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어디 감히 조용필이?-예술의전당 20년 뒷담화 2008/02/14 21:22.16

딸기21 2018. 8. 16. 15:59

안녕하세요? 건축과 만화를 맡고 있는 구본준 기잡니다. 

15일로 예술의전당이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문화예술 창달, 국민의 문화향수 어쩌구 저쩌구하면 지겨우실터이니, 예술의전당 20년에 얽힌 뒷이야기나 잠깐 들려드리려 합니다.


사실 이런 초대형 문화공간에는 늘 그 시대의 문화코드가 담기며, 당대 여러 사람들과 얽힌 에피소드들이 생겨납니다. 우리의 예술의전당도 마찬가지랍니다.


나도 알고보면 문화적인 대통령이야-전두환 문화 3종세트

 

1982년, 전두환 정권은 새로운 기획을 합니다. 총칼로 국민을 죽여가며 집권한 군사독재정권은 시뻘건 핏빛으로 물든 자신들의 얼굴을 화장하기 위한 방법으로 ‘문화’를 골랐습니다.



앞서 전두환 정권은 대중문화에서 섹스와 스포츠와 스크린(영화)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돌려 정치에 관심 갖지 않게하는 ‘3S 정책’을 폈었습니다. 그 다음 작업으로  흔히 고급문화라고 하는 분야에서도 뭔가 있어보이고 자기네들 치적처럼 될 것을 만들고자 한 거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인은 늘 건축을 선호합니다. 굳이 멀리 찾지 말고 청계천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런 건물 짓기 좋아하는 속성이 더욱 강했습니다. 그래서 문화적인 뭔가를 남기자며 문화부처가 추진하는 3대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잘 아는 천안의 독립기념관,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서울의 예술의전당입니다.

 

뚝섬은 달동네가 보이니 아니되오-서초동으로 가게 된 사연

 

빛나는 머리로 무지막지한 생각을 가차없이 실현하는 전두환 대통령은 앞서 독립기념관을 기획한 팀에게 예술의전당 기본 기획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라고 해도 초대형 시설이 들어설 곳이 쉽게 뚝딱 생길리 없지요.


기획팀이 처음 서울시에 달려가 땅좀 주세요, 해서 제안받은 첫 부지는 경희궁터, 그러니까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좁아 제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번째로 찾은 곳이 서울 서초동 정보사 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정보사가 얼마나 무소불위의 힘을 지녔는지 40대 이상들은 다 아시죠? 그런 정보사에게 땅을 내놓으라고 했으니 당연히 퇴짜를 맞았죠. 


실무팀은 다시 새 땅을 골랐습니다. 한강 푸른 물결이 바라보이는 뚝섬이었습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



그런데 이번에는 이진희 당시 장관이 퇴짜를 놨다고 합니다. 뚝섬에서는 바로 강북 한강가 저소득층 밀집지역이 눈에 들어와서 안된다는 거였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에 수많은 외국인들도 올텐데 창피하지 않겠느냐, 그런 이유였다고 당시 참여했던 한 실무자는 전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3전4기로 찾아낸 곳이 지금 예술의전당이 들어선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입니다. 당시 허허벌판, 말죽거리의 중심지에서도 벗어난 곳, 8차선 남부순환도로만 씽씽 달리는 우면산 기슭에 갑자기 예술이 몰려가 전당을 차린 사연입니다.


건축가 선정부터 파란, 거장들을 누른 김석철의 스타탄생

 

국가대표 문화공간을 짓는 일이니 설계를 국내외 최고 건축가들끼리 시합을 붙이는 현상경기로 뽑았습니다. 당시 한국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과 김중업은 물론 외국 유명 건축가까지 참여한 경기에서 우승자는? 건축가로선 약관에 가까운 40살의 소장 건축가, 김석철 현 명지대 교수였습니다.


최종 세 후보까지 오른 설계안은 나중 당선된 김석철, 그리고 한국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 그리고 미국의 한 건축가의 것이었습니다. 사실 80년대까지 한국 건축계는 두 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 김씨인 김수근과 김중업 두 양반이 꽉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어떻게 둘 다 떨어졌던 것일까요?


당시 예술의전당쪽이 제시했던 공간배치 프로그램은 앞 도로쪽으로 건물들이 나와 있도록 배치하는 컨셉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수근, 김중업의 안은 그런 규정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독창적인 생각대로 갔습니다. 지금 예술의전당을 보시면 도로쪽으로 건물들이 있고 그 뒤로 넓은 공간이 나오며 산쪽으로 다시 시설들이 이어지는 식으로 공간이 구성되어 있지요. 김수근의 안은 앞에 개방 공간을 배치하고 뒷쪽 산쪽 경사를 따라 건물들이 들어서는 구도였습니다. 반면 김석철의 안은 마스터플랜의 의도를 정확하게 따른 것이었습니다.


예술의전당의 주요한 자랑거리인 ‘세계음악분수’. 건축가 김석철씨가 설계한 것으로, 가로 43미터, 세로 9미터 수조에 노즐 800여개 수중등 500여개를 달아 음악에 따라 물줄기가 춤추며 여러가지 효과를 연출한다.


김수근과 김중업이란 두 거장에게 모두 배운 유일한 건축가인 김석철 교수는 두 스승을 이기고 사상 최대의 문화공간 프로젝트를 따내며 건축계의 스타가 됐습니다.


잠시 샛길로 빠지자면, 김석철 교수에 대해 동창인 이헌재 전 부총리가 했다는 유명한 말이 전합니다. “석철이가 천재인 줄 알았는데, 석동이를 만나보니 더 천재더라”는 이야깁니다. 김석동 재정경제부 차관이 김석철씨의 친동생입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니 갓과 부채를 올리거라

 

모든 대형 프로젝트가 그렇듯 예술의전당도 계획이 계속 바뀌었습니다. 김석철의 디자인도 크게 바뀌게 됩니다.  


고위층에 계신 어느 분이 홀연히 “한국 땅에 짓는데 한국 전통적 이미지를 넣어야 한다”고 하시는 바람에, 예술의전당은 갑자기 한국적 디자인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음악당은 부채 모양으로, 오페라하우스는 갓 모양이 됩니다.


왼쪽이 갓모양으로 만든 오페라하우스, 오른쪽이 부채모양 음악당이다.



한 건축평론가는 “양복 입고 갓쓰고 도포 입고 중절모 쓴 꼴”이라고 평하더군요. 평가는 모두의 몫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평가해보시죠.


애초 찬밥이었던 음악, 예술의전당을 음악의 전당으로 바꾸다

 

지금 예술의전당은 사실상 클래식 음악의 전당입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당시 첫 구상은 지금같은 클래식 음악 중심 문화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애초 벤치마킹 모델은 70년대 후반 세계 문화계에 충격을 준 파리 퐁피두센터였고, 시각예술과 자료관을 중심으로 하며 소규모 음악 공간들이 딸리는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처음 추진됐습니다. 5공 정부는 당시 방송광고공사에 이 새 문화공간 사업을 검토하라는 지침을 내렸고, 공사는 부랴부랴 여기저기 아이디어를 찾은 결과 프랑스통인 한 인사로부터 퐁피두형 공간 아이디어를 접수해 발의를 했지요.


그러나 이후 음악계에서 강하게 오페라하우스 설립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봤잖느냐, 세계 선진국들은 오페라하우스가 다 있다, 우리도 이제 제대로 된 오페라하우스 하나 만들자, 는 의견이었습니다. 반대도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무슨 오페라를 얼마나 하냐고 오페라하우스냐, 는 반발이었습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전경.



논란 끝에 간신히 결국 오페라하우스는 막차로 건립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을 열고나자 예술의전당 여러 공간들 중에서도 가장 수요가 많은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음향이 너무 안좋다는 거.


반면 애초 예술의전당 계획에서 구상됐던 소규모 음악공간들은 대중 접점도 적고 사용빈도도 적어 지금은 존재감이 별로 안느껴지지요. 결국 오페라하우스를 짓기로 한 게 옳았던 셈입니다.


각하, 터널부터 뚫고 지어야 한답니다

 

예술의전당은 원래 올림픽의 해인 88년이 아니라 아시안게임이 열린 86년에 개장할 예정이었습니다. 공사가 2년 늦어진 것은 예술의전당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설계안을 받아든 예술의전당쪽은 서울시에 건축 협의를 하러 갑니다. 정부가 하는 일이니 당연히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심의 불가’ 판정이 나왔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 하고 알아보니 예술의전당이 들어설 부지에 일찌감치 터널 공사 계획이 잡혀 있었던 겁니다. 


천하의 무지막지 전두환 대통령이 추진하는 사업인 덕에 그나마 절묘한 타협 아이디어가 채택돼 공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터널 공사는 도시 계획 전체에 따라 잡혀있지만 당장 뚫는 것은 아님. 예술의전당은 무조건 각하의 임기에 지어야 함. 그렇다고 예술의전당 먼저 지으면 나중 그 밑으로 터널 못뚫음. 그래서 나온 방안이 먼저 예술의전당 들어설 부지 밑으로 터널부분을 뜷어놓고 그리고 예술의전당 짓고, 나중에 터널 뚫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시는 먼저 예술의전당 들어설 지하에 80미터짜리 터널을 뚫었습니다. 그 뒤 예술의전당이 착공됐습니다. 그러나 터널 뚫는 데만 2년이 걸렸고, 결국 예술의 전당은 아시안게임 대신 올림픽의 해에, 간신히 올림픽 전에 열어야 한다는 청와대의 엄명으로 음악당만 먼저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대통령은 빛나던 분에서 물기운 강한 분으로 바뀐 뒤였습니다.


예술의전당 때문에 미리 80미터만 먼저 뚫어 놓았던 희한한 운명의 터널이 바로 지금의 우면산 터널입니다.


조용필이고 뭐고 오페라하우스는 안돼… (퍽! X 퍽!) 그럼 공연하세요ㅜ.ㅜ

 

새천년을 앞둔 1999년, 예술의전당은 모처럼 진보적인 기획을 하나 내놓습니다. 조용필씨가 새천년 맞이 연말 12월에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하는 기획이었습니다.


그냥 콘서트가 아니라 극장에서 하는만큼 뮤지컬 식으로 구성하는 새로운 공연을 하자고 예술의전당에서 조용필씨에게 제안합니다. 들어본 조용필씨,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당시 예술의전당 기획은 한국 대중음악이 팝음악을 누르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그런 기여를 한 최고 가수는 당연히 조용필씨니 그런 ’아티스트’를 무대에 세우자, 는 지극히 문화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기획팀은 걱정도 컷습니다. 오페라의 최고 무대이니 성악계가 반발할까 하는 우려였죠. 그리고 예상대로 이 계획을 발표하자 성악계는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지금이야 대중음악계 원로 톱스타들이 대형 극장 무대에 서지만, 당시만해도 ’순수 고급 클래식’의 공간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이나 예술의전당에 대중음악가수들에게는 좀처럼 개방되지 않았었습니다.


우리의 슈퍼스타 조용필. 클래식과 팝의 구분이 점점 사라지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성악계의 반발에 이번에는 우리의 네티즌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여론은 너무나 예상대로 가왕 조용필의 편이었고, 그 덕분에 예술의전당의 과감한 기획은 성사되었습니다. 이후 조용필씨는 2005년까지 해마다 예술의전당에서 연말 콘서트를 했습니다.


그러나 조용필 이후로는 예술의전당은 다시 다른 대중음악인들에게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저기, 지휘 좀 대신 해주실래요?-사상 유례가 없었던 지휘자 공수대작전

 

2001년의 일입니다. 런던필하모니오케스트라, 줄여서 런던필이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휘자는 그 유명한 쿠르트 마주어. 1927년생이니 당시 74살의 노지휘자였습니다. 협연자는 장영주. 공연은 2회 짜리였습니다.


그런데 첫날 공연 도중 사고가 터졌습니다. 지휘를 하던 마주어의 팔이 뚝하고 아래로 처지고 맙니다. 갑자기 그의 몸에 이상이 왔던 겁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마주어는 간신히 공연을 마무리한 뒤 바로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직행합니다.


그럼 남은 다음 공연은? 당연히 지휘 못하죠.


예술의전당 기획팀은 기절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밤새 마주어급의 세계적 지휘자를 대타로 물색하는 대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서울은 밤이지만 유럽은 낮이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여기 코리안데요, 세계적 지휘자로 지금 아시아에 계신분 누가 있나요, 여기저기 물어본 끝에 3명이 아시아에 있다는 것이 파악됐습니다. 훗날 KBS교향악단 지휘자로 왔던 드미트리 기타옌코, 필라델피아오케스트라의 볼프강 자발리쉬, 그리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필하모닉의 유리 테르미카노프였습니다.


이중 기타옌코는 알아보니 이미 다른 나라로 가는 비행기를 탔고, 여차저차해서 유리 테르미카노프가 급박한 예술의전당쪽의 사정을 듣고 착하게도 무대에 서주기로 합니다. 다행히 유리가 지휘하는 상트페테르부르그필하모닉은 일본 순회 연주중이었는데, 중간에 하루 일정이 비어있었습니다.


유리 테미르카노프는 부랴부랴 새벽 일본 나고야에서 비행기를 타고 낮 12시에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번갯불에 콩볶듯 교향악단과 연습, 그리고 숨돌릴 틈없이 그날 저녁 공연을 합니다. 세계적 지휘자답게 급하게 대타로 선 무대를 훌륭히 선방해준 그는 그 다음날 새벽 다시 서울에서 일본 삿포로행 비행기로 일본에 건너가 공연을 잘 마쳤습니다.


본 사진은 유리 테르미카노프나 쿠르트 마주어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만 음악당 내부를 사진도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 예술의전당에서 받아왔습니다.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세계적인 지휘자를 대체해 공연한 경우는 무척이나 드문 일입니다. 전화위복이었을까요, 이 일로 세계 공연계에서 예술의전당은 대처능력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섭외에 응해준 착한 유리 테르미카노프는 그 인연으로 뒤에 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을 이끌고 2차례 내한해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예술의전당이 20주년을 맞은 올해 11월 12일과 13일, 다시 한번 상트페테르부르그필이 온답니다. 지휘자는 당연히 유리 테르미카노프죠.


IMF라 공연료를 못드립니다-그럼 절반이라도 주실래요?

 

1997년 봄, 예술의전당은 영국 국립극장인 로열내셔널시어터의 연극 <오델로>를 다음해인 98년 2월에 서울에서 공연하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연출자는 샘 멘데스. 어디서 들어본 듯 하시다구요?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그 샘 멘데스 감독입니다. 사실 이분은 부인이 더 유명한 편이죠. <타이타닉>의 통통한 히로인 케이트 윈슬렛에게 장가를 갔거든요.


그런데 그해 겨울, 외환위기가 대한민국을 강타합니다. 원화가 폭락하면서 1파운드가 1400원에서 3000원으로 뛰어올랐습니다. <오셀로>를 기획한 예술의전당이 황당해집니다. 예산을 1억5000만원~2억원 사이로 잡았는데, 외환위기 때문에 환율을 계산해보니 3억원을 훌쩍 넘기게 된 겁니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답이 안나와 결국 예술의전당쪽은 정말 창피함을 무릅쓰고 공연을 못하겠다고 통보합니다. 이런 국가대표급 공연장에서 갑자기 공연 취소는 신용에 치명상을 입게 되어 절대 피하는 일이지만 그만큼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겁니다.


이번엔 영국국립극장이 황당해집니다. 영국국립극장은 98년 2월 한국 예술의전당만이 아니라 그 전에 중국 찍고, 한국 찍고, 다시 일본찍는 3개국 순회공연을 잡아놓았던 겁니다. 한국만 중간에 비면 자기네도 미칠 노릇입니다. 영국국립극장쪽은 결국 개런티를 절반으로 깎아 주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계약 당시 한국 환율 부담대로 하기로 한 겁니다.


그런데 마음을 곱게 쓰면 복이 오는 법. <오델로> 공연이 대박을 칩니다.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은 살판이 났던 시절입니다. 똑같이 달라로 돈을 받는데 한국 돈으로 바꾸면 소득이 2배로 늘어나게 되니까요. 돈이 많아지면 문화적이 되지요. 이 사람들이 <오델로>한다니까 안오던 연극에 몰려왔습니다. 당시 <오델로> 관객 중 외국인 비율이 무려 30%였습니다. 12회 공연이 전회 매진됐고, 예술의전당쪽은 만세를 불렀습니다.


사람 얼굴 모양으로 디자인한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날아간 지하도로, 튀는 육교, 어떻게 했든 여전히 불편한 진입로

 

원래 예술의전당 건설 계획에는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에서 예술의전당까지 지하도로 연결하려 했다고 합니다. 지하도 공간에는 쇼핑몰도 입주시킬 계획이었는데, 공사비 문제로 취소가 되었답니다. 예술의전당을 차없이 가는 시민들은 결국 차들이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남부순환로를 불안감을 느끼며 건널목으로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남부터미널쪽에서 예술의전당으로 가는 중간쯤에 2004년 이상한 육교가 그나마 들어섰습니다. 왜 육교가 이상하냐면 무려 55억원이나 들여 만든 ‘아트 육교’이기 때문입니다. 남부터미널 부근 부지가 개발되면서 개발 주체가 지어 기증한 육교인데, 다비드 피에르 잘리콩이란 건축가가 설계한 ‘작품’입니다. 강선으로 상판을 잡아당기는 사장교 육교죠.


 물위의 사장교는 보셨겠지만, 땅 위의 사장교는 못보셨죠? 남부순환로를 가다가 산쪽에 비스듬히 뉘운 유리 구조물이 있고 거기서 연결되는 육교가 바로 그 육교입니다.


엄하게 육교가 들어서주긴 했는데, 여전히 예술의전당 가는 길은 걸어서는 쉽지 않습니다. 결국 차로 오란 이야긴가요?




조명발을 받을 때 훨씬 나은 서초구 우면산의 ‘아쿠아 아트 육교’. 이 아트육교는 군인공제회가 55억원들 들여 지어 서초구청에 기부채납한 것이다. 프랑스의 건축디자이너 다비드 피에르 잘리콩이 디자인했다. 잘리콩은 기(氣)와 풍수에 관심이 많은 건축가로 “남산의 화기(火氣)가 지나는 우면산의 에너지를 도시로 전달하는 배관, 구멍과 같은 상징적인 역할을 형상화한 디자인”이라면서 “기를 통과시키되 불의 기운을 낮추기 위해 물이 흐르는 터널 형태로 만들었다”고 디자인의 의도를 설명했다.


그리고 갖가지 기록들

 

20년 동안 예술의전당에서 한 공연과 전시를 합치면 1만3879건입니다. 총 관객은 지금까지 2780만명. 일렬로 세워 인간띠를 만들면 지구 한바퀴(4만6286㎞)를 돌 정도며, 서울과 부산을 50회 왕복할 길이랍니다. 올해 안에 3000만명을 넘을 것 같습니다.


관객이 많이 든 공연물은 주크박스 뮤지컬 선풍을 일으킨 <맘마미아>였습니다. 2006년에 76일 107회 공연해 20만7514명이 들렀습니다. 전시부문은 기록이 더 셉니다. 지난해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오르세미술관전>이 42만9000명을 동원했습니다.

그거 아시나요? 예술의전당에 있는 서울서예박물관이 세계 유일의 서예 전용 전시장인 거. 서예전시로 최다관객은 2002년 <조선왕조어필전>이 세웠던 7710명이었습니다.


예술의전당이 20주년을 맞아 도입한 엠블럼. 슬로건은 “예술의 전당과 함께 뷰티풀 라이프”라고 한다.


 

예술의전당이 오래 해온 간판 프로그램은 ‘교향악 축제’입니다. 전국 각지 유수 교향악단이 총출동하는 최대의 클래식 잔치입니다. 1989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이 교향악축제에 가장 많이 참가한 지휘자는 누구일까요?

정명훈? 아닙니다. 지금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의 박은성 감독이랍니다. 17회 참가. 2위는 16회 참가한 부천필의 지휘자 임헌정 교수입니다.

교향악축제에서 가장 많이 협연한 연주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씨로 조사됐습니다. 11번 협연. 그 다음은 5차례 협연한 피아니스 김용배, 김대진, 이경숙씨 세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