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대통령 각하와 아파트의 씁쓸한 추억-마지막 시민아파트에 가다 2008/12/16

딸기21 2018. 9. 14. 15:32

지금 30대 이상들에게 ‘시민아파트’는 아직 기억 속에 생생할 것이다. 이름 그대로 서울 시민들을 위한 아파트였으나, 결국은 잘 못사는 시민들의 아파트가 되어버린 70~90년대 개발독재기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바로 시민아파트다.

 

서울의 시민아파트는 한때 400여곳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 단 한곳만 남았다. 남산 기슭 회현시민아파트, 또는 회현시범아파트다.

 


 

지하철 4호선 회현역에서 남산쪽으로 올라가면 거의 남산길쯤 이르러 회현시민아파트가 나온다. 1970년에 지어 올해로 꼭 38년된, 생각보다는 아주 오래되지 않은 아파트다. 그러나 그 모양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세월의 흔적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시민아파트는 개발독재기의 우울함과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살아있는 화석 건물이다. 이 회현시범아파트는 요즘 사진촬영의 명소로 꼽힌다. 음울하고 지저분한, 그러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간직한 탓이다. 그 분위기 덕에 영화 <친절한 금자씨> 등에도 출연했다.


얼마전 <한겨레>에서 이 시민아파트 기사를 보고서 묘한 상념에 빠져 회현아파트에 찾아가봤다. 한때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그 시민아파트를 남산 중턱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홍제동 우리 집 뒷산에는 시민 아파트 한 채가 랜드마크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시민아파트는 그러나 우리 동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옆동네에 가보니 인왕아파트가 있었고, 뒷산을 넘어가니 금화시민아파트가 있었다. 중학교를 배정받아 가보니 뒷편 인왕산 중턱에 청운시민아파트가 학교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아파트들을 보며 왜 저렇게 시민아파트들은 사는 사람들 불편하게 높은 산중턱에 지었는지, 그리고 한결같이 지저분한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평지에 있는 것은 인왕아파트말고 본 적이 없었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었던 금화시민아파트. 작가 정재호씨 사진



국민학생 시절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김현옥이란 사람이 저렇게 한 것”이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이상한 불도저 같은 서울시장이어서 온 서울을 두들겨 엎고, 온 산 중턱에 저런 아파트를 지어댔다”는 설명에서 김시장에 대한 비난을 읽을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산위에 버티고 있을 것 같았던 시민아파트들은 90년대 이후 하나 하나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 때 궁금했던 의문의 해답도 찾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높은 산위에 지어 사람들 힘들게 했는지 말이다. 지금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못할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이유였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주요 인물이었던 군인 출신 김현옥 시장이 서울 시장으로 취임해 벌인 대형 사업이 바로 시민아파트 건설이었다. 모두 400여개의 시민아파트를 집중적으로 지었는데, 그 첫번째가 바로 금화시민아파트였다. 지금 독립문 부근, 금화터널이 뚫린 금화산(105미터) 중턱에 19채가 들어선 것이 최초의 시민아파트다. 1968년의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독립문 네거리 금화산이었을까?


김현옥 시장은 미친듯이 온 서울을 파헤치고 다니는 것 못잖게 자기 업적을 홍보하는데 집착한 시장이었다. 온갖 홍보 이벤트로 행정을 알리는데 그야말로 환장을 했었다고 한다. 가장 집착한 사업은 도로 개설과 정비로, 박정희 대통령이 오가는 길목에 공사를 벌이고 현장에 나가 지휘하면서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지 알리는데 모든 것을 걸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첫 시민아파트를 이 산 중턱에 세웠을 때 당연히 서울시 간부들은 “너무 높은 곳에 지으면 시민들이 불편하다”고 말렸다. 그러자 김 시장은 버럭 소리질렀다고 한다. “그래야 각하가 보실 것 아냐, 이 XX들아!”라고.

 

군 출신 시장이어서 시청 공무원들을 졸개 다루듯 욕설을 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절이었다. 자기 만족과 박정희에 대한 충성용으로 서울시 업무를 밀어붙였던 김시장에게 시민들이 높은 산을 오르내리느라 고생할 것은 신경쓸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 지금의 새로 지은 청와대 이전 청와대 건물에선 바로 이 금화산 중턱의 시민아파트가 보였다고 한다. 


그러면 다른 아파트들은 또 왜 저렇게 높이 지었단 말인가. 한때 남산의 풍치를 정면으로 가려 욕만 바가지로 먹고 폭파된 남산 외인아파트가 절로 떠오른다. 주택공사가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시공력을 보여주자고 그 높은 곳에 미관을 해치며 지었던 것이 바로 남산 외인아파트였다. 그런 발상을 서슴지 않았던 시대였다. 군사독재라는 것은 참 말도 안되는 풍경과 습속을 우리에게 남겼다. 

 

김현옥은 실제 신이 날만 했었을 것이다. 저 금화시민아파트의 완공에 천하의 박정희 대통령이 몸소 등장하셨으니 말이다. 완공식 사진이다. 

 

첫 시민아파트였던 금화시민아파트를 시찰온 박정희 대통령 일행의 모습.

 

김현옥은 서울시장을 4년 동안 지내다가 갑자기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는데 그게 바로 시민아파트 때문이었다. 저렇게 높은 산허리에다가 마구 건물을 지어댄 결과였다. 바로 이 아파트가 김현옥을 물러나게 했다.

 



서울의 또다른 산, 홍대 부근 와우산에 지어졌던 와우아파트다.

이 와우아파트는 1970년 4월 그만 이렇게 되어버리고 만다.



 

바로 그 유명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다. 

도대체 지은 지 얼마만에 무너진 것일까? 놀랍게도 준공 4달 만이었다. 

저 말도 안되는 시민아파트가 33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잡아먹은 것이다. 

삼풍백화점 붕괴나 성수대교 못잖은 7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개망신이었다.


당연히 시장은 물러나야 했다. 건설외에는 아는 것도 없고 건설이 모든 것을 해준다고 믿는 지금의 모씨를 연상케하는 토건주의자의 원조, 김현옥은 그렇게 온 서울을 파헤친 뒤 물러났다. 어떤 이들은 그를 풍운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황당한 철학이 남긴 유무형의 부작용은 실로 적지 않다. 


좌우지간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뒤에 저 회현시민아파트는 지어졌다. 한쪽에서 아파트가 무너져도 이미 또다른 쪽에선 공사들이 진행중이었으니 계획대로 들어선 것이다. 다행히 와우의 충격 덕에 훨씬 튼튼하게 지었고 그래서 지금도 잘 버티고 서있었다.

그럼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한번 둘러보자.

 


 

회현시민아파트는 무척 가파른 경사지에 지어 뒤편에는 중간에 저런 진입 다리가 있다. 10층 건물이나 엘리베이터는 없다. 저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각종 화분들로 꾸민 구석진 공간이 보인다. 지금은 화분에 식물들이 없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다른 모습들.

 


 

입구 계단으로 할머니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넓게 만든 계단을 다시 손본 모양새가 인상적이다. 저소득층 지역은 사는 이들이 직접 시멘트로 만들어 붙인 다양한 건축적 장치들이 많다. 필요에 따라 덧붙이고 고친 아이디어들이 눈길을 끈다.




보는 것은 참 묘한 감각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렇게 지저분하고 칙칙한가 싶지만, 한 4~5분만 거닐어보면 금세 익숙해진다. 

 

그러나 저 시민아파트들의 모습은 그래도 끝내 완전히 익숙해지기는 어려운 강한 충격을 준다. 그 모습은 한 시대의 상징적 음화다. 요즘 사진애호가들이 이 회현아파트를 즐겨 찾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강한 시각적 충격은 동시에 묘한 미학적 힘을 지닌다. 

저 시민아파트를 자기 예술의 주제로 삼은 작가도 있다. 동양화가 정재호씨다. 





회현아파트를 돌아보고 털래털래 내려오는데 잠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했다.

이제 혼자 남아버린 탓에 저 아파트는 묘한 문화적 의미를 지니게 됐다. 그러나 그런 의미를 지니는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철거가 예정된 탓이다. 여러가지 문제로 곧 없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사라지기 전에 왠지 꼭 보아두어야 할 것 같았다.




끝으로 회현아파트의 밤모습을 찍은 <한겨레> 강창광 기자의 사진을 소개한다. 밤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