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 탐험하기

우리에겐 거북한, 하지만 산책길로는 최고인 메이지진구 2007/06/26

딸기21 2018. 6. 11. 14:49

이달 초에 일본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일본어라곤 가나조차 못읽다보니 당연히 통역분의 도움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한겨레21> 전문위원으로 일본 소식을 전해주시는 황자혜씨가 통역을 맡아 도와주셨습니다.


황 위원 덕분에 인터뷰를 잘 마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해질녘 하라주쿠 부근이었는데, 황위원이 도쿄에서 어디를 가보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건축과 조경에 관심이 많다고 답했더니, 황 위원이 바로 부근에 그런 곳이 있다며 한번 가보지 않겠냐고 추천을 해주셨습니다. 


황 위원이 추천한 ‘그곳’은 바로 ‘메이지진구’(明治神宮)이었습니다. 황 위원은 “일본의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민의 입장에서 일본의 잘 가꾼 도심 산책길로 메이지진구만한 곳이 없다”고 추천했습니다. 신사란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던 터였고, 무엇보다도 일본통께서 추천하시는 곳이니 흔쾌히 제안에 따라 진구로 향했습니다.


메이지진구는 지명도(?)에 비해 무척 아담하고 귀여운 하라주쿠역 바로 뒤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널찍한 다리를 건너자 바로 진구 입구가 나타났습니다. 이미 가볼만한 분들 다 다녀오셨겠지만 촌놈이 뒤늦게 다녀온 김에 포스팅해봅니다.



일본의 전통 조형물인 도리이는 보통 빨갛게 칠한 것들이 많은데 메이지진구 도리이들은 색깔을 입히지 않고 나무색 그대로 살렸습니다. 신사 입구 역할을 주로 하는 도리이(鳥居)는 하늘 天자를 본떴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저 도리이들을 보면 ‘하늘 천’자 보다는 일본돈 엔화가 더 떠오릅니다.


황 위원 말대로 메이지진구는 산책코스로는 정말 최고였습니다. 잘 가꾼 숲길이 눈과 허파를 모두 씻어주는 듯했습니다. 해질녘이어서 더욱 한적했고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었습니다. 최고 번화가 바로 옆에 이렇게 멋진 숲길이 있다는게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길 바닥에는 잔 돌을 깔아놓은 것도 독특했습니다. 눈으로는 숲을 귀로는 밟을 때마다 나는 소리를 들으며 공감각적으로 시공간을 즐기도록 한 구상이 교묘했습니다.



첫 도리이를 지나니 다시 커다란 도리이가 또 나옵니다. 사람 크기하고 비교해보시죠.



숲길을 따라가 주욱 걸어가니 메이지진구 본채가 나옵니다. 진구 바로 앞에는 돌로 만든 샘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마실 물을 떠먹는 약수터겠거니 하겠지만 일본 신사 앞에 있는 이런 돌샘은 손씻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천황에게 경건하게 손씻고 들어가라는 것인데 왜왕에게 경배할 일 없으니 당연히 그냥 통과.



자, 이제 신궁 본관(?)입니다. 앞에 심은 두 그루의 나무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각각 메이지 일왕 부부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정면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합니다. 양쪽 옆에서 살짝 비껴찍는 것은 괜찮답니다. 왜 그런 것인지 궁금해 돌아와서 알아본다고 하곤 까맣게 잊어버렸군요.


이 건물은 1920년에 지었는데 2차대전 당시 불타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건축과 디자인에 관심 많은 저로서는 구석 구석 꾸밈새가 흥미로웠습니다. 각종 시설물들도 모두 일본 건축 디자인에 맞춰 잘 어울리면서도 튀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궁궐이나 유명 건축물을 방문하면 건물들의 멋진 분위기와는 전혀 맞지 않는 시설들, 예를 들어 거의 오렌지빛으로 번쩍거리는 가로등이라든지, 번쩍거리는 금속제 시설 같은,을 배치해 눈에 거슬리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더군요. 메이지진구의 가로등이나 전등들도 건물과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었습니다. 



진구 앞 마당에는 일본 사람들이 소원을 적는 전통 부적 같은 ‘에마’(그림말)를 붙이는 곳이 있습니다. 사람 수만큼의 소원이 걸려 제 주인들의 바람을 대신 전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소원들을 적었을까, 일본말도 모르면서 한번 구경을 했습니다. 얼추 한자로 짐작해보니 가족의 행복, 장남의 시험 합격, 아버지 건강 등 누구나 빌만한 소원들이 역시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보니 한국 관광객들이 적어 건 소원들도 아주 많더군요. 무척이나 민족주의적인 저로서는 ‘어떻게 왜왕에게 소원을 빌 수 있냐’는 생각이지만, 그래도 다른 분들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잠깐 화면으로 소개하지요.



가장 눈에 뜨이는 소원은 역시 ‘독도는 우리땅’이었습니다. ‘여자친구 만들어달라’는 젊은 청춘스러운 소원도 있었습니다.



뉘엿뉘엿 돌아보다 보니 짧은 저녁해가 벌써 색깔이 달라졌습니다. 나오는 길, 매점 아가씨들이 앞을 지나갑니다. 차림새는 전통 의상인데 재잘대는 모습은 역시 발랄한 처녀들입니다.



메이지진구를 나오면서 이런 빼어난 숲 하나만으로도 도쿄가 샘났습니다. 일본 때문에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에 이런 좋은 공간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 심사가 잠깐 불편했습니다. 



가정집 마당 하나 가꾸는데도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도심 속 공원이나 정원은 제대로 가꾸는데 수십년은 기본입니다. 우리나라 도시들은 그동안 전후 폐허를 딛고 바쁘게 성장하다보니 이처럼 허파가 될만한 숲이나 공원을 제대로 만들 틈이 없었습니다. 최근에야 비로소 이런 곳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입니다. 앞으로 10년, 20년, 그리고 30년 뒤 대한민국 곳곳에 아름다운 숲길이 시민들을 반겨주고 있으리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