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허영만부터 홍대리까지 만화가 작업실 엿보기 2008/03/06

딸기21 2018. 8. 24. 15:40

만화가들 작업실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팬들을 사로잡는 이미지들이 태어나는 ‘꿈의 공장’은 실은 색다르면서도 평범하며, 아기자기하면서도 지저분한 치열한 삶의 현장입니다.


직업 덕분에 여러 만화가들의 작업실을 가봤습니다. 그림 그리는 곳이니 다들 비슷하면서도 만화가 다르듯 모두 달랐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실은 최고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작업실이었습니다.


허 선생의 작업실은 세번 방문했습니다. 작업실은 이사를 가도 작업 공간인 책상의 모습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옮기는 것 같았습니다. 허선생 책상의 가장 큰 특징은 책상 주변에 이런 저런 메모를 무척이나 많이 붙여놓는 것입니다. 일단 먼저 사진부터.


정말 여러가지 것들이 나름의 법칙에 따라 빼곡하게 들어차 있지요?


맞은편에는 화실 문하생들과 동료들의 작업공간입니다. 사무실 벽면에는 큰 자료장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자료를 중시하고 활용하는 허 선생 작업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야구 만화를 그릴 때 썼던 야구선수들 경기 모습과 신문 기사들, 각종 사진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만화 <식객>에 전념하므로 음식 사진들이 더미를 이루고 있습니다.


허선생의 자료에 대한 열정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예전 허선생이 처음 미국에 취재 겸 여행을 갔다가 돌아올 때 사진을 찍은 필름만 수십, 수백통을 들고 오니까 세관에서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고 붙잡았답니다. 허 선생이 만화 작업에 쓸 자료들이라고 하니 이해를 잘 못하더라는 겁니다.


허선생이 미국에서 찍었던 것은 바로 미국 분위기를 내주는 여러가지 장면과 모습들이었습니다. 주차장, 간판, 세탁소 모습 이런 것들이 미국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줘야 배경이 미국 느낌이 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허 선생은 이런 것들을 집중적으로 찍어왔던 것입니다. 이때 찍은 미국 자료 사진들은 <아스팔트 사나이> 등의 배경 묘사에 활용되었습니다.


좌우지간 이런 자료들의 더미 속에서 구석에 박힌 허선생의 책상은 사진에서 보시듯 나름 정리된 것이어도 워낙 무엇이 많아 어지러워 보입니다. 허 선생이 자기 책상을 직접 그린 컷이 있습니다. 만화 <식객>에 실렸던 것인데 한번 보시겠습니다.


이 만화를 보시면 허 선생 책상을 더욱 확실하게 엿보실 수 있게 됩니다.


제가 허선생의 책상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이 그림 왼쪽 맨 위에서 두번째 붙어있는 메모였습니다.


固定觀念脫出.


고정관념을 벗어나 늘 새롭게 무언가를 창작해야만하는 만화가의 숙명을 그대로 보여주는 메모였습니다. 고개를 들기만 하면 보이는 곳에 저 글을 붙여놓은 모습에서 작가의 프로의식, 처절함, 의지 그런 것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허영만 선생 이름을 들으면 책상머리에 붙여놓는 저 ‘고정관념탈출’이란 여섯글자가 떠오릅니다. 허선생이 늘 새로운 장르만화를 선보이며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후배 만화가들보다 빨리 최신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두호 화백의 작업실도 비슷했습니다. 교수 연구실에 빈 틈이 별로 없이 많은 자료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이 화백이 낳은 최고의 캐릭터 <임꺽정> 얼굴을 크게 프린트한 패널이 보는 사람을 압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진 이후 세대 만화가들은 작업실이 깔끔한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이끼>로 돌아온 윤태호 화백의 작업실도 그랬고, <한겨레>에 <비빔툰>을 연재하는 홍승우 화백의 작업실은 특히나 불필요한 것이 일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열혈강호>로 코믹 무협에 큰 획을 그은 양재현씨 작업실도 그랬습니다. 만화가 작업실이라게 실감하게 해주는 것은 메모나 이미지들이 아니라 작업실에서 키우는 햄스터 우리였습니다. 만화가들은 실내에 틀여박혀 살기 때문에 애완동물, 특히 고양이를 많이 기르거든요.

 

<먼나라 이웃나라>로 한국 교양만화 최고 만화가가 된 이원복 교수도 이미지처럼 작업실이 정말 깔끔해서 마치 일반 사무실 같았습니다.


순정만화의 대명사 황미나씨 화실도 무척 깨끗한데, 만화를 도서관처럼 꽂아놓은 모습이 기억에 특히 남습니다. 사실 만화가들은 만화를 많이 비치한 편이지만 작업실 전체를 채우듯 모아놓은 작가는 오히려 드문 편입니다.


반면 약간 지저분해 만화가다운 느낌을 주었던 작업실도 물론 있습니다.


<대한민국 황대장> <시민 쾌걸> 등 개그감각 탁월한 만화가 김진태씨 작업실이었습니다. 찾아갔다가 같이 라면을 끓여먹었는데 자취방 같은 아늑한 느낌이 폴폴 났었습니다.


<프리스트>란 작품으로 게임과 영화까지 파생시킨 형민우씨는 화풍처럼 집안 모습도 독특했었습니다. 제가 찾아갔던 10년전(좀 오래전이죠?)에는 정성껏 모은 각종 무기 모형들이 벽 한면에 가득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면, 만화를 가르치는 만화대학 교수님들의 만화창작 공간은 어떨까요?


최근 학교 역사는 짧지만 단숨에 ‘만화 대학’으로 자리잡은 청강문화산업대학을 들렀습니다. 만화에 대해 취재하러 간 김에 여러 만화가 교수들의 방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교수라고 해도 만화가의 방들이 다를리는 없겠죠.


그런데, 청강대에서 제가 가본 만화가들의 작업 공간 가운데 가장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작업실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최호철 교수의 방이었습니다.


최 교수는 사실 만화가로 규정짓기 힘든 작가입니다. 전태일 열사를 그리는 장편 <태일이>를 연재중이지만, 그의 작업의 본질은 만화가 아니라 그냥 ‘그림’ 그 자체입니다. 만화도 그리는 화가,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최 교수는 꼼꼼하면서도 개성이 강한 우리 시대의 풍속화가라고 하겠습니다. 현대인의 일상을 정말 꼼꼼하게도 그린 그의 그림 <와우산>과 <을지로 순환선>을 처음 봤을 때 강한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최호철 교수의 작업 공간은 만화가의 비밀공간이란 느낌이 확실합니다.


좁은 연구실 구석구석을 자신이 직접 만든 가구로 분할하고, 꾸며서 모든 것을 그림 그리는 것에 맞춰 개조했습니다. 정말 누에고치처럼 폭 파묻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꾸며놓았고, 직접 만든 가구들이 그의 작업에만 맞는 독특한 모습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책상이며 옆 장들이 모두 직접 디자인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 좁은 공간에 폭 파묻혀 그림을 그리며 사는 자기 모습을 최교수가 직접 그린 재미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나>. 잠에 골아떨어진 최 교수의 모습이 무척 생생합니다. 왼쪽은 실제와 달리 창문밖 풍경을 집어넣었습니다. 늘 서민들을 삶을 그림 소재로 삼는 최호철 교수다운 구성이라 하겠습니다.


그림 왼쪽을 자세히 보시면 왠 해골이 걸려 있습니다. 이 해골이나 인체 모형들은 만화가 작업실에 가면 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 동작을 그릴 때 쓰는 기본 아이템입니다. 최교수는 아예 해골 모형을 가져다 놓았더군요. 해골 발 오른쪽 부분에 다른 인체 모형들이 여럿 더 있습니다.




다음은 역시 최교수와 같은 학교에서 만화를 가르치는 홍윤표 교수의 연구실입니다.


홍윤표 교수는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만화 ‘홍대리’로 90년대 중반 데뷔해 유명해진 만화가입니다. 당시 일반 대기업 직장인이 직접 만화를 그려 더욱 화제가 되었었죠. 이후 직장을 그만두고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 만화를 공부한 뒤 돌아와 청강대에서 지난해부터 교수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뺀질이 직장인 캐릭터로 사랑받고 있는 장수만화 <천하무적 홍대리>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이 홍대리의 아버지 홍윤표 교수 방은 깔끔하고 앙증맞은 분위기입니다.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오셔서 그런지 벽면에 유럽 아트만화가로 유명한 엥키 빌랄의 그림이 걸려있더군요.


만화를 그리는 책상은 무척 단순하고 간단하게 꾸며놓았습니다.




홍교수는 방을 아기자기한 다양한 것들로 가득 채워놓아 인상적이었습니다.




만화가 교수님들이라서 격식이나 근엄함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홍교수는 특히 프라모델을 좋아해 프라모델 상자들이 층층이 쌓여있었습니다.


만화가들은 일반 직장인들과는 작업공간이 확실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만 것으로 공간을 꾸미는 것은 실은 창작의 괴로움을 달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만화가들에게 작업실이란 곳은 전쟁터이자 안식처가 되는 극과 극을 달리는 공간입니다. 만화가는 그 속에서 재미를 뽑아내려고 머리를 후벼파고 쥐어짜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