있어 더욱 빛이나는 한옥이다.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그리고 덕수궁(옛 경운궁)이 있다. 그리고 궁궐은 아니지만 운현궁이 있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집이다. 대원군이 누군가. 왕족이었고 훗날 왕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그 집이 얼마나 좋았겠는가. 당연히 운현궁은 좋을 수 밖에 없다. 


운현궁은 원래 궁은 아니었다. 나중 고종이 왕이 되면서 궁이 되었다.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운현궁에서 태어나 열 두살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그럼 궁은 뭔가? ‘임금이 사는 집’이다.

궁궐은? 궐은 궁 앞에 방어를 목적으로 세운 탑처럼 높은 누각이다.

운현궁은 잠저였으므로 궁이 되었다.

잠저는? 세자가 아닌데 왕이 된 임금이 왕 되기전 살던 집이란 뜻이다. 


그럼 운현궁으로 들어가보자. 들어가보는데는 돈이 든다. 단돈 700원. 700원이면 조선 한옥의 아름다움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 단, 월요일은 쉰다.


700원을 내고 들어가면 바로 저 위 풍경이 나온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너른 마당이 나오고 예쁜 담장이 보인다.




여기 살던 고종이 왕이 되었으니 그냥 평범한 한옥처럼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은 아들이지만 실제 나라를 운영한 이는 왕의 아버지 대원군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당연히 저 운현궁을 근사하게 고쳤다. 고종이 왕에 즉위한 것은 1863년. 운현궁은 그 다음해부터 멋드러지게 고치기 시작해 거의 10년에 걸쳐 고치고 건물을 새로 지었다.


한옥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으로 담을 꼽는 분들이 많다. 운현궁은 담이 좋은 건물이다.


우리나라 담은 사람 키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궁궐처럼 중요한 곳은 물론 높게 담을 쌓았지만 대부분은 발을 쫑긋 세우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높이로 했다. 운현궁은 원래 궁이 아니었으니 담이 높지는 않다. 대신 예쁘게 꽃담으로 꾸몄다.


우리 전통건축의 매력포인트 중 하나인 꽃담은 꽃무늬가 있는 담이 아니라 벽돌로 무늬를 넣은 담이다. 이 꽃담이 가장 발달한 곳은 당연히 궁궐이다. 경복궁 자경전 꽃담이나 창덕궁 낙선재 꽃담이 유명하다. 특히 왕실 여성이 기거하는 건물에 꽃담을 많이 했다. 서원 중에서는 돈암서원 꽃담이 유명하다. 보통 집들은 기와조각으로 멋을 냈다.


꽃담은 마주 봐도 이쁘지만 옆으로 보면 또 다른 멋이 있다.




수복강녕 무늬가 새겨진 붉은 장식벽돌 꽃담과 검은색 장식벽돌 꽃담이 이어져 서로 다른 분위기를 낸다.




담 구경을 했으면 이제 안으로 들어가볼 차례.

오른쪽 솟을대문으로 들어가면 먼저 노안당이 나온다. 


운현궁에 지금 남아있는 건물들은 모두 노(老)자가 들어간다.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이다. 그리고 이 건물들은 모두 다른 한옥 건물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든 ‘보첨’을 달아놓았다. 보첨은 처마 끝에 단 나무 판자로 날씨에 따라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다.




저 노안당은 현판 글씨가 일품이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하지만 추사가 직접 쓴 것은 아니고 추사의 작품 중에서 글자를 모아 만든 것이다.

추사의 홀동 시기와 맞물려 추사가 썼다는 이야기도 많았는데 노안당을 지은 것이 추사가 세상을 떠난 뒤므로 모두 소문일 뿐.




저 노안당이 운현궁의 사랑채에 해당한다. 대원군이 정치를 펼치던 곳이었다. 당시 조선의 정치인들 그리고 외국인들은 모두 여기서 최고권력자인 대원군을 만났다고 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대원군이 눈을 감은 곳도 이곳 노안당이었다.


노안당 다음은 노락당 차례다.




노락당 현판은 추사 글씨가 아니라 신헌의 글씨다. 그럼 노락당 건물을 보자.




저 노락당에서 보면 바로 옆에 지은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보인다. 운현궁 한옥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모습이 묘하다.




저 노락당에서 고종이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고종은 15살. 명성황후는? 16살. 옛날은 옛날. 


노락당을 지나면 이로당이다.




이로당은 운현궁의 안채다. 명성황후도 이곳에서 법도를 익혔다고 한다. 왼쪽 건물에서 복도가 건물로 이어져 노락당과 이어지는 모습이 독특하고 멋지다.


사진 오른쪽 건물 입구쪽에는 이런 커다란 물담는 돌이 있다.




운하연지라고 써있다. 오른쪽에는 요거석이 있다.


요거석? 뭔지 맞춰보시라.


요거석은 한자로 燎炬石이다. 요자와 거자에 모두 ‘불 화’ 변이 들어간다. 둘다 횃불이란 뜻이다. 횃불 요, 횃불 거, 돌 석. 횃불 받침돌이다.




마침 찾아갔을 때에는 이로당에서 예절교실이 열릴 참이었다.




그러면 이제 운현궁이 감춰놓고 있는 또다른 멋진 장면으로 넘어간다. 바로 건물 뒷쪽이다. 운현궁에 가면 꼭 뒷쪽으로 한바퀴를 돌아 구경해야 한다.




짙은 나무색과 화강암이 이루는 대비, 기하학적인 창살 무늬들... 그리고 벽돌 굴뚝.




굴뚝에 살짝 내려앉은 낙엽.




운현궁은 구석구석 공간들이 모두 눈길을 끈다.




운현궁은 조선 말기 진짜 세도가의 집을 구경할 수 있다.




경복궁도 봤고, 창덕궁도 봤고, 종묘도 봤다면 운현궁을 권한다. 잘 지은 한옥, 잘 생긴 한옥, 폼나는 한옥이 운현궁이다. 종로 한복판에서 문득 시간이 났다면, 혼자 거닐고 싶다면 운현궁만한 곳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