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사귀기

미술관의 과거는 무죄-술 대신 미술을 빚는 양조장 2007/10/12

딸기21 2018. 6. 19. 19:37

보통 사람들이 미술을 즐기는 전시공간은 크게 두가지 장소입니다. 다들 잘 아시듯 미술관과 화랑이지요. 20세기 들어 미술이 크게 활성화하면서 미술관과 화랑은 사회의 중요한 문화공간으로 더욱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미술전시공간이라고 하면 어떤 건물이 떠오르십니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를 대표하는 에르미타주미술관. 원래 왕궁이었던 건물이어서 웅장함과 화려함이 두드러진다.



현대 이전 미술관이라면 돌기둥이 줄지어있는 고색창연한 유럽특유의 석조건물이 주종을 이룹니다. 그래서 저 에르미타주미술관같은 웅장한 건물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우리나라도 덕수궁 석조전이 있지요.


반면 현대 미술관이라면 아주 깔끔 담백한 모더니즘 건물들이거나 독특한 첨단 건물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현대에 생긴 미술관들은 유명 재벌들이 만드는 경우가 많아 기존 건물을 쓰는 이전 미술관들과 달리 건물들을 새로 지었으니까요.


게티센터는 하얀색 건축을 하기로 유명한 현대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의 대표작이다.

공공기관인 미술관이 아니지만 화랑도 좋은 곳들은 아주 근사합니다. 화랑은 미술품을 사고파는 일종의 미술 복덕방이겠지만, 문화적 의미도 함께 지니고 또한 고급스런 이미지 유지를 위해 그럴듯한 근사한 분위기로 꾸미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정관념을 깨는 미술공간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미술을 위한 건물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쓰다가 못끄게 된 건물들을 미술공간, 전시공간으로 새로 탄생시키는 프로젝트들입니다.


리노베이션으로 탄생한 영국 미술의 상징-테이트 모던

 

현대미술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영국의 테이트모던입니다. 영국 최고의 미술관인 테이트가 현대미술품을 전시할 공간으로 마련한 테이트모던은 새롭게 건물을 짓지 않고 기존 건물을 리노베이션했습니다. 그러면 원래 이 건물은 어떤 건물이었을까요?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인 테이트 모던.


바로 화력발전소였습니다. 강가에 남게 된 발전소 건물을 허물기 보다는 미술관으로 활용하기로 해 낡은 건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것입니다. 널찍했던 내부는 확트인 미술전시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테이트모던 내부 모습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입니다. 영국은 비록 예전 대영제국의 영화는 잃었지만 적어도 문화분야에선 세계를 이끌어갑니다. 테이트모던의 사례는 이런 영국의 ‘문화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영국이 이처럼 문화를 활용해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핵심에 건축이 있습니다.


21세기를 맞으면서 영국은 자국을 대표하는 새 랜드마크들을 만들어내는 밀레니엄 프로젝트에 착수합니다. 용도가 다한 화력발전소도 그 대상에 포함됩니다. 새로운 미술관을 만들기로 하고 공모를 했습니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새로운 아이디오로 멋진 신축 아이디어를 가지고 몰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선작은 바로 저 건물 그대로를 살린 아이디어였습니다.


저 테이트모던 건물을 보시면 원래 화력발전소였다고 하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건물 자체가 나름 미학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원래 화력발전소 건물 자체가 건축가 길버트 스콧 경이 설계한 건물로 아르데코 양식의 주요작입니다.


그런 의미와 역사를 지닌 건물을 이어가는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채택한 것,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더 훌륭한 건축행위가 아닐까요. 전기를 만들어내던 화력발전소는 이제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의 힘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원래 테이트 뮤지엄보다 이 테이트 모던 뮤지엄이 더 유명해졌을 정도입니다. 발상의 전환이란 그래서 대단한 것입니다.


테이트모던의 사례는 여러가지 의미를 보여줍니다.


우선 리노베이션이란 것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도심속에서 용도가 사라진 건물들이 새로운 용도의 건물로 얼마든지 재탄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경우 건물의 역사가 깊어지면서 더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고, 그래서 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휘황찬란한 새 건물은 그런 유서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진 못합니다. 


기차역, 인상파를 실어나르는 미술관이 되다-오르세


이런 흐름을 선도한 대표적인 사례가 잘 아시는 오르세 미술관입니다. 오르세는 테이트모던보다 훨씬 앞서 리노베이션이 무엇인지 보여준 미술관입니다.


프랑스하면 그림이고, 그림 하면 인상파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에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프랑스 미술, 그중에서도 인상파를 보러 미술관에 갑니다. 프랑스하면 생각나는 루브르가 아니라 바로 이 오르세 미술관으로 갑니다.


프랑스 국가대표 박물관 겸 미술관인 루브르는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처럼 왕궁을 미술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반면 오르세 미술관은 처음부터 미술관이 아니었습니다. 오르세는 원래 기차역, 그러니까 오르세역이었습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기차역이었을 때는 파리 시민들만의 장소였지만, 미술관으로 바뀌어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오르세역은 근현대 건축물의 주요작이었지만 1939년 이후 기차역으로서 용도가 사라져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9년에 이 건물을 미술관으로 새로 꾸미게 됩니다. 그 전에는 없었던 기막힌 발상의 전환입니다. 넓게 트인 실내를 활용할 수 있어 좋지만 내부는 거의 새로 짓다시피하는 수준의 리노베이션이었습니다.


오르세미술관 내부.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이 너른 공간을 채우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 작업을 맡은 건축가는 누구였을까요? 프랑스하면 자존심이죠. 그래서 당연히 프랑스 건축가가 했을 것 같지만, 이탈리아 건축가 아룰렌티가 했습니다.


자국 건축물을 새롭게 꾸미는 행사를 세계적 건축가들이 경쟁하는 이벤트로 만들고, 꼭 자국 건축가가 아니라 세계적 건축가의 작품으로 선정해 지명도를 더욱 높입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건물은 당연히 프랑스 것이지요. 외국 건축가가 했다고 하지만 그 건축물을 보러 우리는 프랑스로 갑니다. 건축이 그런 좋은 마케팅 수단인 것을 프랑스는 잘 알고 미리부터 이렇게 해왔습니다.


테이트모던과 오르세는 모두 건축이란 것이 꼭 새롭게 지어아만 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려줍니다. 미술관이 꼭 미술관 건물로 따로 지어야만 한다는 생각도 바꿔버렸습니다. 그리고 낡은 건물이 문화와 만나면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특히 미술이었기에 가능한 일일겁니다. 낡은 발전소를 스포츠 경기장이나 콘서트홀로 바꾸기는 힘들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미술은 그 장르 특유의 속성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아시아 미술의 심장이 된 군수공장-다샨쯔


이런 사례가 아시아에도 있습니다. 중국 현대미술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 베이징의 ‘다샨쯔’ 지구입니다.


베이징의 대표적 미술촌인 다샨쯔 문화특구. 길 전체를 가로지르는 파이프가 이 지역의 원래 모습을 암시한다. 사진=<한겨레> 노형석 기자


다샨쯔는 원래 군수공장이었습니다. 1950년대 지어 한때 2만명까지 일하던 대단위 공장지대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이곳은 쇠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공장으로선 생명이 다합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떠나고 빈 공장만 덩그마니 남은 이곳에 뜻밖에도 미술가들이 들어왔습니다. 1995년 중국 최고 미술학교라는 중앙미술학원에서 여기를 작업장으로 빌려쓰면서 점점 미술가들과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이곳 다샨쯔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미술마당입니다. 천정부지로 작품가격이 뛰어오르는 중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메카요, 베이징을 대표하는 문화지구이자 세계 관광객들이 몰리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작업장이 된 거대한 공장 내부. 안에 적힌 ‘모주석 만세’ 등의 글씨들이 지난 세월을 보여주는 아이처럼 남았다.


공장이란 건물의 특성상 다샨쯔의 건물들은 크고, 기능적이며 그래서 단순함의 미학, 기능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그런 생산공간에 미술의 힘이 더해져 새롭고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고,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에 매혹되어 점점 더 많이 이곳을 찾아옵니다.


술 대신 미술을 빚는 양조장-배다리 스페이스 빔


다샨쯔의 사례나 테이트모던 뮤지엄이 보여주듯 공장 건물은 나름 독특한 미학적 디자인을 보여줍니다. 우선 공장 건물은 넓습니다. 그리고 구조물들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가정집이나 가게처럼 꾸밀 필요가 없기 때문에 파이프며, 각종 골조가 겉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런 기능추구의 디자인은 평소 접하지 못하던 독특한 느낌이 되고, 공간을 훨씬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술전시와 궁합이 맞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공장을 미술전시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인천 ‘배다리’에 있는 스페이스빔( 032-422-8630, www.spacebeam.net )입니다.


배다리는 인천의 오래된 동네인 창영동에 있는 헌책방이 많은 지역 이름입니다. 인천 전체로보면 바닷가에서 한참 먼 내륙쪽이지만, 한때 이곳까지 바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배를 댈 수 있는 다리, 그래서 배다리인 것이죠.


이 배다리 골목 안에 스페이스빔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미술전시장인지 알 수 없어 그냥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스페이스 빔 전경


그냥 지나가다보면 ‘왠 컵라면 그림을 셔터에 그려놓았을까’ 싶은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저기가 바로 스페이스빔입니다. 알고 보니 저 그림은 라면 그림이 아니라, 양조장에서 술을 발효시키는 장면이라고 합니다.


스페이스빔 입구 모습


왼쪽 셔터에 작게 로마자로 스페이스빔이라고 써놓았을 뿐입니다. 그림 셔터 옆에는 이 건물의 원래 ‘문패’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仁川釀造株式會社.


인천양조는 1920년 이곳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니 이곳은 인천 주류산업의 발상지인 셈이죠. 인천에서는 ‘소성주’라는 술로 무척이나 유명한 회사라고 합니다. ‘소성’은 인천의 신라시대때 이름입니다. 소성주의 특징은 변질되기 전에 사서 바로 마셔야 한다는거. 인천지역 탁주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인천 대표 막걸리입니다. 참고삼아 맛을 봤는데, 달착지근하지 않고 시큼하면서 담백하더군요. 그게 소성주만의 맛이라고 합니다.


이 소성주 공장이 이사가면서 원래 공장이던 이 양조장이 빈 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  스페이스빔이 임대해 최근 들어온 것입니다. 스페이스빔은 전시공간이면서 동시에 미술교사 등을 상대로 미술 공부와 워크숍도 합니다. 인천지역 대안미술계에선 중요한 곳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양조장 출신 미술전시장은 그럼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시겠습니다.


스페이스빔 입구. 이곳에서도 전시를 한다. 계단위로 올라가면 실내 전시공간이 나온다.

1층은 거의 공장 때 그대로의 모습입니다만, 계단에 칠을 다시해 도드라지게 했습니다. 그러면 2층을 보실 차례입니다.


2층에서 내려다본 모습


‘품질 향상’이란 구호가 이곳이 공장이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 벽돌 건물 안쪽에 사무실과 전시공간이 있습니다.



건물 바로 옆 한옥집 일부가 이 공간으로 튀어나와 있습니다. 이 돌출부에 작가들이 ‘장난’을 해놓았군요. 사람 모양을 달아 놓으니 확 달라보입니다.



아랫층 공간 남아있는 시멘트 구조물에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저 그림은 바로 이곳 배다리 부근의 지도입니다.


2층 로비


제가 간 날에는 구영민 인하대 건축과 교수(왼쪽에서 3번째)와 전시를 기획한 건축평론가 전진삼(맨 오른쪽)가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층 전시장 입구입니다. 예전에는 출근부 기록했을 법한 카운터는 이제 탕비실로 바뀌었고, 작업 차트가 있었을 법한 벽에는 인천지역 옛날 문화포스터들이 붙어 있습니다.



평소에는 작업공간이자 모임, 교육을 하는 공간입니다. 오늘은 건축전시회 준비 워크숍이 열렸습니다. 작품을 설명하고 들으며 전시 막바지 최종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천장 중간에 열린 공간 사이로 빛이 보입니다. 


요즘 이곳 스페이스빔에서는 재미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상상의 대지 탐사전>이란 이름의 건축 전시회입니다.


건축전시회라고 해도 건축물을 전시할리는 없겠죠. 건축가들이 도면상으로 만들어낸 개념 건축에 대한 전시회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인하대 구영민 교수팀, 그리고 현재 정림건축 소장인 박준호 건축가 등 2명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인천이란 지역에서 출발한 건축적 관심과 고민을 어떻게 풀어놓는지 건축학도들이시라면 한번 가보시길 권합니다.


스페이스빔은, 앞서 말씀드린 오르세나 테이트처럼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작은 전시공간일뿐입니다. 작고 보잘것 없을지 모르지만 스페이스빔은 바로 그래서 독특하고 소중한 곳일 수 있습니다.


이런 공간이 점점 늘고 새롭게 시도되는 것, 그것만으로도 문화적 의미는 생겨납니다. 그리고 문화에 관한 이야기도 쌓여갑니다. 이렇게 쌓이는 이야기들은 우리로 하여금 문화에 대해 친근하게 다가가게 하고, 또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요소입니다.


양조장 출신 전시장.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국에는 테이트가 있고, 프랑스에는 오르세가 있다지만 우리 인천에는 막걸리공장에서 변신한 새로운 미술공간(비록 임대이긴 하지만)이 있답니다.


배다리란 곳


이곳 ‘배다리’란 지역은 요즘 한창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인천시에서는 이 동네를 관통하는 도로를 만들고자 하고, 여기에 맞서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도로 건설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인천시는 미래 인천을 만들어갈 핵심사업으로 송도 신도시와 청라지역을 필사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들을 이어주는 관통도로가 꼭 필요한 상황입니다.


반면 배다리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예술인들은 배다리의 문화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배다리 지역이 인천의 오랜 서민문화 중심지이며, 지금도 아벨서점같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헌책방과 책방들, 그리고 문화관련 장소들이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배다리 주변에는 또한 인천 역사에서 주요한 건물들이 많이 몰려 있습니다. 인천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들인 창영초등학교와 영화학교 등이 이 동네에 다 있습니다.  


이렇게 논란이 벌어지자 이곳이 관통 도로로 철거될 수도 있는데 문화관련 시설들은 오히려 배다리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스페이스빔이 최근 이곳으로 이사해왔듯이 말입니다.

개발이 옳은지, 문화지대를 지키는 것이 옳은지는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어려움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또 모여드는 것, 그런 것이 바로 문화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