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친해지기

예술이 된 음반 재킷-줄리안 오피가 온다! 2007/09/20

딸기21 2018. 6. 17. 13:42

영국 모던록 그룹 블러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2000년 나온 블러의 베스트음반에는 눈길이 꽂혔다. 음반 노래보다도 독특한 음반 재킷 디자인이 눈을 잡아끈 것이다.



네 명의 멤버 얼굴을 검은 선으로 단순화해 그렸는데 재미있는 것은 눈 모양새였다. 비교적 사실적인 나머지 얼굴 부분과 달리 얼굴속 눈은 모두 까만 점으로만 처리되어 있었다. 사람 얼굴에서 가장 특징이 두드러지는 눈을 일부러 몰개성화한 것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네 명의 얼굴이 모두 비슷해보이기도 하면서 달라보이기도 하는게 묘했다. 어라, 이거 되게 경쾌한데?란 생각이 들었다. 유럽만화를 대표하는 에르제의 <땡땡> 시리즈 주인공 땡땡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 표지를 디자인한 사람이 줄리안 오피(Julian Opie)란 것은 훨씬 나중이었다. 그 이름이 궁금해졌던 것은 강한 인상을 남겼던 그 얼굴 그림이 블러의 음반말고도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였다.



또 하나 더 호기심을 끌었던 것은 인체를 단순화하는 그의 방식이 초반 눈을 동그란 점으로 표현하는 블러 재킷식 표현에서 진화해, 아예 사람 머리 부분을 원으로만 표현하는 이미지로 넘어간 것이었다.


도대체 누굴까, 조금씩 호기심은 커져갔다.


<루스 스모킹>과 <루스 위드 시가렛>. 점점 더 단순해지고 있다.


몸통 부분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머리만 목도 없이 공중에 떠있는 원으로 처리한 느낌은 정말 현대인의 감성, 현대인의 허무함, 익명성 그런 것들을 잘 잡아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더 상업공간의 인테리어에 잘 맞아떨어졌고, 이미지의 상징성은 강하게 도드라져 눈을 사로잡았다. 영국과 일본 곳곳에서 보이는 그 이미지의 주인공이 바로 줄리안 오피였다.


<루스 스모킹>과 <스마일>


오피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 블러의 베스트음반은 알고보니 학교 동창에 대한 선물이기도 했다. 58년 개띠인 오피는 영국 미술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를 1979년부터 82년까지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훗날 세계적인 거물로 성장한 인물들이 그와 같은 시기 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오피보다도 훨씬 더 유명하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화제를 몰고 다니는 미술가인 데미언 허스트가 그와 동창이었다. 그리고 또다른 동창 하나가 뒤에 슈퍼스타가 되었다. 그게 바로 블러의 그레이엄 콕슨이었던 것이다. 블러의 다른 멤버인 데미언 알반과 엘게스 제임스도 이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현재 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두 슈퍼스타인 오피와 허스트는 그래서 블러를 위해 음반 재킷 디자인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블러와 함께 줄리안 오피도 영국의 문화아이콘으로, 대중문화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의 작품은 팝아트다. 팝아트가 뻔한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들이 그만큼 이해하기 쉽게 미술을 하는 장르도 없다. 그런 점에서 팝아트는 분명 강력하고 또 존재의미가 있다. 줄리안 오피는 그런 팝아트의 현재를 대변한다.


운동감을 강조한 <디스 이즈 샤노자> 시리즈. 스트리퍼의 춤이 소재여서 사실은 야한 내용이다.


<워칭 수잔> 시리즈. 더 단순해졌다.


오피의 작품은 일단 사진을 스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를 컴퓨터로 단순화해 회화로, 조각으로, 동영상으로 바꾼다. 초기 눈만 점으로 찍던 것에서 동그란 원형 얼굴로 진화해가며 그의 작품은 더욱 몰개성적인 개성을 갖게 됐다.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경기도 김포에 있는 김포조각공원에 그의 작품이 있다.

 

김포조각공원에 있는 오피의 조각 <모던-자연>


그러나 이미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지 한참 되었음에도 그의 작품 전시회는 국내에선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피 전시회가 올 가을 떼지어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학고재(02-720-1524)에서 10월28일까지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등과 함께 그의 작품을 전시한다고 한다. 동시에 박여숙화랑(02-549-7575)에서도 9월28일까지 그 유명한 데미언 하스트와 줄리안 오피 2인 전시회를 한다는 것이다. 좋아하던 작가였기에 우선 반가웠고, 그리곤 왠일인가 싶었다. 미술담당 임종업 선임기자께 물으니 “일본에서 앞서 열린 오피 전시회가 국내 화랑관계자들 눈길을 최근에 잡아끈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유행한 것이 벌써 몇년 전인데…, 의아하기도 했지만 뭐 반가울 수밖에.


팝아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분명 가장 이해하기 쉬운 미술장르다. 흔히 현대미술은 그 맥락과 내용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결코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작가가 왜 작품을 만들었는지 의도만 설명들으면 각종 도상학적 지식이 필요한 고전 미술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를 내세우는 팝아트는 더욱 이해하기 쉽다. 그런 점에서 이번 줄리안 오피 전시회는 팝아트란 장르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된다. 팝아트에서도 미술사책에 나오는 워홀식의 고전 팝아트가 아니라 요즘 대중문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최신 팝아트를 만날 수 있다. 한번들 가보시라.


 

음반 재킷도 예술이다

 

영국의 문화 전통에서 가장 도드라진 것 가운데 하나가 팝 스타의 음반을 유명 미술가가 그리거나 디자인하는 것이다. 음악과 예술의 아름다운 만남이다. 예술이란 이렇게 다른 장르와 함께 갈 때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다. 피카소도 무대 디자인을 했듯 주요 공연들은 미술가와 함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블러의 음반이 보여주듯 음반 재킷 디자인은 현대 디자인에서 뛰어난 스타의 등용문이자 경연장이기도 했다.


블러의 음반 <싱크 탱크>


영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인기그룹 블러는 줄리안 오피가 디자인한 베스트 음반말고도 다른 음반 재킷들 역시 당대의 영국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꾸민 것으로 유명하다. 2003년작 <씽크 탱크>는 영국 팝아트의 최고 인기스타로 꼽히는 뱅크시(www.banksy.co.uk)의 작품이다. 뱅크시는 코믹한 벽화로 유명한데, 스텐실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20세기 초 절대영화를 누렸던 영국의 힘은 이제 모두 사라졌지만, 유일하게 유니온 잭이 정상에서 펄럭이는 분야가 바로 대중음악이다. 팝 음악사에서 영국은 거의 미국과 맞먹는 영향력을 행사하며 지금까지 주도권을 이어오다. 특히 60년대 비틀스 등 영국 음악의 미국 상륙 등을 일컫는 이른바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헤비메탈이나 프로그레시브록, 펑크 등 영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실험들은 팝의 흐름을 바꾸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당시 음반들 역시 개성있고 시각적인 디자인으로 음반산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룹 예스의 경우 특히 음악 못잖게 음반 재킷이 독창적인 그룹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앨범은 판타지풍으로 일관되어 보기만 해보 예스의 음반이라고 알 수 있을 정도다. 로저 딘이 디자인한 음반 재킷 이미지들은 예스란 그룹에 음악 이외의 또다른 아우라를 부여했다.


록그룹 예스의 걸작 음반


저항적인 펑크음악을 들고나와 팝계에 일대 변화를 촉발했던 섹스피스톨스의 <갓 세이브 더 퀸>도 지금 다시 보는 재미가 각별한 음반이다. 제이미 라이드가 디자인한 이 음반 재킷은 기성문화에 정면으로 도발했던 섹스피스톨스의 음악처럼 영국 권위의 상징인 영국 여왕을 비꼰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섹스 피스톨즈의 음반 <갓 세이브 더 퀸>


<더 월>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 등의 독특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도 빠지지 않는다. 오브리 파웰이 디자인한 <애니멀스> 등의 디자인은 이제 영국의 문화유산으로 남았을 정도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 <애니멀스>


영국을 대표하는 수준을 넘어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로 꼽히는 영국 최고의 문화계 스타인 네빌 브로디도 걸출한 음반 재킷 디자인을 남겼다. 그가 디자인한 카바레 볼테르의 음반 <마이크로 포니스>다.


카바레 볼테르의 음반 <마이크로 포니스>


뒷날 잡지 <페이스>의 아트디렉터로 명성을 얻게 되는 브로디가 그 이전에 디자인 감각을 담금질했던 작업이 바로 음반 재킷디자인이었다. 카바레 볼테르의 음반은 바로 그 시기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단적이면서도 전위적인 시도로 세계 디자인을 주도하는 브로디의 초기 디자인을 접할 수 있는데, 미묘한 형상들이 난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브로디 특유의 감각이 이 음반 재킷에도 잘 살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엘피가 시디로, 시디가 파일로 바뀌면서 미술과 대중음악의 행복한 결합은 사라져가고 있다. 블러의 음반은 그런 동반 작업의 거의 최후 사례가 될 지도 모른다. 음반을 사며 이미지를 함께 소유하는 기쁨을 이제 더이상 누리기 어려워졌다.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