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화양극장 봉별기 2008/02/10

딸기21 2018. 8. 16. 15:48

그 땐 왜 그리 열심히 영화를 봤는지 모르겠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별다른 일이 없으면 무조건 극장으로 달려가 동시상영 영화를 하염없이 봤다. 개봉영화는 주로 종로3가 극장가에서, 홍콩영화는 가끔씩 화양극장에서 보곤 했다. 화양극장을 간 가장 큰 이유는 화양극장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사람이 적어서 늘 호젓하게 영화를 볼 수 있어서였다.


80년대 서울 서대문, 은평 지역에서 성장한 세대들에게 화양극장은 제법 친숙한 극장이었다. 미아리 대지극장, 영등포 명화극장과 함께 홍콩 영화를 독점해 틀던 극장이었다. 이 극장에서 나는 양자경을, 양리칭을, 주윤발을, 적룡과 이자웅을 만났다. 


양리칭의 출세작 <예스마담3>. 여성스러운 양자경과 달리 억세고 강한, 그러면서도 복스러운(!) 외모에 힘찬 무술 동작으로 실감나게 두들겨 패고 얻어터지는 액션을 보여줬다.


<영웅본색>을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준 멋진 악역 이자웅(가운데). 요즘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진 것이 안타깝다. 증지위는 게속 잘나가던데...

 


<영웅본색>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 이자웅이 왕조현과 함께 주연을 맡았던 <대행동>. 모처럼 포스터를 들여다보니 기자스럽게도 오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빨간 글씨 제목 옆에 쓴 노란 설명문에 <정녀유혼>이라고 써있는데, <천녀유혼>의 오기다. 천녀유혼의 ‘천’자가 한자로 천(사람인 변에 푸를 청)인데, 이를 정(情)자로 잘못쓴 것이다. 



화양극장에서 본 기억이 유달리 남는 영화 중의 하나는 <리브 앤 다이>다. 안타깝게도 흥행은 참패했던 영화다. 당시 화양극장을 개봉관으로 잡았다는 것은 시내 빵빵한 극장들이 모두 외면한 영화라는 이야기였으니 성공하면 이상할 처지이긴 했다.


그러나 별볼일 없는 영화는 결코 아니었다. 그 유명한 <프렌치 커넥션>의 윌리엄 프리드킨이 자신의 장기인 자동차 추격씬을 원없이 보여준 영화였는데, 정작 주인공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윌렘 데포의 연기만큼은 잊혀지지 않는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1985년작 . 1986년 국내에서 개봉할 때 제목은 <리브 앤 다이>, 비디오 출시 제목은 <늑대의 거리>, 텔레비전 방영 제목은 <암흑가의 추적>으로 마구 바뀐 영화다. 마니아 취향의 영화지만 미국 갱스터 영화에서 자주 선보이는 자동차 추격 장면만큼은 역대 최강이었다.


잠시 샛길로 빠지자면, 그 기억에 안남은 주인공은 윌리엄 피터슨이었다. 전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미국의 수사드라마 <CSI>에 나오는 한국 애칭 ‘길반장’, 길 그리섬 역으로 나오는 바로 그 양반이다.


지금은 좀 옆으로 면적이 넓어졌고 푸근해진 외모지만 <리브 앤 다이>에서 그는 뚱뚱하지 않고 탄탄한 체격에 혈기넘치는 젊은 수사관이었다. 이 영화로 꿈에 그리던 주연을 맡았던 윌리엄 피터슨은 하필이면 너무 센 상대역을 만나고 말았다. 윌렘 데포라는 당대의 연기 달인의 현란한 연기에 그의 존재감이 가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주연 자리를 못차고 단역이나 조연으로 오랫동안 연기 생활을 이어간 그는 나이 50대를 코앞에 둔 2000년, <CSI>로 결국 빛을 봤다.


가끔 화면속에 나오는 그를 보면 그 때 그 영화속 배역을 떠올리며 혼자 살짝 웃곤 한다. 마치 오래전 친구를 보고 ‘난 그시절 네가 떠올라’라고 키득거리듯이 말이다.


좌우지간 화양극장은 내 영화 추억에 많지는 않아도 적지도 않은 여러가지를 제공해준 곳이었다. 다른 극장들은 하나 둘 씩 사라져도 화양극장만큼은 늘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지난 가을, 영화 담당 김소민 기자로부터 이 화양극장, 그러니까 현 드림시네마가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깜짝 놀랐다. 그리고 순간 상념에 잠겼다. 윌렘 데포부터 이자웅까지, 서대문 네거리 그 극장에서 만났던 배우들과 영화들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김 기자가 들려준 화양극장 소식은 뉴스가 될 법 했다. 이 극장이 문을 닫기 전에 독특한 이벤트를 한다는 것이었다. 김기자가 취재한 내용에 나도 밥상에 숟가락을 얹듯 내용과 글을 아주 조금 보태 기사를 같이 썼다. 좀처럼 영화 기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는데, 화양극장에 대한 기사만큼은 내가 약간이라도 기여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기사 반응은 제법 좋았다. 화양극장은 <더티 댄싱>이란 영화를 80년대 가격으로 상영하는 마지막 이벤트를 벌였고, 영화팬들은 안타까워 했다. 그 기사를 쓴 뒤로 화양극장 앞을 지날 때마다 다시 손그림으로 그린 80년대 풍의 <더티 댄싱> 간판을 한번씩 다시 돌아보게 된다. 화양극장이 문닫기 전에 가봐야할텐데, 마지막 영화를 보지 못하고 화양극장을 떠나보내면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 같다.


아래는 지난 10월 18일치 기사.



돌아온 ‘더티 댄싱’ 떠나는 ‘단관 극장’

서울 ‘드림시네마’ 고별 이벤트


안 바뀌는 듯 조금씩 바뀌어가는 서울 서대문 네거리. 그 한 모퉁이에서 ‘화양극장’은 변치않은 풍경을 대표해 왔다. 지금 이름은 드림시네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화양극장으로 부르곤 한다. 그렇게 44년째. 화양극장은 대단한 극장은 결코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버티다 보니 독특한 지위가 절로 생겼다. 다른 극장들이 헐리고, 멀티플렉스로 바뀌는 바람에 서울 시내 유일의 ‘단관 극장’이 된 것이다.

 

최근 이 극장 김은주(35) 대표에게 뜻밖의 연락이 왔다. 극장 건물이 내년 재개발되기로 해 헐린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날’이 오자 김 대표는 결심을 했다. 기왕 운명이 정해진 것, 어느날 갑자기 헐리면서 기억속에서 사라지는 극장은 되지 말자고. 그래서 그는 가장 사랑하는 영화로 작별을 고하기로 했다. 1980년대 최고의 청춘영화 〈더티 댄싱〉을 다음달 23일부터 헐리는 그날까지 무기한 상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이 아이디어를 위해 그는 ‘미친 짓’을 감행했다. 얼마 뒤 헐릴 극장인데도 〈더티 댄싱〉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의 점프 순간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1억여원을 들여 스크린과 음향시설을 바꿨다. 극장 전체도 80년대로 되돌린다. 간판부터 옛날 그림간판으로 올린다. 화양극장 시절 최고 인기작인 〈영웅본색〉 등의 간판을 그렸던 김영준씨가 맡았다. 표값도 그때 그대로 3500원이다. 1980년대 홍콩영화의 추억이 담뿍 서려 있는 이 곳에서 패트릭 스웨이지와 제니퍼 그레이의 그시절 옛 춤 장면을 끝으로 서울의 극장 단관 시대도 막을 내린다.

 

〈더티 댄싱〉의 추억

 

88년 〈더티 댄싱〉이 중앙극장에서 개봉해 50만 관객을 부르던 그 때, 극장 앞에선 종종 실랑이가 벌어졌다. 18살 이상 관람가였던 이 영화를 보려고 10대들은 어색한 화장을 하고 잠입을 시도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은주 대표도 중앙극장에서만 세 번 쫓겨났다. 그는 재개봉관인 신촌 ‘크리스탈 극장’(현 그래드시네마)에서 거사를 벌인다. 화장도 하고 대학생 언니까지 동행해 밤 9시 시간을 골랐다. 치밀한 준비 덕에 거사는 성공했고, 주인공의 점프 장면은 영원히 그의 뇌리에 깊게 남았다. 이후 이 영화는 그에게 끝없이 되풀이해 보는 ‘내 인생의 영화’가 되었다. 학교 영어 선생님을 괴롭혀 가며 삽입곡 가사를 모조리 번역하고 외웠다. 지금도 그의 인터넷 아이디는 모두 ‘더티 댄싱’이다.


‘제 2의 스카라’는 되지 않을래

 

마지막 영화 〈더티 댄싱〉을 상영하기 위해 김 대표는 극장 설비까지 고쳤다. 자막은 그가 직접 번역했다. 극장 내부도 80년대 느낌으로 꾸민다. 이를 위해 옛날 턴테이블과 〈페임〉 〈백야〉 등의 영화음악 레코드판 50장을 청계천을 뒤져 샀다.

그가 이렇게 열성적으로 화양극장-드림시네마의 고별 무대를 준비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05년 그가 1년 동안 운영했던 스카라극장은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헐려버렸다. 문화유산 등록예고를 통보 받은 건물주가 등록 전날 건물을 철거해 버린 것이다. 도둑 철거 직전 건물주의 부탁을 받고 그는 밤 11시에 짐을 챙겨 새벽 5시에 스카라극장을 나왔다. 지금 스카라극장 터는 주차장이다. 김 대표는 “너무 속이 상했다”며 “마지막 남은 단관마저 그렇게 없어지는 걸 볼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몰래 〈더티 댄싱〉을 봤던 사람들도 이번엔 떳떳하게 제대로 갖춘 음향과 화면으로 추억을 되살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극장의 모습도 많이 찍어 기록으로 남겨줬으면 좋겠어요.”

 

서부지역 청춘들의 아지트 화양극장

 

64년 1월 1일 개관 당시 화양극장에는 가로 세로 10여미터짜리 무대가 있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하춘화쇼, 송창식쇼도 했다. 당시 서울에 개봉관은 열 곳뿐. 대한극장이 2천여석으로 가장 컸다. 700석 규모의 화양극장은 중간 크기의 재개봉관이었다. 개봉관에서 틀고 난 영화를 배급사가 사서 재개봉관에 나눠줬다. 좋은 영화를 받으려면 영업부장의 수완이 좋아야 했다. 근처 극장이 트는 영화는 다른 극장에선 못 틀었다. 안목도 중요했다. 개봉관에서 망한 영화도 재개봉에서 입소문을 타고 터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청량리에 있던 재개봉관 대왕극장은 장사가 잘되는 극장으로 꼽혀 좋은 영화들을 몰아가곤 했다.

 

86년, 화양극장은 개봉관으로 ‘승격’했다. 미아리 ‘대지극장’과 영등포 ‘명화극장’도 화양극장과 주인이 같았다. 홍콩영화 전문 수입사인 세진영화사와의 친분 덕분에 이 세 극장이 각각 자기 지역에서 홍콩영화를 독점으로 틀며 인기를 끌었다. 84년 〈예스마담〉, 87년 〈천녀유혼〉과 〈영웅본색〉, 88년 〈영웅본색2〉 등 굵직한 화제작이 세 극장에서 관객과 만났다. 하루 3천명을 넘으면 만원 사례로 치는데 〈영웅본색 2〉는 심야까지 7회가 모두 매진됐다. 기다려도 표를 못산 이들이 항의해 새벽 2시에 한번 더 심야 상영을 했다. 30여만명이 화양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천녀유혼〉 개봉 때는 장궈룽(장국영)과 왕쭈셴(왕조현)의 팬사인회가 열렸는데 영화관을 몇 바퀴 뺑뺑 돌아가며 긴 줄이 늘어섰다.

 

시사회 전용극장으로 변신-드림시네마 시기

 

드림시네마 앞에는 아직도 하베스트 전용관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홍콩 영화제작사 골든하베스트와는 상관 없는 것으로 이 영화관의 회원권 이름이다. 90년대 이후 홍콩영화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이들 세 극장들도 기운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멀티플렉스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명화가 먼저 문을 닫았고 대지는 멀티플렉스로 바뀌었다.

 

98년, 화양극장은 이름을 드림시네마로 바꾸고 시사회 극장으로 탈바꿈했다. 낮에는 재개봉을 하고 밤에는 시사회를 했다. 시사회는 좌석의 80% 이상이 찼을 정도였다. 〈말아톤〉 〈왕의 남자〉 〈러브 액추얼리〉 시사회 때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한참 동안 영화관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글 김소민 구본준 기자, 사진 김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