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준 기자

‘땅콩집 이웃’ 구본준 기자를 보내며 2014-11-19

딸기21 2018. 6. 5. 17:56

“당신 같은 건축가는 처음 봤어요. 푸하하하”

만난지 30분쯤 지났을 때 그는 기어이 웃고 말았다. 예의 그 사람 좋은 표정 속에 환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는 내 어깨를 쳤다. 한 살 위의 그였지만 그 순간 구본준과 나는 친구가 되었고, 이내 단짝이 되었다.

그와 친구가 된 건 2007년. 병아리 건축가이자 새신랑이었던 나는 경기도 용인 죽전에 실험적인 집을 지어 살고 있었다. 모바일 하우스. 결과는 실패였다. 겨울이 되자 과장이 아니라 정말 추워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자야 했고 집사람은 매일 당신 건축가 맞느냐고 울며 타박이었다.

경기도 용인에 함께 지은 ‘땅콩집’ 앞에서 지난 3월 건축가 이현욱(오른쪽)씨의 생일날 고 구본준(왼쪽) 기자와 찍은 기념사진.


그때 구본준을 만났다. 얼어 죽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자기 실패담을 순순히 이야기 하는 건축가는 처음 봤다”며 즐거워했다. 내가 근무하던 건축가 김원 선생의 광장건축을 매개로 얼굴은 아는 사이였지만 서로 길게 이야기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문화부 기자와 젊은 건축가는 친구가 되었다. 실패한 이야기를 안주로.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실패한 이야기, 부끄러운 이야기, 작은 욕망, 슬프지만 다시 일어나는 용기를 주는 스토리,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렇게 살았다. 그는 생활과 욕심에 지치고 겁먹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이렇게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니 꼭 성공할 거야”라고 웃으며 격려해줬다. 건축가로서의 삶에 자신을 잃어가던 때였다. 감히 말하건대 그때 구본준의 격려가 없었다면 오늘날 건축가 이현욱은 없다.

그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건축에 대한 열망과 성공에 대한 의지는 충만한 젊은 나였지만, 뭐하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옆에는 구본준이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그는 절대 근거없는 낙관론을 펼치는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매사 신중론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하는 격려는 큰 힘이 되었다. 그래 구본준이 잘한다는데, 구본준이 힘내라는데 잘 되겠지. 어디 나뿐이었겠는가. 나는 나처럼 그로 인해 삶에 기운을 얻은 사람을 적어도 20명을 꼽을 수는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줄담배 속에 “잘 될 거야”라고 말해주던 그가 지금도 내 옆에 있는 것 같다.

나를 건축가로서 유명하게 만든 ‘땅콩집’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잘 못하는 우리 둘은 만나면 여러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긴 시간 수다를 떨었다. 돌이켜보건대 만약 누군가 옆에서 들었다면 미친놈들이라고 비웃었을만한 온갖 이야기를 우리는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나는 정말 건축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아니 건축도 잘 몰랐다. 하지만 건축에 미쳐 있었다. 건축밖에 모르고 건축에 미쳐있는 나에게 많은 문화적 양식을 건네준 사람이 바로 구본준이다. 그를 만나면 행복했고 수많은 건축적 자극를 받았다.

“이 소장 언제 크냐? 빨리 커서 돈도 벌고 나 맛있는 거 사줘야지. 미래를 위해 오늘은 내가 쏜다. 아줌마! 여기 순대국밥 두 그릇이요!” 나는 그로부터 그런 접대를 받으며 수많은 문화적 지식의 세례를 받으며 비로소 어엿한 건축가로 자라난 것이다. 어디 나뿐이랴. 구본준이 접대한 가난한 예술가들, 건축가들, 후배들을 나는 수없이 안다.

순대국밥 앞에 두고 주고 받던 대화가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집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돈이 없네” 였다. 우리, 구본준과 나는 화가 났다. 왜 우리 아이들이 ‘조용히 하라, 가만 있어라’는 야단을 맞으며 지내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땅콩집이다. 땅콩집 구상을 끝낸 것은 둘이 함께 캄보디아를 다녀오던 비행기 안이었다. 심야의 컴컴한 비행기 안에서 땅콩집 구상 끝에 흥분해 떠들다 승객들과 승무원들로부터 면박을 당하면서도 서로 마주 보고 킥킥거리던 그 날이 이제는 견딜 수 없을만큼 그립다.

그와 나는 많은 것을 함께 했지만 아직 못한 일이 열배는 많다. 함께 하기로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다. 그는 골목길마다 아이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그것이 평생의 꿈이었다. 우리는 그 꿈을 현실로 만들 일을 맨날 이야기 했다. 아는 이들이 있을까. 사실 그는 또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쓰기를 바랬다. 그의 격려와 아이디어로 내가 쓴 동화 원고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디 나뿐이랴. 기자로, 문화인으로, 아빠로, 좋은 친구이자 선배로 많은 이들의 영혼을 접대하고 떠난 그를 그리워 하는 것이. 그가 하고 싶어 했던 일들, 그가 만들고 싶어했던 세상을 위해 나는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갈 것이다.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그럴 것처럼.

이현욱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