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가구의 세계

길거리 벤치도 명품이 된다?-세계적 디자이너들의 벤치 2007/06/12

딸기21 2018. 6. 11. 10:58

일본에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도심 재개발에 브랜드 전략을 적용해 명소로 만들어내는 일본의 재개발 사례들을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현지에서 보니 재개발로 만든 대형 복합상업엔터테인먼트 공간들이 도쿄를 대표하는 쇼핑공간, 관광공간으로 꼽히며 방문객을 불러모으고 있었습니다. 2002년 마루노우치 빌딩, 2003년 롯폰기힐스, 2003년 시오도메 시오사이트, 2006년 오모테산도힐스에 이어 올해에는 ‘도쿄 미드타운’과 ‘신마루노우치’가 등장해 새 관광 명소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제가 주로 돌아본 곳은 미드타운과 롯폰기힐스였습니다. 미드타운은 최신 사례여서, 롯폰기힐스는 이미지 메이킹에 가장 성공한 사례여서 골랐습니다. 이 글에선 롯폰기힐스를 살펴보겠습니다.

 

롯폰기힐스는 호텔, 사무빌딩, 쇼핑센터, 극장 등을 묶은 도심 속 미니 도심입니다. 그런데 이 롯폰기힐스가 유명해진 것은 재개발을 추진한 부동산 재벌 모리의 독특한 아이디어 덕분이었습니다.


모리는 뻔한 부동산 개발에 ‘문화’를 마케팅 포인트로 더했습니다. 우선, 롯폰기힐스의 54층 모리타워 꼭대기에 모리미술관을 배치했습니다. 가장 전망좋고 가장 비싸게 임대료를 받을 수 있는 곳에 미술관을 올린 겁니다. 독특한 발상 전환으로 모리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미술관’, ‘천국에서 가장 가까운 미술관’ 등의 카피를 뽑아내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스트리트 퍼니처’로 이곳을 포장했습니다.


롯폰기힐스 뒤편 게야키자카도리 거리는 명품 쇼핑가입니다. 롯폰기힐스는 이 거리에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만든 ‘명품 벤치’를 놓았습니다. 거리 공공기물인 ‘스트리트 퍼니처’를 최고급 예술품으로 바꾼 겁니다. 단순하고 흔한 것을 문화적으로 잘 포장하는 아이디어 하나로 롯폰기힐스는 세계 디자이너들의 필수 순례지로 자리잡았습니다.


설명보다도 이 곳을 세계에 알린 ‘명품 벤치’들을 보시겠습니다. 먼저 보실 것은 앞서 다른 포스트에서도 설명드렸던 이곳의 간판스타 <I Can't Give You Anything But Love>입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유명한 노래 제목을 따온 것이구요, 우리말로는 ‘님께 드릴 것은 사랑뿐’ 쯤 되겠군요.

 


이 경쾌한 벤치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게적인 디자이너
 우치다 시게루의 작품입니다. 독특한 형태로 이곳 명품 벤치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이곳에 명품 스트리트 퍼니처가 들어선 것이 바로 이 우치다 시게루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자, 다음은 아주아주 이름이 시적인 의자입니다. 투명 재질로 만든 의자란 점 말고 조형적으로 아주 독특하진 않는데 그 이름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이름이 무엇같습니까?


이 두 의자의 이름은 <Chair Disappears in the Rain>. 우리말로 하면 ‘비가 오면 사라지는 의자’입니다. 도쿠진 요시오카의 작품입니다. 역시 고수들은 경쾌합니다. 도쿠진 요시오카는 특히 경쾌한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인데, 빵모양 의자 등이 유명합니다.

 


이 작품에서 짧은 건널목으로 길을 건너면 의자인지 알아차리기 힘든 이 의자가 있습니다.
 


수학의 무한대 기호같이 생긴 저 구조물이 벤치입니다. 옆 화단에서 나온 식물로 이어지면서 화단과 벤치가 하나가 됩니다.

 


저 의자는
 론 아라드의 <Evergreen>이란 작품입니다. 론 아라드는 아주 재주많기로 소문난 세계적 스타 디자이너입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곧 건축가고 건축가가 곧 디자이너이듯 그도 건축가이면서 디자이넙니다. 그리고 조경에도 솜씨가 좋아 조경 디자인에서도 이름이 유명합니다. 무대미술가이기도 하구요, 연출가이기까지 하답니다.

 

다음 벤치는 벤치 자체가 작은 방처럼 만들어진 벤치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흡연자들이앉아서 담배 피기에 제격입니다. 그러나 원래 이름을 보면 여기 앉아서 사색을 하라는 것이었나 봅니다. 이름은 <Isola Calma>, ‘정적의 섬’이란 뜻입니다.

 


이 벤치는 뭐 생각을 조금만 하면 나올 법한 디자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벤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뭐니뭐니해도 이 벤치를 디자인한 사람이 바로 에토레 소트사스란 점일겁니다.


에토레 소트사스란 이름이 갖는 의미는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겐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우리가 ‘디자인 강국’하면 꼽는 나라가 이탈리아입니다. 이 이탈리아 디자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하면 단연 에토레 소트사스가 꼽힙니다. 20세기 디자인사의 흐름에서 주역으로 활동했고, 특히 가구 디자이너로서 탁월한 걸작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하도 유명한 작품이 많아서 뭘 소개해야 할지 어려울 정도인데, 이사람의 대표적인 작품 하나 소개합니다. 칼튼 책장이란 것인데 아주 산뜻합니다.

 

소트사스의 대표작. 사진 출처 구글

그 다음에 나오는 롯폰기의 벤치는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는 아주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sKape>입니다. 스케이프로 읽으면 된답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이 벤치가 다른 사람도 아닌
 카림 라시드의 작품이란 점에서는 무척 실망했습니다. 라시드적인 디자인의 매력이 덜했기 때문인데, 그래도 라시드의 작품이란 점만으로도 디자인팬들에겐 귀가 솔깃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인건 분명합니다.


카림 라시드는 요즘 세계 디자인계 최고 스타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이집트 출신이며, 디자인의 메카 뉴욕의 디자인 트렌드를 이끌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의자나 벤치에서 놀라운 솜씨를 보여줘왔습니다. 유기적이면서 독특한 생활용품을 많이 디자인했습니다. 대표적 가구를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이 디자인한 작품을, 실제 제법 많은 한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뭐냐구요? 현대M카드를 이사람이 디자인했습니다.

라시드는 스트리트 퍼니처에도 관심이 물론 많은데, 제가 좋아하는 이 사람 작품은 ‘글로벌 에너지’란 이름의 맨홀 뚜껑입니다. 늘 거리에서 보는 맨홀 뚜껑을 라시드식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롯폰기의 벤치는, 영 제맘에는 안들더군요. 그건 적어도 라시드라면 더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혁신적인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겁니다. 그렇지만 저와 취향이 다른 분들은 좋아하실테니 다음 벤치로 넘어갑니다.
 


그 다음 벤치는 아주 화려하진 않아도 재미있는, 그리고 어렵지 않아보이는 디자인입니다.

 


왠지 오히려 평범한 듯한, 그렇지만 자세히보면 고급스런 벤치입니다. 이 벤치에 새긴 저 물방울 무늬는 일본 전통 의상 유타카 무늬에서 가져왔답니다. 일본 최고 스타 건축가 이토 도요의 작품 <
Ripples>입니다. 


이토 도요는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건축가 중 한 명입니다. 일본의 청담동인 오모테산도에 있는 TOD'S 건물이 이토 도요 작품입니다. 이번 도쿄 방문중 지나가다 보고는 급하게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별로지만 건물은 일단 보시면 확실히 건축가가 한 것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 토즈 빌딩보다 이사람 작품으로 더 유명한 것은 역시 신추쿠의 오페라시티, 그리고 긴자에 있는 진주가게 `미키모토2'일 겁니다. 생긴 모양 때문에 일명 ‘치즈 빌딩’ 되겠습니다. 한번 보시죠.

 

긴자 미키모토 진주 사옥. 사진 출처 네이버


이 이토 도요의 리플스 위에 있는 벤치도 재미납니다. 안드레아 브란치의 <Arch>입니다. 아주 거장이고 노장입니다. 이탈리아 디자인계의 거물로, 20세기 이탈리아 디자인 운동을 이끌어왔습니다. 국내에서 공공미술계 주요한 화제였던 안양예술공원 프로젝트에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소풍 벤치>란 칼라풀한 벤치가 이 사람 겁니다.

 


그 다음은
 히비노 가쓰히코의 무지하게 이름 긴 작품 벤치입니다. 

제목은 <Where did this big stone come from? Where does this river flow into? Where am I going?>, 곧 ‘이 큰 돌은 어디서 왔을까? 이 강은 어디로 흘러가는 거지? 난 어디로 가고 있는거야?’란 아주 철학적인 제목입니다. 앉아보면 느낌이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이 의자는 어떠세요?  
토머스 산델이란 작가의 <Annas Stenar>, `안나의 돌'이란 의자입니다. 스톡홀름 앞바다 섬들을 여행했을 때 추억이 모티브라고 합니다. 

 

 

그런데 위의 사진 돌 벤치 뒤의 담을 보시지요. 자세히 보면 전광판이고, 디지털 숫자가 써 있습니다.  실은 저 담도 작품입니다. 미야지마 다쓰오의 <카운터 보이드>란 유리 스크린 작품입니다. 저 숫자는 1에서 9까지 변합니다. 인생의 족도가 저마다 다른 것을 표시한다고 합니다. 낮보다는 밤에 빛이 나면서 훨씬 예쁘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밤에 다시 찾아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밤 모습 소개합니다.

 


자, 세계적 디자이너들의 작품이란 벤치들을 보시니
 어떠십니까? 이게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구요? 


물론 대단치 않은 사소한 차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한 것이 콜럼부스의 달걀 같은 일이란 겁니다.


아마 디자인 계통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 저 디자이너들의 이름들은 록음악 좋아하는 분들에게 비틀스나 롤링스톤스, 레드 제펠린, 건즈 앤 로지스 같은 이름일 겁니다. 명품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프라다나 루이 비통, 에르메스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저 유명한 디자이너들에게 벤치를 주문하는 발상, 그 벤치를 한자리에 모아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 그게 문화의 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롯폰기 힐스는 그런 문화의 힘을 잘 이용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