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가구의 세계

예술은 장난이다-지하도에서 떠올리는 뱅크시 2008/04/08  

딸기21 2018. 8. 24. 18:50

지하도를 좋아하는 분들이 별로 없으실 겁니다. 일단 건널목보다 불편해서 싫고, 또 그 음침한 듯한 분위기가 더욱 맘에 안드시는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이런 지하철이 공공미술로 새롭게 탄생하면 어떨까요? 칙칙한 지하도가 잠시나마 거닐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요?


실제 이런 실험이 벌어졌습니다. 이론상으로 서울에서 가장 예술적이어야 할 지하도가 실험의 장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예술자본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 서울의 한복판, 그래서 국내외 방문객들이 많이 몰리는 경복궁 옆 사간동과 삼청동 화랑, 미술관 거리 입구에 있는 동십자각지하도가 주인공입니다.


지하도, 광고 대신 예술로 꾸미면 안되겠니?


한국일보쪽에서 경복궁쪽으로 건너가는 지하도 입구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입구 왼쪽 벽면이 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반대쪽 오른쪽 벽은 옛날 그대로입니다. 원래 이 지하도는 그래도 나름 신경쓴다고 그림 타일로 모양을 냈습니다. 우리 전통 이미지를 보여주는 의미에서 옛날돈 상평통보 무늬 타일을 붙였는데 오래되서 실제로 보면 좀 지저분한 편입니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 부분에 이르면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은은한 간접 조명으로 꾸민 벽과 천장 자체가 공공미술 작품입니다. 의식을 하면 무척이나 새롭고, 또 의식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눈치를 못채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지하보도로 접어들면 확실히 ‘작품티’가 납니다. 한쪽 벽만 꾸몄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데 은근한 분위기가 제법 괜찮습니다. 사진으로 보면 어두운 더 어둡게 보이는 것일뿐 실제는 저보다 더 밝습니다.




이 지하도를 건너면서 가장 느낀 점은 이렇게 공공미술로 지하도를 예술작품으로 꾸민 것 이상으로 ‘광고가 없는 차분함’이 좋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로 시선을 돌리든 눈을 파고드는 광고가 없으니 지하도가 무척 편안한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지하도 관리하시는 분들, 광고 좀 줄이면 안될까요?




도대체 이 지하도는 누가 왜 이렇게 꾸민 걸까요?


일단 이 지하도는 작가 이영조씨의 작품입니다. 작품 이름은 지하도가 그림이 되었다는 뜻에서 <地下圖>입니다. 서울의 대표적 역사문화 공간인 동십자각 주변의 맥락과 현대적 느낌을 결합시키는 것이 작품 취지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서울시 도시갤러리 추진단이 추진한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서울 도심 곳곳을 공공미술로 시민들이 즐겁게 다닐만한 곳으로 꾸미는 사업입니다. 광화문과 신문로 등 구도심 일대가 무대인데, 이 동십자각지하도를 시작으로 앞으로 제가 돌아본 작품들을 계속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십자각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경복궁의 궁궐망루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궁궐망루이기도 합니다. 크기가 크지 않아도 건축적으로는 무척 높은 평가를 받는 건물입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경복궁에 지으면서 이 망루만 혼자 길 한복판에 남아 섬처럼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삼청동에 가실 일이 있으시다면 저 동십자각 지하도도 한번 건너 보시고, 외로운 섬처럼 버티고 있는 비운의 건축 문화재 동십자각도 한번 제대로 눈여겨 보시면 좋겠습니다.


코믹하고 발칙한 문화 게릴라, 뱅크시 이야기


동십자각지하도를 지나가는 도중 눈길을 끄는 그림을 하나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얼핏 ‘낙서’로 착각할 수도 있는 그림인데, 지하도 철제 문에 그려져 있는 저 파란색 그림입니다.




확대해서 보면 이렇습니다.

사랑의 하트표시를 쏘는 사람 모습처럼 보이는군요. 맞나요?




저 그림을 보는 순간 ‘이거 뱅크시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스텐실 기법이며 총으로 쏘는 사람이란 소재가 뱅크시를 연상시켰기 때문입니다.


뱅크시에 대해서는 앞서 미술가 줄리언 오피에 대한 글에서 아주 잠깐 다뤘었는데, 워낙 유명하고 재미있는 양반이어서 이번에 좀더 자세히 소개할까 합니다.


뱅크시는 거리의 벽화를 그려 유명해진 작가입니다. 거리에 페인트로 낙서 같은 벽화를 그리는데 하나같이 웃기고 기발하며 톡쏘는 풍자를 담고 있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거리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경찰 시리즈입니다. 경찰이나 근위병 등 근엄하고 철저해야 할 직종을 아주 웃기는 족속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저 정도는 뱅크시 작품치고 아주 점잖은 편입니다. 경찰들로선 분통 터질 그림들이 수두룩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실은 저 정도도 약과입니다. 경찰이 코카인을 흡입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도 있습니다.


가장 심했던 것으로는 브리스톨에 있는 이 그림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림 제목은 <Window Lover>. 보시면 그 이유를 아실테니 상황 설명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뱅크시는 유독 경찰을 놀리는 데 집착한다고 말씀 드렸죠?  저 그림속 바람피다 남편이 돌아와 창문에 매달린 저 위태로운 남자도 실은 경찰이라고 합니다. 잠깐 이야기했던 코카인 흡입하는 경찰 그림에 등장했던 그 경찰이라는 겁니다. 저 정도면 정말 경찰들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듯 하군요.


그림도 재미있지만, 더욱 재미있는 것은 저 그림에 대한 브리스톨 시의 반응이었습니다. 저 그림이 처음 등장했을 때 지역 신문들은 한 면을 할애해 보도하기도 했고, 시의회는 영구 보존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물론 뱅크시의 작업에는 도발적이라기 보다는 기발한 작품도 많습니다. 아래 작품이 그 대표적 사례로 유명합니다. 노란 지시선이 차도에서 건물로 올라와 꽃을 이루는 아이디어가 재미있습니다. 저런 장난을 치고 앉아있는 페인트공도 물론 그림이지요.




그런데, 뱅크시가 저렇게 경찰을 놀리거나 코믹한 벽화만을 그렸다면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조금 독특하고 웃기는 작가 정도로 인식되었겠지요. 그를 정말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벌인 황당하면서도 허를 찔러 수긍하게 만드는 놀라운 퍼포먼스 작업들이었습니다.


뱅크시가 가장 ‘히트친’ 것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들을 단번에 바보로 만들어버린 놀라운 해프닝 ‘가짜 작품 전시사건’이었습니다.


뱅크시는 런던 테이트미술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뉴옥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최고의 미술관에 들어가 자기 작품을 슬쩍 전시공간에 걸어놓았습니다. 물론 기존 전시품을 손상시키지는 않고 자기 작품만 진짜 전시품처럼 부착해놓고 사라진 것입니다. 그가 몰래 전시한 작품들은 여성이 방독면을 쓰고 있는 초상화 등 미술작품을 희화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더욱 웃기는 것은 미술관들이 소장품이 아닌 그의 작품이 걸린 줄도 모르고 계속 며칠씩 전시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뱅크시는 런던 대영박물관도 농락했습니다. 역시 대영박물관에 가짜 원시인 암각화를 며칠 동안 몰래 전시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가짜 암각화는 원시인이 쇼핑카트를 끌고가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가짜 그림에 “보존상태가 훌륭한 이 고대작품의 연대는 ‘후기 긴장형정신분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종류의 예술품은 벽에 끄적인 작품들의 예술적, 역사적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지방 관리들이 파괴하는 바람에 불행히도 대부분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말도 안되는 설명까지 버젓이 붙여놨다고 합니다.


당시 이 웃기는 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입니다. 저 쇼핑카트를 모는 원시인 그림은 볼수록 웃기는군요. 저 그림이 전시됐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일입니까.




이런 재미있는 도발뿐만 아니라 유명 그림을 패러디하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현대인의 고독한 일상을 잘 포착하기로 유명한 에드워드 호퍼의 대표작 <밤을 새는 사람들>, 그리고 아래는 이 작품을 패러디한 뱅크시의 장난스런 그림입니다.




날카로운 풍자 또한 뱅크시의 가장 큰 매력이자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힘입니다.


네 달쯤 전인가요, 지난 연말 외신에는 뱅크시의 작품이 토픽 기사로 올라왔습니다. 그가 베들레햄에 등장해 바로 이 작품을 남겼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고 이스라엘 지역으로 들어갑니다. 뱅크시는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들어오는 당나귀를 검문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해 이보다 더 신랄한 조롱이 또 있을까요? 이런 여러가지 작품들, 그리고 해프닝으로 뱅크시는 우리 시대의 최고의 작가이자 비평가,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가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는 것도 더욱 그를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뱅크시 팬들과 기자들은 그가 작업하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뱅크시의 코믹한 소품 하나 더.




템스 강가 가로등 받침대에 있는 스텐실 작품입니다. 쥐 두마리가 테러를 모의하고 있군요. 저 각도로 포탄을 쏘아 영국의 상징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날려버리겠다는 태세입니다. 실제로 보면 작품인줄 모르고 넘어가기 쉽겠지만 한번 보고 나면 절로 웃음지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을 더 보시고 싶으시면 뱅크시 홈페이지에서 손쉽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영국은 오랫 동안 세계 대중음악에서 최강 국가였는데, 요즘은 미술에서 최강국가로 날리고 있습니다. 대영제국의 영광은 지나갔어도 문화 부문에서는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뱅크시 같은 작가들이 바로 영국을 빛내주는 주역들이지요.


우리 작가들 역량이 저 정도가 못되겠습니까? 조만간 뱅크시 못잖은 걸물들이 등장하기를 바라면서 기다려 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