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家의 매력

카메라의 세계1-카메라, 그 치열한 경쟁의 역사 2007/10/01

딸기21 2018. 6. 17. 13:52

기자생활에서 두 축을 이루는 경력은 문화부와 경제부다. 경제부에선 전자업종을 맡았는데, 가장 적성에 맞았던 업무였다. 전자 담당기자 시절 관심을 가졌던 제품은 2가지였다. 하나는 면도기, 그리고 또 하나는 카메라였다.

 

면도기와 카메라에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기계란 점이다. 두가지 모두 사람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는 전자제품이다. 


카메라, 그게 궁금해졌다


면도기는, 사람 살갗에 직접 비벼대며 쓰는 유일한 전자제품이다. 사람과의 유대관계가 그 어떤 전자제품보다 강하다. 한번 특정 회사 것에 익숙해지면 바꾸기가 쉽지 않다. 일단 시장에서 성공하기만 하면 면도기는 왠만한 다른 전자제품보다 훨씬 장사가 되는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전세계 수억명짜리 거대 시장을 필립스와 브라운, 파나소닉이 나눠먹고 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도 첨단기술에 대한 투자비도 예상 이상으로 많이 들어가 몇몇 공룡기업들이 과점하는게 면도기 산업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이런 점들은 지난해 신문지면에 ‘면도기 턱밑 전쟁’이란 기사로 쓰기도 했다.


카메라는? 


면도기가 ‘몸이 교감하는 기계’라면, 카메라는 ’마음이 교감하는 기계’다. 소유자와 기계가 가장 정서적으로 강하게 피드백 하는 기계다. 그게 바로 카메라의 힘이다. 그러면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 그런 점들이 궁금했다. 무엇보다도 관심이 쏠렸던 것은 산업적인 부분이었다. 그건 기자란 직업의 소산이기도 했다. 다른 제품과는 다른 전자제품, 독특한 시장 구조. 거기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까지. 이것 저것 궁금한 게  많았는데 아쉽게도 신문 지면에선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 때 못했던 카메라 이야기를 블로그란 부담없는 공간을 빌어 휘적거려 보려고 한다. 물론 정색 하고 정독할 엄밀한 글은 아니다. 다만 카메라란 물건이 재미있고, 이 기계와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가 흥미로워 혼자 주저리주저리 읊어보는 이야기일뿐이다. 


먼저 밝힐 점은 내가 카메라 마니아가 전혀 아니란 점이다. 사진에 빠진 것도 아니고 카메라란 기계 자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아들 사진 찍는데 쓸 뿐인 평범한 소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모두 그 수준에 머물 것이다.


첫번째 카메라 이야기는 카메라라는 산업에 대한 이야기다. 실생활에서 제품으로 카메라를 접해오면서 누구나 어느 정도 아는 내용이겠지만, 이 카메라 산업의 역사는 제법 흥미로운 흥망사의 파노라마가 담겨있다.


카메라, 한국산은 불가능한가


전자 담당 기자 시절, 개인적으로 최고 관심사는 후발주자인 한국기업 삼성이 과연 카메라 시장에서 성공할 것인지였다. 카메라 시장이 이전 필름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급속도로 바뀌면서 일어난 가장 큰 산업적 변화는 후발 주자의 진입 가능성이 높아진 점이었다. 그 이전에도 한국 기업들이 카메라 시장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삼성은 물론 옛 금성(!), 그러니까 지금의 엘지전자도 한때 카메라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제는 누구도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1974년 대한광학 코비카 카메라 광고. 제조업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으려는 시도는 카메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 한국 카메라산업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 대한광학도 있었다. ‘코비카’란 브랜드로 제법 오래 풍미했던 카메라였다. 그러나 모두 한때 꿈이었고, 끝까지 꾸준히 도전해온 회사는 삼성뿐이었다.


삼성은 필름카메라시절, 그러니까 삼성항공 시절부터 꾸준히 카메라에 투자해왔다. 처음에는 미놀타를 파트너로 삼아 시장을 두드렸는데, 남의 이름과 기술을 가져다 하는 장사가 잘 되기란 쉽지 않았다. 당시만해도 국산 카메라를 산다는 것은 참 용기(!)까지 필요했던 시기다. 기왕 돈 들이는 것, 오리지날 일제로 사는 게 당연했으니까.


1984년 삼성정밀 카메라광고. 오리지날 미놀타와 구분하는 방법은 오른쪽에 삼성의 옛 별 셋 마크가 달려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이후 케녹스란 이름으로 조금 자리잡았지만 삼성이 원하는만큼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공고한 메이저들의 시장속에서 삼성이 포기하지 않고 버틴 덕분에 마침내 제대로 붙어볼 기회를 잡은 것이 바로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카메라란 브랜드 이름값으로 장사하는 시장인데, 삼성이 고급소비재인 이 시장에서 ’B to B‘ 제품인 반도체처럼 승부를 내려는게 무리가 아니냐고?


물론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필름카메라 시절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디카로 바뀌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이전 필름 카메라 시장까지는 시장의 쟁패는 광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느냐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디지털로 바뀌면서 광학기술 못잖게 디지털 전자기술의 중요성이 커졌다.

 

광학부품인 렌즈는, 전문업체에서 사오면 그만이다. 반면 카메라의 기술적 성능을 좌우하는 칩기술은 기존 카메라업체들보다는 오히려 반도체 등이 강한 전자기업들에게 유리한 측면이 된다.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보여준 저력으로 이제 삼성도 진짜 승부를 걸 기회가 온 것이 분명하다. 실제 삼성도 그런 포부를 밝히고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다. 기사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속으로는 삼성이 한번 파란을 일으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카메라란 시장에서 일본과 독일을 뺀 다른 나라 기업이 한 번이라도 메이저급으로 떠오른 적이 있는가? 한국 기업이 그 일을 해낸다면 그건 분명 대단한 일이며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기업이 디지털로 바뀐 카메라 시장에서 과연 통할 수 있기는 한 것인가? 이 실험은 앞서 소니가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바 있다. 진작부터 카메라에 관심을 갖고 생산을 오래 해온 삼성과 달리 소니는 필름카메라 시절 내내 비디오카메라에만 집중했던 기업이다. 그러다가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하자 소니는 발빠르게 시장에 진입해 단숨에 콤팩트 디카 시장의 강자로 자리잡았다.


소니의 최신 플래그십 바디 알파 700.


여기엔 전자기업이란 강점이 크게 작용했다. 


소니는 렌즈는 카를 자이스에게 사온다. 대신 핵심부품인 시시디는 직접 만든다. 여기에 소니의 강점인 차별성 있는 디자인이 소니 디카 ’사이버샷‘에 날개를 달아줬다.

 

발빠르게 디카 시장에 뛰어든 전자업체는 소니만이 아니었다. 전자계산기에 출발해 일본을 대표하는 엘시디 전문기업으로 자리잡은 카시오도 콤팩트 디카 시장에선 만만찮은 자리를 차지했다. 필름카메라 시절에는 아무도 상상못한 일이다.

 

일본 최대의 전자업체 마쓰시타도 마찬가지다. 파나소닉 브랜드에 왕년의 명가 라이카를 가져다 붙여 시장에 진입했고, 교세라등 기존 업체들이 나가떨어지는 틈바구니에서 잘 버텨내고 있다. 

 

반면 기존 잘나가던 카메라들을 보자. 기술력에서 좋은 평을 받았던 미놀타를 보면 기업의 인생유전을 실감할 수 있다. 삼성이 기술 때문에 매달렸을 정도로 강했던 미놀타는 일본 카메라를 대표하는 브랜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점점 시장에서 밀리더니 결국 코니카에게 흡수되어 코니카-미놀타로 바뀌었다. 그것도 잠시, 코니카-미놀타가 소니에게 빨려들어가면서 미놀타팬들에겐 서운하기 짝이 없게도 이름마저 사라졌다. 지금 미놀타의 흔적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소니의 디지털SLR 알파 시리즈의 바디 디자인에, 그리고 그 렌즈 마운트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한때 일본 카메라의 대명사로 일안리플렉스의 대표주자였던 펜탁스는 또 어떤가.


펜탁스는 카메라 회사도 아닌 렌즈회사 호야에 흡수된 상태다. 그나마 호야가 계속 펜탁스 사업을 유지할 것인지도 불투명하다. 삼성과 연합군을 이뤄 삼성에 바디를 공급해주고 있지만, 한때 “카메라는 아사히-펜탁스”란 말을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알 수조차 없다..

 

기존 강자들을 이렇게 처절하게 밀어내면서 소니와 카시오 등 후발 전자업체들은 전자기술을 경쟁력 삼아 카메라 시장에서 자리 잡았다. 여기에 최근 제네랄 일렉트릭까지 가능성을 보고 뒤늦게 이 시장에 뛰어들기까지 했다.


삼성은 이런 처절한 전장에서 잘 버티며 오히려 출발은 늦었지만 컴팩트 디카 시장에선 상당히  점유율을 높였다. 초기 허접스러워 보였던 디자인도 과도기적 제품이었던 ’샵 시리즈‘에서 비로소 글로벌 스탠다드에 근접하더니 요즘 주력인 ’블루‘ 시리즈에선 차별성있는 디자인 라인업을 구축했을 정도다.


삼성의 컴팩트 디카 ’블루‘ 시리즈 최신 모델 NV20. 검정 몸체에 렌즈에 푸른 링을 두르는 디자인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삼성이 카메라를 반도체나 디스플레이처럼 그룹차원에서 승부를 거는 메인 아이템은 아니라 삼성테크윈 차원에서 주력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 앞으로 이 격변하는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서 한국의 삼성과 일본의 여러 업체들이 벌일 승부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삼성이 과연 카메라에서도 특유의 저돌성으로 또 다른 역전신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무리 삼성이라도 카메라는 힘들지 않겠냐고 보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기술적 측면에선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보았듯 카메라 시장은 예상 이상으로 업체들의 흥망이 심했다. 같은 판세가 변함없이 계속되는 것 같아도 그 안에서는 그 어떤 시장보다 치열한 승부가 벌어진다. 디카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업계에 구조조정의 태풍이 불어닥칠 가능성은 크다.


영원한 강자는 틀림없이 없다

 

실제 기업들이 뜨고 지는 것을 보면 그토록 확고부동해보였던 1등 기업도 흐름을 한번 잘못 타면 순시간에 패자로 전락하고 만다. 전자업종은 한번 기술력이 앞서면 계속 앞서갈 것만 같은 데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하다. 업계 표준이나 핵심기술, 패러다임이 바뀔 때 바로 이런 대역전이 일어나곤 한다.

 

가장 첨단 업종이라는 휴대폰 시장의 변천사를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1세대(1G) 시절까지만 해도 모바일은 곧 모토롤라였다. 모토롤라 이외의 업체들은 시장에서 사실상 무의미했을 정도다. 에릭슨이나 노키아는 1위가 비교가 안되게 한참 처진 명목상의 2위 그룹이었다. 

 

그러나, 2세대(2G)가 되면서 노키아가 모토롤라를 누르고 최강자가 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틈탄 사상 최고의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전자제품에 관한한 전혀 떠올릴만한 나라가 아니었던 변방 중의 변방 핀란드의 휴대폰 회사가 미국 군수산업을 대표하는 통신기기 최강 모토롤라를 능가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걸 노키아는 해냈다. 노키아는 휴대폰을 초고가 첨단 제품에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일상품으로 가장 앞서 개념을 바꾼 회사였다. 그 덕분에 지금도 저가 시장을 장악하면서 굳게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3세대로 바뀌면서 약진한 회사는 바로 삼성이다. 삼성은 휴대폰이 3세대로 넘어가면서 반도체 기술의 강점을 앞세워 ’썩어도 준치’모토롤라와 2위 그룹을 형성하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씨디엠에이와 지에스엠을 모두 만들면서 축적한 기술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도체의 강점과 선단식 그룹 구조에서 쥐어 짜내는 경쟁력, 한국 기업으로선 그동안 없었던 디자인 강점을 더해 1급 기업으로 떠올랐다. 이런 변화는 지금은 당연한 것 같아도 누구도 점치기 힘든 변화들이었다.

 

늘 ‘그 회사가 그 회사 같은’ 카메라 업계도 휴대폰 못잖게 엎치락 뒤치락 순위 변화를 겪으며 챔피언이 바뀌어 왔다. 지금은 일본 기업들이 휩쓸고 있어서 원래부터 일본이 장악해온 시장 같지만, 처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20세기의 절반 가까운 기간 동안 카메라 업계의 최강은 독일이었다. 이 기간 동안 카메라의 판도는 비싸고 좋은 독일 카메라, 그리고 값싼 일본 등 나머지 카메라의 구도였다. 독일 카메라에서도 판도는 라이카, 그리고 라이카가 아닌 카메라의 판도였다.

 

1925년, 2년전 출범한 라이카가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생산하면서부터 독일은 카메라 최강국이 된다. 카를 자이스, 콘탁스, 포익틀랜더, 그리고 롤라이까지. 스웨덴에서 핫셀블라드란 걸출한 카메라가 나왔지만 극히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었다. 카메라 산업의 역사를 만든 고유명사들은 몽땅 독일에서 생겨났다.


초기 라이카. 라이카는 30년 넘게 카메라 디자인과 기능의 표준으로 군림했다.


이후 카메라는 독일만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지금도 마니아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명기들이 쏟아졌고, 독일 카메라의 아성은 깨뜨리기 힘들만큼 단단했다. 역시 독일에서 만들긴 했지만 미국 기업으로 인지되는 코닥이나 다른 일본의 업체들은 모두 저가 카메라 시장을 놓고 치고박아야 했다. 최고급 모델은 늘 독일, 그 중에서도 거의 대부분은 라이카의 것이었다. 라이카의 빨간 동그라미는 그 자체로 카메라를 대표했다.


라이카(에른스트 라이츠)의 저 빨강 동그라미 마크에 사람들은 아낌없이 거금을 지불했다.


카메라 초한지-독일의 몰락, 일본의 극적인 승리


그러나 한세대 넘게 지속된 독일의 전성기는 70년대 놀랍게도 순식간에 막을 내리고 만다. 만년 2등이었다고는 하나 일본의 카메라들이 최강 독일을 누르고 카메라의 패권을 빼앗아간 것은 믿기 힘든 역전극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정상의 자리에 안주한 독일의 방심이 원인이었다.

 

후발주자였던 일본의 니콘과 캐논 등은 일본의 강점인 전자기술을 발빠르게 카메라에 도입하며 차근차근 경쟁력을 축적해갔다. 어느 정도 기술적 격차가 극복된 다음, 승부는 지금껏 카메라의 표준이 되고 있는 ‘일안반사식’(싱글 렌즈 리플렉스, SLR)에서 갈렸다.


일본은 일찍부터 일안리플렉스에 전력투구했다. 반면 독일은 일안리플렉스보다는 기존 레인지파인더방식을 고집했다. 전자기술을 보탠 일본 카메라들은 기계적 성능에서 앞서는 부분을 늘려가며 가격은 독일제보다 싼 대신 성능은 그 못지않은 제품으로 약진했다. 가장 냉혹한 승부처인 미국 시장에서 일본은 마침내 독일 카메라를 누른다. 

 

올림푸스 신들처럼 강해보이던 독일 카메라들은 속속 무너졌다. 1971년 독일 카메라를 대표하는 카를 자이스가 일반 소비자용 카메라 생산을 포기한 발표는 카메라 산업의 역사가 바뀌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카를 자이스-이콘’이란 당대 최고의 카메라 브랜드가 그렇게 사라졌다. 이듬해, 역시 카를 자이스의 간판이었던 포익틀랜더 상표도 롤라이에게 넘어간다. 그나마 같은 독일 기업 품에서 연명하나 싶었으나, 아예 롤라이까지 주저앉고 만다.


카를 자이스는 자존심인 렌즈 산업을 이어가기 위해 그룹의 또다른 자존심 콘탁스마저 도려낸다. 콘탁스란 이름은 일본 야시카에게로 넘어간다. 이 모든 것이 1970년대 초반 4~5년 사이의 일이다. 그 뒤로 일반 소비자들이 직접 구입할 수 있는 신제품 독일제 카메라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모토롤라를 누른 노키아처럼 라이카를 필두로한 독일 카메라를 누른 믿기 힘든 역전을 일궈낸 주인공 가운데 최강자는 니콘이었다. 튼튼한 만듦새, 편리한 성능. 믿음직한 디자인으로 니콘은 카메라의 새로운 제왕이 되었다. 니콘의 전성기는 꺾일 줄 몰랐다.


그러면 그 뒤 다시 30년이 지난 지금의 니콘은?


필름카메라의 최강자로 군림한 니콘도 라이카처럼 믿기지 않은 역전을 당한다. 카메라 시장이 필름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바뀌면서, 그저 고만고만한 넘버 투 그룹 중 하나로만 여겨졌던 캐논이 판도를 뒤집은 것이다. 역전은 일찌감치 니콘 등이 일안리플렉스를 주시해 독일 카메라를 따돌렸듯 일찌감치 캐논이 디지털 카메라 시장으로 바뀔 것을 예감하고 투자해온 덕분이었다.


디지털 혁명을 읽은 캐논의 역전승


한번 디지털에서 잡은 기세는 무서웠다. 디지털 시장으로 바뀐 이후, 캐논은 디지털 카메라의 기술을 선도하는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사소한 것 같아도 한발 빠른 기술 표준화와 특유의 면밀한 마케팅으로 캐논은 니콘을 따돌리는데 성공했다.

 

지금 캐논은, 세계 소비자들이 10여년 전에 생각했던 그 캐논이 아니다. 지금 일본 최고의 기업은 소니와 마쓰시타(파나소닉)이 아니라, 캐논과 닌텐도다. 라이카의 카피 카메라를 만들던 캐논, 그리고 화투짝 만들던 회사에서 출발한 닌텐도가 세계 최강 제조업 국가 일본의 간판 기업이 된 것은 기업 흥망성쇠의 파란만장함을 그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보통 카메라 업체, 조금 더 잘 봐주면 복사기까지 만드는 회사 정도로 여기기 쉽지만, 캐논은 지금 세계적인 첨단기업이다. 기술력을 보여주는 미국특허 취득건수에서 캐논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정보기술기업 가운데 하나인 삼성전자보다 많거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기술력 덕분에 역전은 가능했다.


캐논의 기함 1D 마크3. 디카 시장으로 바뀐 뒤로 캐논은 풀프레임 바디 시장에서 독주해왔다.

잠시 곁가지로 빠지자면, 캐논이 이렇게 강한 기업으로 떠오른 데에는 캐논만의 독특한 ‘회의문화’가 크게 작용했다는 흥미로운 분석도 있다. 


캐논이 다른 회사와 가장 다른 부분은 바로 ’회의‘다! 그리고 이런 회의가 캐논의 경쟁력으로 불린다. 도대체 왜?

 

1999년 사카마키 히사시 사장이 취임 직후 캐논의 체질개선을 위해 가장 먼저 손 댄 것은 회의문화를 바꾸는 일이었다. 사카마키 사장은 회의실 탁자 높이를 30㎝ 높여 사람들이 서서 회의를 하게 했다. 집중력이 높아져 회의시간이 줄고 효율이 높아진다는 지론에서였다. ’미리 주제를 밝히고 준비한 뒤 참석하라‘, ’애매한 표현을 구체적으로 바꿔라‘, ’침묵하는 이나 평론가같은 발언을 하는 이를 막아라’등의 회의원칙도 세웠다.


이후 실제로 캐논의 회의시간은 크게 줄었고 회의문화가 바뀌면서 회사도 활력을 얻었다. 캐논의 이 ‘서서하는 회의’는 기업 문화를 바꾸어 경쟁력을 높이는 작지만 중요한 사례로 인용되고 있다.


카메라, 기술과 함께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이긴다


다시 카메라 이야기로 돌아오자. 좌우지간 이런 흐름으로 볼 때 카메라 시장에선 후발 주자라도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을 잘 받아들여 치고 나가면 최강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디지털 환경은 이런 변화를 더욱 부추긴다. 앞서 말했듯 소니의 약진이 그런 가능성을 증명한다. 삼성도 그런 가능성에 기대한다. 삼성과 소니가 그동안 다른 분야에서 보여준 실적을 보면 카메라에서도 그러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무엇보다도 디카로 카메라를 시작하는 어린 세대들에겐 소니와 삼성이란 이름이 더 강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역전 가능성이 솔직히 무척이나 낮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 카메라가 다른 전자제품과는 다른 상품이기 때문이다. 카메라엔 기술 이상의 필수성분이 있다. 고급 카메라일수록 사는 이의 비논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고, 무엇보다도 브랜드란 것이 구매를 결정하는데 어떤 제품보다도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카메라란 업종에서의 브랜드 파워란 소비자들이 절로 충성심을 갖고 따르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은 그 브랜드가 주는 어떠한 이야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하루아참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니와 삼성이 일등 브랜드가 된다면 그건 앞으로 기술 못잖게 사람들을 사로잡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덕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으로선 그런 날은 무척 오래 남아있다. 소니와 삼성은 이제 막 출발했을 뿐이다. 니콘이 독일을, 캐논이 니콘을 이기는 데에는 30년 가까운 숙성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계기를 잡았을 때 급속도로 빠르게 추월했던 것이다.

 

분명 카메라는 만드는 업체로선 쉽지 않은 제품이다. 무조건 기술이 좋다고 해서, 그리고 성능 대비 싸다고 해서 잘 팔리는 게 아니다. 전자제품이면서도 가장 비경제적, 비디지털적, 비논리적인 요소가 구매에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면서도 그 이전에 기술적 혁신을 따지는 전문적인 구매기준이 늘 존재하고 있다.


그런 것들이 합쳐졌을 때 사람들은 특정 카메라 브랜드에 스스로 매혹된다. 그리고 제품을 사용하면서 생겨난 믿음으로 제품과 회사를 평가한다. 그래서 카메라 소비자들은 다른 제품 소비자들과는 달리 같은 메이커를 쓸 경우 독특한 동지의식을 느끼며 제품에 대해 강하게 자기 정체성을 투여한다. 


그러면 요즘 카메라 유저들은 어떻게 카메라와 관계를 맺고, 어떻게 교감하고 있을까? 그리고 카메라팬들은 자기 카메라와 회사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다음편이 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