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건물에도 작가 사인이?-기대반, 걱정반 태백산맥문학관 2008/11/22

딸기21 2018. 9. 14. 15:14

21일, 전남 보성군 벌교에 새 명물이 들어섰습니다. 조정래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완간 20주년을 기념해 지은 태백산맥 문학관이 이날 문을 열었습니다. 이날 개관식에 초청을 받아 모처럼 벌교에 다녀왔습니다. 


700만부 넘게 팔린 <태백산맥>은 이제 그냥 소설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대하소설입니다. 문학관까지 만들어진 것은 이 소설이 특별한 지위에 올랐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이야기 무대에 들어선 태백산맥 문학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요?


꼬막의 고장에 문학관이 탄생하다 


여수공항에서 내려 40여분을 달려 드디어 벌교에 다다랐습니다. 태백산맥 문학관은 벌교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제석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주차장 안내판도 이날 행사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군요. 보성군이 이 문학관 개관식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제 언덕길로 서서히 걸어올라갑니다. 경사지 위에 있는 문학관이 살짝 튀어나온 부분만 보여줍니다. 전체 생김새는 어떨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100여미터 걸어올라가면 드디어 문학관입니다. 정문쪽에서 보면 모양이 전혀 다릅니다. 정문도 특이하게도 북향입니다.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고 합니다.




설계자는 건축가 김원씨입니다. 김원씨는 건축가들 가운데에서 문학과 가장 인연이 깊은 이라고 하겠습니다.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에 이어 조정래씨의 문학관까지 설계했습니다.




건물 외벽에 작가의 말과 서명을 달았습니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 ‘문학’을 건축, 미술, 음악 무엇으로 바꿔도 통할 것 같습니다. 건물에 자기 서명이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요? 아마 국내에서 유일하게 건물에 사인이 달린 작가일 듯하네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오른쪽 축대를 하얀 천으로 덮어놓았습니다. 도대체 뭘까요?


저 천으로 덮은 벽은 옹석으로 만든 국내 최대의 벽화 작품입니다. 유명 미술가 이종상씨의 작품으로 높이가 8미터, 길이가 81미터에 이릅니다.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돌을 모자이크처럼 벽에 붙여 만든 그림입니다. 개관식 하이라이트로 이 벽화를 공개하는 순서가 마련되어 저렇게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이 태백산맥 문학관은 문학과 건축, 미술에서 각각 가장 유명한 중진들인 조정래, 김원, 이종상 세 ‘스타’들의 합동작품이란 점도 일찌감치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실수 있도록 다른 쪽에서 본 사진도 올립니다.




그러면 이제 건물 안으로 들어가보시죠.




1층 전시장 입구입니다. <태백산맥> 책모양 안내판이 보입니다. 1층 전시장에는 <태백산맥>과 조정래 작가와 연관된 다양한 자료들을 모았습니다. 이 기나긴 소설을 쓰면서 조정래씨가 온갖 공을 들여 취재한 자료들입니다.


조정래씨는 <태백산맥> 집필 준비에만 4년을 들였다고 합니다. 각종 사건의 무대를 현장 취재했고, 벌교며 지리산 지도를 직접 그려가며 구상했습니다. 꼼꼼하게 그린 메모들이 흥미롭습니다.




빨치산에 대해 조사한 것을 적은 수첩과 메모들입니다. 저 작은 수첩 노트는 참 오래된 장수상품이죠? 저 수첩을 펼쳐서 전시했으면 더 좋았을텐데 덮은 채로 진열해 아쉬웠습니다. 저 수첩 한 권에 담긴 메모가 소설로는 100쪽이 될 수도 있고, 200쪽이 될 수도 있답니다.




1983년에 그린 벌교읍내 약도입니다. 호산댁, 외서댁, 중천댁, 옥산댁, 개골댁...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집들이 적혀 있습니다.




조정래씨의 ‘얼굴 변천사’입니다. 소설가로서의 풍모를 잘 살려주는 베토벤풍 머리가 요즘 나이가 드셔서 좀 힘이 없어졌더군요. 




가장 성공한 소설, 그러나 가장 집요한 공격에 시달려야 했던 소설


<태백산맥>은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동시에 참 많이도 시련을 겪은 소설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가장 가슴 아픈 시기인 1948년부터 1953년까지를 정면으로 다루다 보니 내용이 불온하다는 극우들의 괴롭힘이 이어졌습니다. 출간 이후 무려 11년 동안 이적성 시비에 휘말려야 했습니다.


그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는 창작자가 아닌 사람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거의 한이 맺혔던 듯 작가는 이적성 시비로 시달렸던 부분을 강조하면서 당시 작가와 소설을 용공으로 몰아갔던 극우언론들의 보도들도 ‘증거’로 진열해 놓았습니다.




우익단체들은 1994년 4월 <태백산맥>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고발합니다. 8개단체가 합동고발했는데 고발장이 무려 121쪽이었습니다.




고발에 발맞춰 <월간조선>은 ‘태백산맥 조정래의 현대사 왜곡’이란 특집 기사를 원고지 200매 분량으로 실었습니다. 보통 신문 한면 전체에 들어가는 기사량이 원고지 20매 정도이니 얼마나 작정하고 쓴 것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는 빠지지 않는 극우 잡지 <한국논단>이란 극우잡지는 조정래씨를 구속하라는 기사까지 썼습니다. 당시 최고의 선동가였던 박홍 신부도 역시 그냥 넘어가지 않고 <태백산맥>과 <아리랑>이 좌익 폭력형명을 미화한다고 발언했습니다.


이 소설을 비판하는 책도 따로 나왔고, 군대에선 금서가 되었습니다. 고발한 쪽에서는 출판사에 경고 편지를 보냈고, 조씨의 방송출연과 강연등을 중단시켰습니다. 고발한 단체들은 <태백산맥>을 출간하는 일본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 출간을 중단하라고 강요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1997년 열린 100쇄 기념행사에선 식장에 머리에 태극기가 그려진 띠를 두르고 난입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태백산맥>은 승리했습니다. 2005년 3월 검찰은 무혐의 결정을 내립니다. 상식이 이긴 것이니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만 당시 권력이란 늘 뻔한 것을 이상하게 만들곤 했으니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작가는 저렇게 따로 전시판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건물 내부를 돌아보겠습니다.


2층은 작가 개인에 대한 내용들을 모아놓았습니다. 건물은 넓은데 전시할 것은 적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작가의 가족 사진까지 큼직하게 전시한 것은 제겐 좀 과해 보였습니다. 아래 사진 왼쪽에 보이는 사진이 조정래씨 일가족 사진입니다. 

 



건물은 4층인데, 앞에서 보신 뾰족한 탑부분 꼭대기는 전망대입니다.

 



태백산맥은 원고지로 총 몇장일까요? 1만6500매라고 합니다. 보통 책 한권이 적으면 원고지 1000매, 많으면 2000매 가까이 됩니다. 


원고를 한줄로 세워놓았습니다.

 



문학관에는 저 육필 원고 말고 또다른 원고지 뭉치들이 있습니다. 바로 조정래씨 아들의 필사본, 며느리의 필사본, 그리고 독자의 필사본입니다.


조정래씨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소설을 필사시킨 것으로 유명했는데, 여기서 그 실체를 볼 수 있군요. 저작권이란 참 대단한 제도입니다. 작가의 사후 50년(이제는 나라별로 70년 이상으로 늘리자는 주장도 나옵니다) 동안 자식들에게 저작권료가 돌아갑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게 소설을 썼는지 조금이라도 실감해보라는 뜻일 겁니다. 자식들 필사본 옆에 자발적으로 필사한 독자들의 필사본이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건물의 또다른 주인공 벽화를 소개할 차례입니다. 벽화의 이름은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입니다. 이날 개관과 함께 공개되었습니다.




저 벽화는 하도 길어서(81미터) 한 화면에 촬용할 수가 없습니다. 부분부분 보시지요.

 



그림 내용이 뭔지 잘 감이 안오시죠? 사진만 보시고는 모르실텐데 두마리 용이 하나가 되는 모습입니다. 분단 조국이 하나되는 염원이라고 합니다. 왜 저렇게 건물에 바짝 붙여서 보기 나쁘게 설치했냐, 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저 벽화는 컨셉 자체가 건물 안에서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건물 내부에서 본 모습입니다.

 



문학관, 어떤 것이 정답일까?-반가움에 따라 붙는 걱정


저 문학관 덕분에 모처럼 벌교 구경을 잘 하고 돌아왔습니다. 좋은 건물에 좋은 작품에 얽힌 이야기까지 듣고 올 수 있어 재미있었던 하루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속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 문학관을 과연 저렇게 크게 지었어야 하느냐는 의문이었습니다.


태백산맥 문학관은 아주 크지는 않아도 작지 않은 건물입니다. 전시 공간도 저 정도면 상당한 넓이입니다. 한 편의 문학작품을 위해 세운 건물로는 국내 최대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넓다보니 채울 내용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보입니다. 앞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작가의 가족사진 같은 것은 보기에 따라서 왜 그런 것까지 전시하냐는 생각을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과연 저 문학관을 운영할 비용을 잘 마련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상근 직원이 4~5명은 필요할텐데 각종 유지비를 포함하면 어림잡아도 연간 몇 억원은 들 것 같습니다. 어차피 벌교를 찾는 손님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지 수익이 목적은 아닙니다만 행여 보성군 재정에 부담을 주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외국의 문학관들을 보면 오히려 그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대신 작가의 생가나 살았던 집, 또는 집필실 등을 그대로 남겨놓고 약간의 유품만 전시하는 선에서 그칩니다. 현란한 볼거리가 아니라 작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일겁니다.




독일의 괴테박물관입니다. 독일 사람들이 괴테를 떠받드는 수준에 견줘보면 건물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독일이 자랑하는 또다른 문화인물 베토벤박물관은 오히려 더 작습니다.




베토벤 박물관은 빈에 있습니다. 베토벤이 말년에 살았던 집입니다. 저 곳에서 유서를 썼다고 합니다. 그 집을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에 아담한 수준입니다.


러시아의 간판작가 도스토옙스키의 박물관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대표작 <죄와 벌>을 집필했던 집을 그대로 씁니다.


그럼 동양권 대문학가의 기념관은 어떨까요?  


중국의 대문호 루쉰의 박물관은 저 태백산맥 문학관처럼 새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규모는 결코 크지 않습니다. 루쉰의 고향 샤오싱(소흥)의 민가를 본떠 소박하게 지었습니다. 루쉰의 성격이나 작품세계를 보면 그의 기념관도 소박한 것이 맞겠죠. 루쉰기념관입니다.




우리나라의 다른 문학관도 보시죠. 역시 건축가 김원씨가 설계한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입니다. 고창의 폐교를 그대로 활용하는 리모델링이 돋보입니다. 역시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벌교의 태백산맥 문학관이 생긴 것은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문학관을 꼭 크게 지을 것이 아니라 작지만 인상적인 소품이면 어땠을까, 라고 괜히 생각해봤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지자체들은 관광 소재 확보에 강박적일 정도로 의무감이 강합니다. 벌교가 낳은 훌륭한 문학작품 태백산맥을 기리는 것은 마땅합니다만, 또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태백산맥 문학관 옆에는 극중 등장인물인 현부자네집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저 건물도 지자체에서 매입해 문학관과 함께 짝패를 이루고 있더군요. 그 한옥 건물을 그대로 활용해 태백산맥 문학관으로 활용하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이런 아이디어가 태백산맥 문학관 건물의 성격과 목적에 꼭 맞지는 않을수도 있습니다. 조정래 작가의 생가나 태백산맥과 연관된 큼직한 건물이 남아 있지 않아 새로 지을 수밖에 없는 측면도 물론 있을겁니다.


다만 저 웅장한 문학관을 세운 열정으로 더 재미나거나 더 핍진한 공간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중얼거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