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가구의 세계

간판 속 문화, 문화 속 간판 2005/11/10 00:02

딸기21 2018. 6. 5. 16:37

우리 주변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거리 가구’ 곧 ‘스트리트 퍼니처’는 뭘까요?

아마도 간판일 겁니다.

우리나라는 간판 많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나라입니다. 그야말로 거리 전체가 간판의 숲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우리나라처럼 간판이 많은 나라는 홍콩과 일본 정도뿐으로 생각됩니다. 이 두 곳도 우리처럼 간판이 빈틈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듯 거리를 뒤덮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지역의 간판 문화는 좀 다릅니다.

홍콩 간판은 한자 글씨를 강조하는 네온사인 간판들이 많습니다.

일본은 다양한 재료로 조형물처럼 모양을 낸 간판들이 특징입니다. 


그러면 우리 간판은?


제가 보기에 한국 간판들의 특징은 ‘제멋대로’ 네 글자라고 봅니다. 좋게 말해 ‘제 멋’이지만 실제로는 디자인적인 특성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크게, 무조건 튀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겠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 간판들이 만약 소리로 알리는 확성기였다면 우리 귀는 이미 터져버렸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간혹 이렇게 난삽해보이는 간판이 한국의 문화이미지 중 하나라고 평가하는 분도 계십니다. 아예 이렇게 정신없는 간판 문화를 우리 고융의 거리 풍경으로 인정하고 문화상품화 하자는 것인데, 제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너그러운 평가가 아니냐 생각됩니다. 이 요란하기 짝이 없는 간판들만 정비되도 우리 거리가 훨씬 여유로워질 테니까요.


문제는 이 난삽한 간판 문화가 나아지지 않는 점입니다.


여기 두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경기도 제부도 부근 횟집 간판들.


오스트리아 게트라이데 거리의 금속 간판들. (출처: 네이버 블로그)


윗 사진은 수도권 시민들이 즐겨찾는 나들이 코스인 제부도의 식당가입니다.

간판이 가득한 건물이야 늘 보아온 것이지만, 이곳 횟집들을 처음 본 순간에는 정말 질려버렸습니다. 그야말로 눈을 압도하는듯 했습니다. 제부로도 엠티를 갔다가 식당을 고르는 중이었는데, 하도 식당 간판들이 강렬해서 오히려 어느 집도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디까지가 한 집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건물들이 마치 메뉴판 같더군요.



재미있는 점은, 식사를 하고 다시 보니 처음 볼 때 처럼 눈이 피곤하진 않았다는 겁니다. 그새 이런 간판에 익숙해진 것이겠지요. 


아래 사진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시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그의 게트라이데 거리의 간판들입니다.


게트라이데 거리는 간판으로 유명한 거리입니다. 간판을 금속공예 작품처럼 정성껏 만들기로 유명한 유럽에서도 가장 간판이 예쁜 곳으로 꼽힙니다. 우리나라처럼 상호만 크게 쓰는 간판이 아니라 조각품 같은 조형물로 업소를 소개하는 간판이 많습니다. 


게트라이데 거리 맥도날드의 간판. (출처: 네이버 블로그)



이 게트라이데 거리에서는 맥도날드도 특유의 거대한 원색 간판을 포기하고 거리의 질서에 순응했습니다. (** 맥도날드는 독일의 아름다운 중세도시 로텐부르크에서도 간판을 이런 식으로 바꾼 바 있습니다. 스타벅스가 인사동에 한글 간판을 내건 것과 비슷한 맥락이겠지요.) 


무조건 유럽 게트라이데 거리 간판은 멋지니 좋고, 제부도 횟집 간판은 조악하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문화와 취향의 차이 이전에 이 두거리 간판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간판 문화는 과연 리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죠. 우리나라에도 간판이 유독 깨끗하고 세련된 동네가 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서울 강남입니다. 바로 청담동입니다.


물론 청담동에도 혼자만 잘났다고 소리치는 간판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동네에  견주면 훨씬 차분하고 깔금하면서 정제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옆 압구정동과 비교해봐도 이는 두드러집니다.


왜 청담동 간판은 다를까요?


우선 청담동은 건물 하나에 가게가 하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 건물에 간판이 많아야 2~3개뿐입니다. 또, 처음 건물을 지을 때부터 디자인 전문가인 건축가들에게 맡기다보니 전국에서 간판의 디자인적인 요소가 가장 강한 지역이 된 겁니다. 그런 점에서 청담동은, 청담동은 간판도 하나의 문화라고 볼 때 ‘문화는 결국 돈에 달렸다’는 속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도시의 속성 중에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간판으로 국민소득을 가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수준이 되면 간판이 미적 가치와 거리 환경까지 고려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잘살게 되면 간판도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청담동에 있는 가게들은 모두 입소문으로 위치를 알고 찾아오는 특정 부유층들만을 상대하기 때문에 굳이 여러 가게들 틈바구니에서 혼자만 더 돋보이겠다고 요란한 간판을 내 걸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청담동 간판문화는 다른 지역보다 소득과 소비 수준이 높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기계적인 비교가 기분 나쁘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작가 공선옥씨는 책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에서 간판에 대해 언급합니다. 


“한국의 ‘간판문화’에 대해서 비판하는 소리를 이따씩 듣게 된다. 한국의 간판들은 요란하고 천박하다, 한마디로 간판문화가 없다, 라는 것이 요지이다. 그러면서 꼭 비교하는 곳이 있으니 선진유럽의 도시들이다. 서울 청담동 거리가 꼭 그들이 말하는 유럽 거리를 닮아가는 모양이다. 붉은 간판 노란 간판에 형광등 수십개 매단 간판이 그곳에는 없다.” 


“나는 속이 상한다. 우선 형형색색의 어지러운 간판들에 대하여. 그 간판들을 내놓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각박한 삶에 대하여. 그러나 정말 내 오장을 상하게 하는 것은 생존의 깃발 펄럭이는 거리와 그 거리의 사람들에 대하여 한번이라도 연민이나 애정을 가져보지 않고 그곳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꼭 그런 관점만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거리의 간판을 내건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방식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거리의 거칠고 촌스런 간판을 내거는 사람들이 그 간판으로 부풀리는 자기 가게의 내용에 그렇게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청담동의 우아한 간판들이 ‘가진 자’의 것들이고, 저 요란한 간판들은 ‘서민’들의 것이라고 명쾌하게 판단할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저 요란한 간판들이 그저 무조건 크게 꾸미기만 한 것은 아닌지, 실제 가게에서 파는 물품과 서비스에 대해 철저한 프로의식을 지녔는지, 손님을 너무 뜨내기로 보고, 한번 돈내고 가게 하려고 간판으로 눈길을 끌려는 건 아닌지, 진정 자기 가게가 내놓는 상품에 자신이 있어 저런 간판을 내걸고 있는지 묻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간판 하나에도 우리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수많은 질문들이 담겨 있는 듯 합니다.


우리나라가 소득 3만불이 넘으면 청담동 간판들처럼 차분하고 ‘있어보이는’ 간판들이 주류를 이루게 될까요? 청담동 가게들과는 달리 요란한 간판을 내걸고 세상과 처절하게 부대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서민들의 가게도 수준이 높아질까요?


자못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